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축제]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요일 3:1-3)

  • 잡초 잡초
  • 422
  • 0

첨부 1


1912년 1,50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북대서양에 가라앉았던 초호화 여객선 의 비극적인 침몰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신분차이를 극복하고 맺어진 두 남녀의 숨겨진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1990년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탐사 작업을 벌이던 보물 사냥꾼과 과학자들은 궤짝 속에서 목걸이만 걸치고 있는 누드 그림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뉴스로 보고 알게 된 타이타닉의 생존자 101세 되는 로즈 할머니는 그 그림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80여 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여인은 무려 80년 동안, 단 4일간 사랑을 나누었던 잭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 오고 있었습니다. 빙산과의 충돌로 배가 침몰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에 잭은 로즈를 부서진 배의 파편 조각 위에 올려줍니다. 그 잠시 동안 잭은 로즈에게 반드시 살아남을 것을 부탁하고 차디찬 죽음의 바다 속으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잭과의 그 마지막 대화를 회상하면서 로즈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내 생명만 구해준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구원해 주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 안에,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로즈로 하여금 17살에 만나 단 4일 동안의 나눈 사랑을 101살이 될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직도 그는 살아있다"고 이야기하게 했을까요?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진실로 사랑했던 사랑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떠올리면 여전히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한 분들이 왜 그렇게 성가시게 하면서 까지 이 자리를 오게 하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이곳으로 초대한 손길들이 살아가면서 이것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란 말을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로 유비가 융중에 있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다는데 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유비는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에도 두 번씩이나 허탕을 치며 성의를 다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자 사흘이나 목욕재계를 한 후 다시 제갈량을 찾아갔습니다. 어떤 면에서 삼고초려는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비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제갈량을 찾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여러분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비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제갈량의 탁월한 재능이었다면, 우리의 발걸음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모른 채 지옥으로 걸어가는 불쌍한 영혼 때문에, 그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처음 나온 여러분들과 함께 이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이 자리까지 여러분을 초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그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아마 성경기자들 가운데 사도 요한 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강도 있게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어떠한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얼핏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살펴보면 절대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은 원어로 '포타포스(potapos)'입니다. 이 말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할 때 잘 쓰입니다. 마태복음 8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풍랑 이는 호수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바람과 바다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들은 '어떠한'이라는 말을 써서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어떠한' 사랑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떠한 사랑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사'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놓아서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사'라는 표현보다 '샤워하다(shower)'라는 표현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 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또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폭우같이 넘치게 부어 주셨는가!"라며 흥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살아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헨리 나우웬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심리학자요, 신학자입니다. 오랫동안 노틀담 대학과 예일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으며, 매년 무게 있는 책을 한 권씩 써 낼 정도로 부지런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1996년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10년을 캐나다에 있는 "데이 브레이크"라고 하는 정신 지체 장애인 수용 기관에서 봉사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끝까지 맡아서 돌보던 장애아는 아담이라는 스물 다섯 살 먹은 청년이었습니다. 아담은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있는 중증 장애인으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옷도 혼자 힘으로 입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심한 장애를 안고 있던 터라 자기를 돌봐 주는 사람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자기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는지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우웬 박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를 닦아주고,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빗겨 주고, 옷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는 제 맘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만도 두 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아담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수고하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다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해요. 별로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죄 때문입니다.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여러분 법원에서 판사가 호출을 해도 가슴이 덜렁덜렁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독생자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셨고(행 2:17), 선물까지 주셨습니다(행 17:25 ; 고전 12:4-11). 하나님께서는 사망에서 건지시고, 자녀의 권세를 주시며,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에 오시는 배영만 코미디언을 알 것입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한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에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군대 시절 배영만은 최전방에서 북한군과 마주보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대한뉴스'에서 그가 근무 서고 있는 모습을 촬영하고 갔는데 그 다음날 헌병이 와 뜬금없이 전출됐다고 알려왔다는 것입니다. 전출사유가 무엇이냐면, 못 먹고 굶주림에 찌든 얼굴이라 적의 선전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카메라에 찍혀진 그의 '빈티'(?)나 보이는 얼굴이 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후방 신병교육대로 전출돼서 군대 생활을 편하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28년 동안 무당으로 살았어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들어오시는 가정을 포기한 분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거의 말술을 매일 마시다 시피하며 자녀들 11명을 키웠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두고 '여기도 집구석이라고 찾아왔니? 너희들 중 몇 명은 죽고 오지'라는 저주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무슨 미래가 있었겠습니까? 우연찮게 못생긴 얼굴 때문에 코미디언이 되었지만, 그는 연예인 생활 중에 노름에 빠졌고 노름 때문에 진 빚을 갚지 못하자 이 이자 빚 때문에 건달들에게 시달리다 수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던 그였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셨고, 그를 절망의 환경에서 꺼집어 내어 그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그를 새롭게 다듬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여느 때면 낙심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겠지만,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세워진 한 인생이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신학을 하고 믿음으로 사는 전도사로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바뀌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방황'이라는 단어입니다. 방황, 참 힘들어 보입니다. 우리 한 번씩 '방황'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방황이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방황은 눈에 안 보여요. 남자고 여자고 마음속에 이루어지니까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번뿐인 인생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 방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 방황하는 분계십니까? 내가 일하긴 하는데 손을 대긴 대는데 내가 이 정도로 할 사람인가? 하면서 하는 일에 대해서 방황 중에 계신 분계십니까? 그 분은 자신에게 맡겨 준 일 조차도 끝내지 못 한 채 인생을 마칠 사람입니다. 또 10년, 20년을 한 지붕 밑에서 부부가 함께 살면서도 아직도 내가 누구하고 살지가 결정 안된 분이 계십니까? 그 방황 빨리 끝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이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이 뭐 그렇게 큰 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결정이 앞으로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성경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분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동성 교회와 부족한 사람은 여러분과 함께 영생을 소유하고 우리의 남은 삶을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먼저 믿은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함께 일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생각하고 살면 이 땅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땅을 생각하고 땅에 주목하고 산다면 우리의 가정도, 직장도, 재물도, 젊음도, 건강도 결국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잃어버린 생명을 건지는 삶보다 더 아름다운 생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동참하신 여러분 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