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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하리라 (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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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심금을 울린“뿌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고자 투쟁하는 처절한 삶을 그린 내용입니다. 드디어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때 한 흑인이, 첫 노예로 끌려왔던 그들의 조상을 생각하고 춤을 추며 “쿤타킨테 할아버지 자유가 왔습니다! 쿤타킨테 할아버지 자유가 왔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

자유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생명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치, 행복은“얼마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찾고자 봉건 군주들을 상대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제치하에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 모진 고난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그 후 독재에 대해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비롯한 국민적인 항거에 의해 유린된 자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국가나 어느 종족이든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이 자유에 대해 네 가지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입니다. 자신의 감정적 요구대로 하는 자유입니다. 본능적, 동물적 차원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방종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둘째, 제한하는 자유입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부부라는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도리를 지키는 윤리적 자유입니다. 한계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속박일 뿐입니다.

셋째,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는 스스로 버리는 자유입니다. 사랑, 정의 등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므로 얻어지는 고차원적 자유입니다. 희생을 통해 얻는 신념적 자유인 것입니다.

넷째, 소망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신앙 안에서 누리는 미래지향적 자유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기에 오늘의 허무, 절망,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최후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는 최고 수준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자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삶은 자유를 향한 여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방종의 자유’를 떠나‘제한의 자유’그러고‘선택의 자유’를 지나‘영원을 소망하는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자유로의 여정 가운데 여러분은 지금 지금 어디쯤 머물러 계십니까? 영원한 소망의 자유에 이르는 길은 머나먼 여정입니다.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는 힘든 여정입니다.

프랑스 작가인 루소는 말하기를,“인간은 사회 속에서 무수한 쇠사슬에 얽혀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쇠사슬에 대해 말하기를“10대는 케이크에 매이고, 20대는 연인에게 매이고, 30대는 쾌락에 매이고, 40대는 야망에 매이고, 50대는 탐욕에 매이고, 60대는 절망에 매인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분은 루소의 말을 인용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을 말하기를“10대는 입시 공부에 매이고, 20대는 인터넷에, 30대는 직장에, 40대는 명퇴에, 50대는 아내에게, 60대는 소외감에 매인다.”라고도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방면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신적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세계 즉 영적인 세계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어떤 과학적인 첨단 장비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볼 수 없는 것이 영적 세계입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유가 곧 영적 자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자유가 있어야 비로소 육신의 참 자유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과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자유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이“진리”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4:6의 말씀에“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주는 자유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란 어떠한 자유일까요?

一.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얻는 자유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을 때에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한복음 8:33)하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한복음 8:34) 하셨습니다. 사람의 종은 아닐지라도 모두가 죄의 종의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나는 참으로 착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애를 쓰는데 내가 왜 죄인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라마다 죄의 기준이 다릅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유롭게 술을 마십니다. 술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음주를 금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술을 마시면 죄가 되어 처벌을 받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유롭게 개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나 개고기 식용을 철저하게 금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한 나라에 사는 교포가 우리나라의 풍습대로 개고기를 먹는다면 추방을 당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시는 별도의 죄의 기준이 있습니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법에 있어서 비록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생각만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죄악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에 비춰볼 때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에는 누구도 예외일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비춰진 인간의 모습에 대해 말씀하시기를“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으로 죄가 있는 곳에는 평안도 기쁨도 만족도 없습니다. 죄는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 불안과 공포와 혼란이 있듯 죄가 있는 곳이 이와 같습니다.

철학자 부르너는“정의와 자유”라는 책에서 자유에 대하여 말하기를“인간이 원하는 모든 자유의 성취는 체제가 바뀐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구속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진정한 자유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참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집안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화분을 넘어뜨려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그 화분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화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알게 되는 날에는 크게 야단을 맞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그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지켜보았습니다. 그 가정부는 이 아이에게, 나를 도와 청소를 같이하면 아버지께 이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아이는 가정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매일 매일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 가정의 귀한 아들이 가정부의 일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아버지의 화분을 깨드린 죄가 있고, 그 죄를 가정부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생각하기를“언젠가는 아버지께서 알게 되실 터인데 그때 야단을 맞는 것이나 지금 야단을 맞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언제까지 내가 가정부의 종처럼 살아갈 것인가? 차라리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서 야단을 맞는 것이 더 났겠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예상 밖으로 야단을 치지 않으시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자기의 잘못을 정직하게 말하는 아들을 칭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어린아이는 화분을 깨뜨린 잘못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지만 잘못을 범했을 때 아들의 자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아뢰며 용서를 구했을 때 아들의 자유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사죄함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범한 불신앙의 죄, 우상숭배의 죄, 그 밖의 수많은 양심의 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들이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를 내어 원수 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기쁨도, 만족도, 평화도 다 빼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죄를 없게 하시고 용서해 주시고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앞에 뉘우쳐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36절에 말씀하시기를“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하신 것입니다.

二. 현재의 삶에서 얻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누구에게나 염려와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편안히 쉴만한 곳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에 얽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에 얽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로움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다 무엇엔가 얽매여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은 우리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참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 여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이 없는 남편은 탈선하여 다른 여자와 살고 있고, 그녀는 파출부로 힘겹게 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시골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가 병들어 자리에 누워 계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저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며칠 후 그 여자 집사님이 다시 찾아와서 말하기를“기도할수록 성령님은 시어머니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양심이 괴로운 것보다 고생이 되더라도 가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시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집사님을 떠나보내면서 목사님은 독백하기를“아, 바보 같은 여자여! 하지만 당신은 진정한 자유자요, 승리자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미움과 배신,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여인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개혁자 루터는 말하기를“그리스도인은 가장 위대한 자유인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가장 충성된 노예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3:17에“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헬렌 켈러(1880-1966)라는 사람을 잘 아시지요. 위인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삼중고(三重苦) 성녀의 헬런켈러는 생후 19개월 때 열병을 앓은 후 시각장애인에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7세 때부터 가정교사 설리반에게 교육을 받고 1900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세계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자로서 1904년 우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가 쓴“삼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애처로운 글이 있습니다.“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준 설리반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놀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우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헬렌켈러는 말하기를“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배운 것 중에 최대의 소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무엇인가의 노예로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4:8~9에“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리라(고)”고 했습니다. 

三. 미래에 얻게 될 자유가 있습니다.

미래에 얻게 될 자유는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다가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곳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아 누리게 됩니다.

오리 새끼와 병아리를 호숫가에 갖다 놓으면 병아리는 물에 관심이 없는데 오리새끼는 물을 보자마자 호수에 들어가 헤엄을 치며 즐깁니다. 그 까닭은 오리는 헤엄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병아라는 헤엄치는 본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영생의 본능이 있습니다. 전도서 3:11에“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피조물 즉 식물이나 동물이 갖고 있지 않은 영혼이 있고, 영생을 사모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있고 내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1. 천국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1) 천국에는 밤이 없습니다.

밤은 흑암과 좌악의 장소입니다. 밤은 위험하고 공포의 대상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는 미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LA나 뉴욕에서는 밤은 위험해서 밖에 나가 걸어 다니지 못한다고 합니다. 천국에는 이런 밤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2:5에“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회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화로운 빛이 천국의 구석구석을 비추므로 해나 달이나 전기불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요한계시록 22:5)하셨습니다.

2) 천국에는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여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마는 아직도 질병의 고통은 여전합니다. 힘겹게 난치병의 치료약을 개발하고 나면 또 다른 난치병이 인류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질병의 고통이 없습니다.

3) 천국에는 슬픔과 죽음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슬픔과 죽음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죽음과 슬픔이 없습니다. 병원도 없고 공동묘지도 없습니다.“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1-4)고 하셨습니다.

4)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염려와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입학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염려와 불안과 근심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우리의 본향, 천국에 가야만 비로소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5) 천국은 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킨 후 계속하여 인간을 미혹하므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유혹과 죄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순간순간 죄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사탄 마귀가 없는 곳이므로 죄의 유혹이 없습니다.

6) 천국은 바다가 없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1:1)고 했습니다. 바다가 없다는 것은 폭풍이 없다는 것이고, 고달픔이 없고, 이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7) 천국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다 변합니다. 자연도 변합니다. 만년설이 녹아내리면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해마다 조금씩 침식해 들어가면서 변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나라와 정권도 변합니다. 바벨론도, 로마 제국도 멸망했습니다. 인심도 변합니다. 오늘의 사랑이 내일은 미움으로 변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합니까? 그러나 천국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곳입니다.

2. 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 천국에는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이 세상에는 악함과 해함과 위험이 있으나 천국은 아름다운 도성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65:25에 기록하시기를“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하셨습니다.

2) 천국에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합니다.

천국에는 기쁨과 행복만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항상 들려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온갖 과일이 날마다 열립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움에 관하여 밝히시기를“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고 하셨습니다.

3) 천국에는 아름다운 집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집을 두 채를 마련해야 합니다. 한 채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가 머무는 집이요, 또 하나는 하늘나라의 집입니다. 하늘나라 집은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지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집을 다 지은 후 그 집으로 이사를 가듯 하늘나라의 집도 이 세상에서 지은 후 그곳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19-20)하셨습니다.

천국을 이루고 있는 집의 재료에 대해 성경에 기록하시기를“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 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요한계시록 21:11-21)고 하셨습니다.

4) 천국에는 성삼위 하나님과 천사들과 앞서간 성도들이 있습니다.

천국에는 순금으로 된 거리가 있고, 열두 진주 문과, 찬란한 면류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꿈속에서 예수님을 한번만 보아도 평생 잊지 않고 기뻐하는데, 심지어 꿈에 목사를 한번 보여도 어쩔 줄 모르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물며 천국에서는 영원히 날 구원하신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는 이상한 종이 한 사람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 종이 하는 일은 아침마다 소반에 물 한 컵과 사람의 해골을 담아 왕 앞에 와서 “폐하! 폐하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 컵의 물은 그의 건강을 위한 것이었고, 해골은 그의 정신을 지키는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천국을 위한 준비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죄악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으면 누구나 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전등은 수없이 많지만 태양은 오직 하나이듯, 참 자유를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과거의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괴로운 이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으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지옥의 멸망에서 건져 하늘나라의 영원한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이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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