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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초대하시겠습니까?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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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식량도 다 떨어졌습니다. 며칠 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 하고, 결사적으로 걸었습니다. 마침내 사막 한 가운데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샘물을 마시고 보니, 얼마 전에 누군가 거기에 천막을 쳤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음식조각이라도 떨어진 것이 있을까? 해서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주머니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얼른 주워 만져 보니, 손에 뭔가 단단한 것이 만져져서 미친 듯이 주머니를 열고 보니, 그것들은 아주 크고, 아름다운 진주 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 움큼 쥐었던 진주 알들은 사방에 내 던지며, 울부짖었습니다.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그리고는 얼마 후, 그 사람은 그 사막에서 굶어 죽어 갔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진주 알 같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인생을 화려하게 하고, 멋지게 꾸미도록 우리를 돕기는 하지만, 정작 내게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지는 못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너무나 자주 번쩍거리는 것에 팔려서, 눈에 보이는 것들과 사람들의 명성에 끌려서, 나의 삶 속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로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죄악에 물든 세상 한복판에 오셔서 그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 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살아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나를 사랑해야 되는지도 잘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그 큰 고통을 당해야 하셨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 사랑에 진정한 깨달음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받은 그 사랑, 내가 받은 그 구원의 감격을 이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위해 태신자를 품고 한 영혼을 위해 교회가 관심을 갖는 것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정말 무엇이 우리에게 참 가치 있는 일인가를 알아 가는 시간들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십시오. 한 중풍병자를 위하여 그를 아끼는 친구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스토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중풍병은 당시만 해도 거의 불치병이었고, 일단 이 병에 걸리면 미래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스스로도, 그리고 그의 가족도 이미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포기 할 수 없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를 포기해 버리기엔 너무도 귀한 이 불행을 겪고 있는 친구를 침상에 싣고, 심지어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께 나아가게 했던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친구를 주께로 인도하려는 열망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열망은 믿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3절을 보세요.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장면입니다. 여기에 대해 주님은 5절에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저희의)믿음을 보시고-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저희의 무엇을 보셨다고요? 예, 맞습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네 친구의 결단은 믿음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고침 받을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는 수단과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하여 친구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그를 고치셨습니다.

우리는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태신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믿음을 가질 것을 기대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 가족, 내 친구 내 태신자가 아직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지만, 아직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도 복음을 들으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믿음의 통로로 쓰셔서 우리의 태신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대부분 한 영혼의 구원의 배후에는 그의 구원을 믿고 기도한 누군가의 믿음이 존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일이 있습니다. 한 여 집사님이 자기 남편의 구원을 위해 일년을 작정하고 새벽마다 기도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가는데도 남편은 좀처럼 변화의 징조를 보이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한번만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교회 좀 나와 달라고 호소해도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기도회에 가고자 막 집안을 나가려 하는데 현관의 남편 구두가 눈에 뜨이더랍니다. 그 순간 갑자기 한 영감이 스치더랍니다. 그 날 새벽 그녀는 남편 구두를 싸 가지고 교회에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 남편의 구두부터 당신 존전에 나왔사오니 이제 이 구두 주인이 나오게 하소서" 기도하면서 슬며시 자기 한 짓이 스스로도 웃음이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그 순간 빙그레 웃으시는 주님의 모습이 떠오르며 주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이 생기더랍니다. 집에 가서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 단단히 미쳤군"하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남편이 교회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남편에게 "그때 어떻게 날 따라 나올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소원하는 당신의 바램을 외면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믿음이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아니 주께서 그녀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로. 불가능을 뛰어 넘어 가능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저희들에게는 여러 가지 불가능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중풍병자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중풍병은 유대인 사회에서 천벌로 간주되었습니다.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 또는 몸의 지체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환자 자신에게 절망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결코 중풍병자 혼자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4명이 매고 예수님께 왔는데 사람들 때문에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본문 2절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4절에도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라고 했습니다. 장소에 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길이 막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 앞의 자리도 없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앉을 자리,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가능을 뛰어넘어 가능을 보았습니다. 가능의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구하는 사람이 받고, 찾는 사람이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리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에 보면 "무리로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상을 달아 내리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팔레스틴의 지붕을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완벽한 현대 건축물의 지붕으로 연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평행으로 놓여진 목재들 위에 막대기를 엇갈려 놓고 그 위에 갈대, 나뭇가지 그리고 엉겅퀴 등을 놓고 약간의 흙을 덮은 정도의 지붕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을 뜯는 것은 여전히 모험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붕을 뜯는 동안 흙 부스러기가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떨어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놀라며 이 웬 무식한 작태냐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를 살리겠다는 집념하나로 그들은 모험을 강행한 것입니다. 이번 이웃 사랑 축제를 통해 여러분과 저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참으로 주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면 모험을 시작하십시오. 그들이 복음을 들으러 축제의 장에 나아오도록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네 친구들의 결단의 또 하나의 특성은 희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냈습니다. 지붕을 뜯는 과정에서의 남들의 비난과 항의를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친구가 고침 받은 후 이들은 상당한 지붕 값도 보상의 차원에서 지불했을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위대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통해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구원받기를 진실로 소망하십니까? 캠브리지 대학 출신의 명망 있는 지식인이요 스포츠 스타였고 훗날 WEC이라는 선교단체를 세웠던 C.T. 스터드가 보장된 출세의 길을 버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의 전도를 위해 선교사의 길을 떠나갈 때 그를 아끼는 이들은 과연 그의 그런 희생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단순하고 분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어떤 희생도 지나친 것은 없습니다." 이 가을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희생의 값을 지불할 결심인가요?

세째로 그가 받은 선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 그러면 친구들의 희생으로 이 중풍병자가 얻은 선물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그 선물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얻은 선물이었고, 겉 사람과 속 사람을 함께 행복하게 하는 선물이었습니다. 지상에서 우리가 받는 대부분의 선물은 현재 지향적이지만,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선물들이고, 겉 사람을 치장하는 선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내면까지 배려한 선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 얻은 지상의 어떤 선물들과 비교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본문의 네 친구들이 예수님을 통해 자기 친구 중풍병자에게 주어지기를 기대한 선물은 단지 중풍 병의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아온 그에게 예수께서 첫째로 선언하신 말씀은 중풍병의 치유 선언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5절을 보십시오. 그의 제일성은 무엇이었습니까?"작은 자(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중풍병의 치유에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국 11절에서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육체의 치유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육체라는 겉 사람의 치유보다 내면의 치유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임을 예수께서는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 사람의 치유 없이 인간은 겉 사람의 치장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언 앞에 놀라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7절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들의 반응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인간은 동일한 죄인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사할 권세를 갖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무지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자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소망이시고 예수가 구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열려오고 현재는 새로워집니다. 속 사람이 치유되고 겉 사람도 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완벽한 선물, 최고의 선물, 유일한 선물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아침!
우리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지는 않으십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여러분 가운데 집안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어도 일년이 다 지나도록 전도 한번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가족 가운데 그 가족의 구원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까요?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들을 절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을 냅시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적어도, 주차장이 아무리 불편해도, 장소가 비좁아도 좋습니다. 그런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이제 우리 역시 우리의 태신자들을,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을 어떻게 주 앞으로 인도해야하나요? 이 중풍병자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던, 친구들처럼, 우리 역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어느 때는 시간을 내야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써야합니다. 자존심을 접어두고 접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으로서 흐트러진 삶을 정상적인 제 궤도로 올려놓는 결정적인 열쇠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증인,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살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인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는 삶입니까? 우리가 예수의 증인된 삶을 보여준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고리가 정상적으로 엮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없이 듣고 암송하는 마태복음 6:33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생각하고 살면 이 땅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땅을 생각하고 땅에 주목하고 산다면 우리의 가정도, 직장도, 재물도, 젊음도, 건강도 결국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잃어버린 생명을 건지는 삶 보다 더 아름다운 생은 없습니다. 이번 터치 153 새 생명축제를 통해서 이와 같은 풍성한 열매가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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