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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을과 함께 생각해 본다 (전 1:2-4,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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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첫 주를 맞는다. 가을이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고 하여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하늘이 점점 멀어진 것 같고, 그리고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호수에 빠질 것만 같은 스릴 있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면서 가을 뜰 악에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있는 길을 걸으며 삭막한 가을 산책을 해 본다. 그러면 가을은 사색의 계절임을 깨닫게 된다. 가을은 나에게 쓸쓸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참담했던 여름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기 때문에 상념(想念)에 젖기도 한다. 사람이란 누구나 한번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지는 않지만 죽음이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명제임에는 틀림이 없음을 느끼게 한다.

  잔디밭에 누워 인생을 물어 본다. 하늘을 쳐다본다. 결국 산다는 것이 이런 저런 일에 몰두 하다보면 내 인생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마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가을과 함께 생각해 본다'. 사람의 생명이 유한하다고 하는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의 유한한 시간 속에서 이루어 놓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70세를 지내보고 돌아볼수록 슬프고 괴롭기만 하는 마음도 생겨난다. 이 슬픔과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생의 무의미한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꾸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듯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간이 아닌가?

  자신의 수명을 짧게 산 사람이나 길게 산 사람이나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때는 누구나 허무감을 느끼게 마련임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로 비유되기도 하고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로 비유되기도 하고, 주어진 괘도를 달리는 열차에 비유되기도 하는가 보다. 그 무엇으로 비유되든 간에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은 떠나야 할 존재,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 지으면서 또한 한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인생을 하늘 높게 뜬 구름 같기도 하고 풀잎에 서린 이슬 같기도 하고 심지어는 물위에 떠다니는 거품 같기도 한다고들 비유하는 가 보다. 인간이 이처럼 허무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잡다한 삶의 갈등, 투쟁, 모순, 비리, 무질서 속에 아웅 대며 살았던 지난날을 아쉬운 마음으로 되돌아보기도 한다.

  가을과 함께 선인들의 말씀을 읽어보는 독서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난날 남기신 그들의 삶을 오늘에 되돌려 보며 그들이 남기신 고전(古典)을 보는 것이다. 옛날 소년시절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아 지금 노후에 다시 가을과 함께 고전(古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흔히 소설 작가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인생을 구도자의 자세로 살았고 인생을 탐구한 기독교의 신앙인이요 종교가요 인생 탐구의 대가로서 그의 인생론은 귀중한 고전이 된다. 그의 작품 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아' '부활'등 그 외 다수 불후의 명작이 있다. 그는 그 명작들에서 그의 인생론을 담고 있다. 그는 인생론에서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으나 현실은 계속되는 다툼, 게걸스러움과 권태, 병고와 노쇠, 그리고 결국은 죽음에 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귀중한 것, 붕괴해서는 안 될 것이 붕괴되고 있음도 지적하며 유한된 존재를 알게 한다. 아무 의지할 것도 없는 무의미한 인생이라고 느끼게 되었을 때는 이미 빠져 나올 수 없는 불합리 상태에 놓여 있게 마련인데 이 점이 바로 '인생 생활의 근본적인 모순이다' 는 것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음에 '인생이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참된 생활은 '동물적 인간 존재의 욕구'즉 과학과 예술과 종교 등 정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개인적인 생활에 대한 이성적 의식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동물적 자아의 행복이 부정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한 동물적 자아의 부정은 이성적 의식이 눈뜨게 될 때 시작되는 것이다. 이성적 의식이란 무엇인가? 톨스토이는 요한복음에서 그 시작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는 성서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음 을 믿는 것이다. 인생에게 모순은 왜 생기는가? 원래 모순은 인생 그 자체 속에나 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와 타인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 그 자체는 밑바닥에 자리한 그 관계를 무시하고 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 도착(倒錯) 속에 있는 것임을 지적한다.

  착오는 분명히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나야 한다'(요37:)는 말씀을 알게 한다. 이 말은 어느 사람이든지 태어나라고 명하지 않아도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생명을 지니기 위해서 사람은 그 존재 속에 이성적 의식에 의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리를 확실하게 증거 한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삶의 보람과 삶의 의의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사랑 안에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가? 많은 사람에게 자유롭게 해방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의 활동이 가능해진 사람에게 생활의 행복이란 마치 식물의 행복이 빛 속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추구이며 바라고 구하는 대상을 알게 한다. 또한 죽음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불행이 인간의 눈에 비쳐지는 이유에 대하여는 그 육체적이며 동물적인 생존의 법칙을 생명의 법칙과 바꿔치기 할 때 그렇게 비쳐진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성서의 말씀을 따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는 그리스도를 안내한다. 그리하여 그는 성서의 말씀에 따라 만고의 진리를 세상에 펼치었음을 알게 한다. 그는 1879년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착오의 소재와 참된 생활의 기초를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나의 참회'를 집필하고 1887년에 '인간 생활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한 '인생론'이 나오게 되었다. 오늘을 사는 이들이 이러한 고전에 관심을 갖고 독서의 기회를 가지면 한다. 영국의 유명한 문명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독서에 관하여 '인생은 짧다. 고요한 시간은 지극히 드물다. 우리는 이 고요한 시간을 잡서로 낭비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도 적다. 오늘의 문화는 중개문화(Mediated Culture)로 역사상 최초로 모든 현대 국가들이 더 많은 정보와 아이디어를 가정이나 사회 교회 그리고 학교에서보다는 대중 매체로부터 얻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삶의 의미와 본질을 바꾸어 놓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은 매일같이 매스미디어릍 통하여 신문, 영화, 음악, 스포츠, 문화의 콘텐츠에 시간을 다 빼앗긴다. 하루의 일거리에서 사람을 만나고 대인 관계와 기계적인 삶의 일에 시달리고 나면 독서의 의욕이고 뭐고 다 없어지고 만다. 옛날 사람들은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고 했다. 이 말은 책을 통하여 독서 그 자체보다 삶의 가치기준과 사고방식을 찾아 삶의 철학(哲學)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인생을 논 할 줄 알았다. 현대는 책이 너무 많다. 또한 책을 쓰는 정신과 태도가 너무 안일하다. 옛 사람들은 함부로 책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 쓰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쓴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씀들이었다. 그리하여 니체는 말하였다. '나는 모든 책 중에서 저자가 자기의 피로 쓴 책만을 사랑 한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고전을 쓴 많은 고인(古人)들은 인생(人生)을 조각(彫刻)하는 마음으로 썼다. 그러므로 한자 한자에 힘이 깃들었고 한구 한구에 생명이 스며있다. 엄숙한 심정, 경건한 태도로 책을 썼다. 마음을 새기고 뼈를 깎아서 글을 썼다. 그리하여 일자천금(一者千金)이라 했던 가 한다.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쓰고 아무렇게나 읽어서야 무슨 깊은 독서에 무슨 깊은 인생의 의의가 있을 수 있으랴. 명예나 돈이나 허영이나 심심풀이로 쓰는 책에서 무슨 생명의 말씀이 나올 수 있으며 또 그런 책을 읽어서 무슨 생명에 빛과 힘이 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고전은 그런 서적이 아니다. 고전은 인류의 영원한 사상적 유산이다. 고전이란 원래 옛 서적 고대의 경전을 의미한다. 공자가 말한바 온고지신(溫故知新)은 고전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 고전은 옛 것이 아니고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진리에는 연령이 없다. 고전은 연령을 초월한다. 낡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것이요 의미요 가치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고전을 갖고 있다. 각 분야별로 고전이 있다. 고전중의 고전이라고 부른다면 뜻있는 학자들은 대개 '성서'와 '논어'를 든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이 탐구한 최선의 지혜요 인류의 양심이 도달한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이며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타당 하는 인생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모든 관계를 어떻게 맺고 남과 대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거기서 찾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한번만 읽을 책이 아니고 두고두고 보는 책이다. 그러기에 고전은 20대에 읽어서 다르고 40대에 읽어서 다르고 60대에 읽어서 다른 것이다. 인생에 대한 우리의 사색과 체험이 풍부해 짐에 따라서 전에는 무심히 생각했던 구절이 새로운 빛과 깊은 의미를 가지고 깨닫게 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성서와 논어는 예수와 공자가 직접 쓴 책이 아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인격과 언행과 생활과 사상을 정성껏 기록한 책이다. 그들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다. 정말 위대한 인간은 글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역사를 만든다.

  예수는 예언적인 신앙인이요 내세적인 신앙에 정열의 초점을 맞추고 초 합리주의자임을 알게 하는 반면 공자는 위대한 상식 인이요 현세적인 정치와 도덕의 사상에 역점을 둔 점을 감안한다.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본다면 공자는 땅을 바라다본다. 예수는 사랑과 의를 외쳤고 공자는 예(禮)와 인(仁)을 말했다. 톨스토이는 유한한 인류의 영원한 구원의 약속을 믿고 생활하며 그의 작품을 통해 하늘의 뜻을 드러낸다. '가을과 함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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