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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의 기름병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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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저자 이름도 생각나지 않은 철학사 한 권을 읽었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한 달 남짓 씨름 하듯 읽었더니 나름대로 나중에는 재미를 느끼며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통하여 배운 것은 꼭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평생 제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지혜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균형’입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하여 역사가 좌와 우 그리고 상과 하로 널뛰기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란 본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은 대개 좌로나 우로 치우쳐서 한 쪽만 보고 볼 뿐만 아니라 고집하곤 하였습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과 사상 그리고 신학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하며 자신만이 옳고 바르다는 확신하는 것은 역사를 통하여 일관되게 반복되는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역사와 사상은 대개 좌와 우로 움직이고 신학은 좌와 우 뿐만 아니라 상과 하로 움직였습니다. 상과 하는 초월주의와 내재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지만 땅보다 하늘에 관심이 많은 신학은 초월주의로 흐르고 하늘보다 땅에 관심이 많은 신학은 내재주의로 흘렀습니다.

초월주의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성령론에 강하고 내재주의 신학은 세상의 정의와 자유에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좌와 우, 상과 하가 조화를 이룬 것인데 우리 인간은 부족하여 그것을 통합하지 못하고 한 쪽에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치우치는 큰 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자기가 진리의 한 쪽만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만 옳고 자기와 다른 쪽의 사상과 신학은 틀렸다고 보는 것이 큰 문제인데 대부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타고난 사상이 있고 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타고 나면서부터 오른 손 잡이 인 것과 같습니다. 신학과 사상의 경향도 대개는 후천적이라기 보다는 선천적인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신학과 사상은 대학교 2학년 때 철학사를 읽으면서 배웠던 어설픈(?) ‘균형’ 때문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좀 애매한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정의와 자유 그리고 이 땅의 민주를 위하여 피 흘려 싸워 본적이 없으니 내재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졌다고도 할 수 없고, 아직 주여 삼창을 하지 못하고 방언도 못하고 있으니 초월주의적인 신앙을 가졌다고는 더더욱 하기 어렵습니다.
둘 다 다를 인정하고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저도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지난 5년 동안 제 설교를 분석해 보시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좀 불안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제 설교를 들으시는 교인들의 영적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봐 염려가 됩니다.

지난 주간 저는 미국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미국 텔레비전을 보면 목사님들의 설교와 사역에 대한 프로그램이 뜻 밖에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치유 사역에 대한 것들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miracle water라는 사역을 하고 계셨고, 어떤 목사님은 miracle handkerchief 라는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것 없이 그냥 안수 기도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그런 쪽에 은사도 없고, 은사가 없으니 자연 관심도 없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금 회의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번 미국 여행을 하면서 저는 그 프로그램을 깊이 생각하며 보았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와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들에 대하여 깊은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치유 다시 말해서 신유에 대해서 불신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능히 그와 같은 능력이 있으시다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집회를 통하여 난치병과 불치병에서 자유 함을 얻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귀한 일인가라는 것을 거의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목사님들이 한번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생활과 삶에 대하여 설교를 하지 않는가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습니다. 저들의 관심은 오직 치유 뿐인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높은 뜻 즉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이루는 삶에 대해서는 비교적인 관심이 많지만 저는 교인들의 건강함과 부유함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교인들이 그와 같은 복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둔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적으로도 어려움이 없는 넉넉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면서 혹시 건강하지 못하고, 혹시 부유하지 못해도 천국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그와 같은 능력이 있으시고 권세가 있으십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과 부족한 저의 설교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건강하지 못해도, 부유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사는 성숙한 삶을 통하여 늘 천국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과 부족한 저의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도 신유의 능력으로 치유함도 받으시고, 물질적으로도 형통한 삶을 사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과 육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정신과 혼과 육이 다 건강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이 형통하는 길이 있듯이 육도 형통하는 법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으로 엘리야가 아합에게 수 년 동안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합니다. 그 예언대로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시돈 땅 사르밧이라는 곳에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아에게 사르밧이라는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 한 과부를 만날 터인데 그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라고 명령하셨다고 일러 줍니다. 엘리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르밧에서 그 과부를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과부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과부에게는 엘리야를 공궤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루 한 웅큼과 기름 조금이 있어서 나뭇가지를 주워 자식들과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정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말을 그 과부에게 합니다. 떡을 만들어 자기에게 먼저 주고 남은 것으로 자식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같으면 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엘리야가 염치가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그 과부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할 때 엘리야가 한 매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13절의 ‘두려워하지 말고’라는 말씀입니다. 엘리야에게는 그 과부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면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이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믿고 따르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의 말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자식과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양식을 엘리야에게 먼저 주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가뭄이 끝날 때까지 가루 통의 가루와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읽게 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과거의 역사를 일러 주시기 위함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형통하는 길과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문에 사르밧 과부의 가루 통과 기름병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던 것과 같은 역사가 지금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저는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헌금 훈련을 참 잘 받았습니다. 아마 저 만큼 연보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을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려서 종이돈으로 용돈을 받은 기억도 별로 없고, 동전으로 연보 돈을 받은 적도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큰 돈은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고 작은 돈은 내가 쓰는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잘 믿어지시지 않겠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의 훈련 때문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외할머니가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주일 날 제가 연보 돈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칭찬 하셨습니다. 우리 형편에 연보 돈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칭찬 하시면서 동시에 연보 돈이 구겨진 것을 보시고 틀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리미로 다려 주셨습니다. 당시는 전기다리미를 쓸 때가 아니었습니다. 풍로에 숯불을 피워 다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연보 돈을 새 돈으로 하는 습관이 들게 되었습니다. 저의 헌금 원칙은 흠 없고 깨끗한 것을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아내가 월급을 가져왔습니다. 아내는 당시 학교 교사였습니다. 아내가 가져 온 월급은 당시 저희들 생활비의 세 배 가까이 되는 돈이었습니다. 당시 교사의 월급이 많았던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이 그만큼 가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생활이 네 배나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삼 년 짜리 적금을 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적금을 두개 들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는 우리를 위해였습니다. 하나님께 한번 뭉칫돈을 연보하고 싶어서 정말 삼 년 짜리 적금을 들었었습니다.

저는 이제껏 건축헌금을 할 기회가 참 많았습니다. 작심을 하고 제대로 헌금을 한 것이 지금까지 아마 네 번인 것 같습니다. 동안교회에서 세 번 째 건축헌금을 하였을 때 저는 참 신기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 헌금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통장에 저축된 돈은 없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9년 동안 적금을 들어 하나님께 드린 건축헌금 액수가 그대로 통장에 잔액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기름 병 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가 제가 설교 원고 작성하는 것을 보고 곁에서 저에게 충고하였습니다. 이제 건축헌금 이야기 그만 하라구요. 저도 많이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제가 사르밧 과부의 축복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는 제법 가난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부유합니다. 저는 저의 부유함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과 부족한 저의 설교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경제적으로도 최소한 저만큼의 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개인 뿐 아니라 목회를 하면서도 똑 같았습니다. 동안교회가 건축을 하기 위하여 모아 놓은 헌금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않고 일산동안 교회 개척을 위하여 내어 놓았을 때 하나님은 동안교회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본래 동안교회가 건축하려고 하였던 보다 곱절이나 큰 예배당을 건축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엘리야의 기름병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고 첫 추수감사헌금과 첫 성탄헌금 그리고 첫 부활절 헌금을 우리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보다 더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쓰려고 내어 놓았습니다. 물론 당시 우리 교회의 형편이 사르밧 땅의 기근과 같은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돈이 남아 돌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그와 같은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지난 연말 당회에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헌금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탈북자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자활시키기 위한 열매나눔재단과 나라와 교회 그리고 사회를 이끌어 갈만한 훌륭한 기독인재를 키우는 일을 위하여 우리 예배당을 건축하는 마음과 열심을 가지고 헌금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당에 관한 한 정말 가난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순서를 바꾸어 하나님이 우리 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일을 위하여 우리의 떡과 기름을 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엘리야의 기름병과 같은 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헌금에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엘리야의 기름병과 같은 축복이 임하시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넉넉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양식을 위하여 마른 나뭇가지를 줍는 사르밧 과부에게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떡을 만들라고 어찌 보면 잔인하고 비상식적인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도 아니시고 비상식적이신 분도 아니십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빨리 죽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가뭄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마지막 한 웅큼의 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으로도 먼저 하나님의 것을 뗀 사르밧 과부가 가뭄이 끝날 때까지 가루 통의 가루가 마르지 아니하고 기름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복을 받았던 것을 믿습니다. 저는 요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똑같은 복을 주실 것도 믿습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이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그리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증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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