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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감사 (고후 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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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감사와 축복은 동시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실제입니다. 그 중에도 감사는 은혜 받은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며 또한 축복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Εὺχαριστια)라는 말의 뜻은 값없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여기에 반응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감사의 생활을 고취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근대 감사절(The Thanksgiving Days)은 미국의 조상이 된 청교도(puritans)에게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17세기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대서양 연안의 플리머드에 정착하고 천신만고 끝에 농사를 지어 첫 곡식을 거두어 하나님께 감격적인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는 것으로 땀 흘려 얻은 수고의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성격적 원리와 함께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방법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감사의 원리

감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 보답하는 행위입니다. 시편 116:12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7절에는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말로다 할 수 없이 크고 많으나 우선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1) 구약의 감사

구약의 성도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대표적인 은혜로 기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지킬 율법을 선포하실 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하였습니다(출 20:2). 이 일을 근거로 하여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같은 절기를 명령하였습니다(출 23:14-17). 신명기 16:16-17에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2) 신약의 감사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은혜를 가장 큰 감사로 여깁니다. 에베소서 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3) 현대인의 감사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이 감사의 절기를 지킬 때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열매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출애굽기 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메리카 청교도들이 감사의 절기를 지킬 때도 그들이 정성들여 가꾼 농사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나라 초기의 성도들도 가을에 거둔 오곡백과들과 풍성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세웠습니다. 이는 농경시대 문화의 단면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첨단 문화와 환경의 변화는 농경시대의 그 방법을 답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15절에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바울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은혜」라는 말과 「감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요 이를 고백하는 자입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속에 사는 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은택을 다 누리면서도 이를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깨닫고 이를 감사하는 자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사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천국의 기업을 보장받은 사실은 말로다 할 수 없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감사의 방법

시편 116:12-14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행동에 앞서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격이어야 합니다. 이 감격은 마침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찬송하게 됩니다. 또한 입으로 고백하는 바를 실천하며 행동에 옮겨 헌신하는 것입니다.

1) 구약의 제사

대체로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행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최초의 사람 가인과 아벨 형제는 각각 자기들의 생업에서 얻은 열매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창세기 4:2-4에 보면 아벨은 양치는 자요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사하였다고 했습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각종 제사에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으로 제물을 삼았거나 정교한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종류의 제물이든지 그것은 제사 드리는 사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2) 신약의 예배

구약의 교회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 교회인 반면, 신약의 교회는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구성됩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언약중심의 선민사상에 근거하는 예배를 드렸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은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20에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을 자기의 것이라 하지 않고 주님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을 포함하여 그 인생의 목적이 오직 주님만을 위하는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적인 삶을 뜻합니다.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3) 성도의 헌신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여기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말씀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는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게 있는 것으로 이웃을 섬기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착한 일이 됩니다.

3. 감사의 결과

만복의 근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 모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28:3-6에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께 부요한 자입니다.

누가복음 12:16에는 곡간에 곡식을 가득히 쌓아 놓고도 그날 밤 자기 영혼이 떠날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21).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 화려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지만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헐벗고 가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계 3:17-18).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경우 세상 적으로 환난과 궁핍을 당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계 3:9).
본문 말씀 10-11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풍성하게 돌려받습니다.

잠언 3:9-10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감사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연보를 하거나 사람들에게 구제하며 물질로 봉사하는 것은 축복의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6절에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26:5에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축복의 열매를 바라보며 감사의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뿌린 자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의 열매는 부모가 뿌리고 자식이 거두기도 합니다. 육신의 것으로 심어서 신령한 것으로 거두게 되며 세상에서 심고 하늘나라에서 거둘 수 있는 영생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 칼럼 - 싸우면서 정든다고 하더니

  지금은 넓은 집에 아내와 둘이 살고 있지만 작년 이맘 때는 여섯 식구가 북적거리며 지냈다.
막내 사위가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며 일 년 반 가까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복잡하고 귀찮기도 하여 어서 가버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딸 내외와 사내아이 둘이 딸려 있어서 식구도 우리보다 배나 되었지만 여섯 살과 네 살 되는 두형제가 집안을 운동장처럼 놀이터로 만드는가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만만한 친구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낮에 어린이집에서 조금씩 잠을 재운 탓인지 저녁 늦게 잠자리에 들거나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설치고 다녔다.

그중에도 큰놈은 내가 새벽기도 갔다 오면 어김없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켜놓고 제가 좋아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다. 나는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나서 아침 종합뉴스를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손자 녀석이 TV를 독점하고는 양보할 줄을 모른다. 저희 방에 있는 TV는 위성채널이 없기 때문에 저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안 나온다며 꼭 거실에 나와서 나의 TV 시청을 방해하곤 하는 것이다. 매번 내가 많은 양보를 하지만 더러는 저가 시큰둥해 하며 물러날 때도 있었다.

금년 3월초 딸네 식구가 모두 오사카로 이사를 간 다음 그곳의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느라 어지간히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니 우선은 어린것들의 마음고생이 더욱 컸을 줄 안다. 이따금 전화를 하면 큰놈이 받아가지고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하고 인사를 하는데 여기 있을 때 보다는 훨씬 친절하고 공손해 진 것처럼 느껴진다. 저의 어미 말에 이 녀석이 이따금씩 “엄마, 우리가 후암동에 살 때 참 좋았지. 그때는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보았는데” 그리고는 “후암동서 텔레비전 서로 보려고 할아버지와 많이 싸웠다! 내가 할아버지를 골탕 먹였지”하고 무용담을 늘어놓듯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그곳으로 이사 간지 벌써 8개월이나 되었다. 여기 있을 때는 교회에서나 어린이집에서 쌍둥이처럼 두형제가 기죽지 않고 밝게 자랐는데 그곳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원래 일본 아이들에게 이지매 근성이 있어서 저보다 약하게 보이는 아이를 왕따 시킨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아이들도 처음 유치원에 가서 그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말이 안통하고 생소한 문화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단체생활에 밀어 넣었으니 그리 할만도 했을 것이다. 작은아이는 오줌 마렵다는 말을 못해서 그냥 옷에다 오줌을 누게 되면 그래도 선생님이 친절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단다. 큰아이는 저보다 덩치큰놈이 매일같이 집적이며 괴롭혔는데 한 달 이상 시달리며 울고 다녔다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괴롭힘을 당하던 큰아이는 그 아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여 코피를 내어버렸단다. 여기 있을 때부터 태권도 사범인 아빠에게서 기본동작을 훈련받았기에 그 실력이 발휘된 것이다. 하지만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엄마가 가서 사과를 하고 선생님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도 하고 왔단다.

한편 진이는 그 일로 인해서 저희 반을 완전히 평정하게 되었고 그날 이후 서로 진이와 친해지고 싶어서 앞을 다툰다는 것이다. 지금은 일본말도 제법하고 친구들과 거부감 없이 잘 지내는가하면 얼마 전 유치원 운동회 때는 달리기와 개인경기를 석권했다고 한다. 흔히 손자는 “오면 좋고 가면 더 좋고”라지만 그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자주 눈앞에 아른거린다. 엄마와 둘러앉아 아침저녁 기도회와 가정예배 드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면 대견스럽게 여겨진다. 우리 집에 있을 때 같으면 내가 하자고 해도 “할아버지쯤이야!”하고 뺑소니 쳤을 것이 분명했던 녀석들인데…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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