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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루 다니며 고치셨으니! (행 10: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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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정말!”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방황하고만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말 저녁때쯤 발안 시내를 나갔다가는 여기가 도대체 한국이 맞는 건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복잡한 세상 그리고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미쳤어 정말!” 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들이 내게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고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는 그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건전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습들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하는 말 “미쳤어 정말!”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해석했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정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렇게 주님께 열심을 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과 나눔에 우리 온 힘을 다 쏟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산다면 얼마나 오래 살겠습니까? 이 짧은 세상, 즐거운 비명으로 내지르는 “미쳤어 정말!” 이란 소리를 내 스스로도 그리고 남으로부터도 들을 수 있다면 아니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칭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 세상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믿는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고넬료의 집에 드디어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는 유대인으로서는 이방인과 사귀지도 않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지만 그런데도 자기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오게 된 이유를 변명처럼 늘어놓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감격한 고넬료 역시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기가 베드로를 청했던 이유를 설명을 합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아무 말 하지 말고 저 사람들을 따라 가거라” 하시면서 보내시니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까지 오기는 했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여전히 찜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말을 듣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만 말씀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고넬료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을 어찌 하나님이 사랑하시겠는가?” 하고 탄식도 하고 혼자 괴로워할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건 스스로의 자격지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개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어찌 사랑하실 수가 있겠어?” 하고 비아냥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그 누구도 외모로 차별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또 다른 고정관념 내지는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어떤 자격지심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편견까지도 다 깨뜨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모나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예쁘다 밉다, 좋다 나쁘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상대방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받아 주십니다.”
그런데 과연 베드로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던가요? 아니었지 않습니까? 이방인에게는 그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환상 가운데 자기를 부르도록 하시고 또 자기를 보내셨던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고 나서 보니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만 받아 주시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머릿속에 언뜻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서 했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 맞다, 그들이 말하기를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요 유대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어느 나라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거로구나”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들도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의로운 일입니까?
계속해서 베드로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이 모든 백성의 주님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것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우리 서로가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요 바로 그럴 때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졌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다투고 시비하게 됐습니까?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잘한 것은 칭찬해 주고 잘못한 것은 감싸주는 사랑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자를 보고서도 도우려고 하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자를 내 일처럼 돌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오셔서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로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하고 감싸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따뜻한 사랑을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가 되어주시고 또한 우리 서로가 하나가 되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님의 평화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는 서로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화목의 길로 나아가기 보다는 그저 나만 잘났지 다른 사람은 외면하고 모욕하고 비아냥대고 비판하고 으르렁대며 서로 상처를 주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베드로와 고넬료가 하나 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 서로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 안에서 서로의 사정을 살펴서 서도 돕고 서로 베풀고 서로 감싸안아주며 서로 나누며 섬기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하시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인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래 성령과 능력으로 충만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두루 다니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두루 다니신 것이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장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누구를 만나 실컷 수다나 떨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 선한 일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에서 고넬료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0장 1절에 보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주었고, 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주어 돕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는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즐겨 만나주시고 찾아간 사람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굶주린 자를 먹여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손가락질 받고 외면당하는 자들을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돌팔매에 맞아 죽을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귀한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 즉 감사하며 축복기도를 하셨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으며 다락방 만찬 자리에서 기도하셨고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용서와 화해의 기도를 그리고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이루셨다고 했으니 우리 역시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할 것이요 기도하는 가운데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나아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섬기며 나누며 격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에이 귀신이 어디 있어?” 그럽니다. 여러분 기억할 것은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귀신이 미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여기 미쳤다고 하니까 뭐 옷도 지저분하게 입고 머리도 다 헝클어지고 입에 침이나 질질 흘리며 눈이 시뻘개져서 돌아다니는 그런 사람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에 목을 매고 있습니까? 뭐에 목숨을 걸고 있느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서로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다 악한 마귀 사탄이 뒤에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조종하여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볼 때에 분한 마음이 들게 만듭니다. 그냥 둘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섭섭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사랑 안에서는 그것도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으로 다가갈 때에는 섭섭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내가 줄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이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게 받아주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면 그만큼 상대방도 힘들 수 있음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상대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상대방으로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상대방이 짜증스럽게 한다고 나도 같이 짜증을 내 버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이걸 확 뒤집어 엎어버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으로 어떻게 회복하려고 하십니까? 그 다음에 어떤 대책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갈라서면 다 해결이 됩니까? 아니잖아요. 더 고통스럽잖아요. 왜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화목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분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해서 정말 죽이고 싶도록 분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그래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틈이 벌어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사랑으로 하나 되라고 하시기 전에 그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를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먼저 그 마음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그 상처받은 마음에 가득 채워주십니다.
“너만 그런 게 아냐! 나도 그랬어. 나도 그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잖니. 그렇지만 내가 다시 살아났잖아. 너도 마찬가지야. 힘들었던 만큼 오히려 더 큰 은혜가 너와 함께 할 거야!”  믿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도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못할게 없습니다. 안 될게 없습니다. 못 한다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능력을 깨달은 바울 사도가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내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빌 4:8~9).” 하신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평화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이방 사람에게까지 부어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다면 우리가 어찌 오늘 다시 주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연약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 힘, 내 의지만 가지고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을 저와 여러분이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용서할 수 있고 그 사랑의 힘을 의지해서 주님과 함께 우리 모두가 먹고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힘 내 능력으로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악한 마귀가 사랑은 먼저 받는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다고 악한 자는 속삭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심지 않고서는 거둘 수가 없습니다. 먼저 내가 사랑으로 심지 않고서는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럼 무얼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무어 사랑할 만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랑받을만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건가요?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죄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를 친구라 불러 주시고 주님의 말씀 그대로 친구된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셨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께서는 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받는 자가 아닌 주는 자로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방언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일에 우리가 다 증인이 아닙니까? 우리 가운데 거의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이 힘이 있고 우리의 찬양이 은혜가 넘치는 것이요 그 은혜 가운데 서로 사랑을 나누며 서로를 섬기고 격려하며 살고 있기에 우리가 천국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넘치는 믿음, 사랑으로 바라보는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이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고백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나가기 위한 사랑의 사도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는 곳에 더 이상 자격지심과 고정관념도 편견도 다 사라지고 오직 한 몸이요 한 지체로서 함께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 되게 하는 영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하나 되듯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게 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 주님이 두루 다니시며 우리 모두를 이미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아파하고 속상해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더 이상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를 치료하여 주시고 우리로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찬양하며 더욱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할 것이요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처럼 두루 다니며 서로를 섬기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처럼 두루 다니며 서로 나누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처럼 두루 다니며 서로 격려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처럼 귀신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서로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자를 고쳐줄 수 있는 우리 모두요 주님의 사랑에 미쳐서 살아감으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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