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생명을 건지신 여호와 (삼하 4:1-12, 요일 3:13-16, 마 5:21-22)..

  • 잡초 잡초
  • 469
  • 0

첨부 1


1. 우리는 한동안 북한의 핵실험 파동으로 온통 몸살을 앓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북한 정권에 의하여 놀아나는 우리 모습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남조선이 말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행동에 있어서는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놀아나고 있다”고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퇴유곡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조 말 외세가 우리나라를 향하여 밀려들어 올 때 우리 정부가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력했던 당시 사정과 너무도 방불합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처럼 사랑을 따르자니 나라가 울고 나라를 따르자니 사랑이 울었다는, 그래서 사랑 “愛”자와 충성 “忠”자 사이에서 고민했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엉거주춤하는 사이에도 국제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벼랑에 몰린 북한 정권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려고 하는 것은 가장 악랄한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위 마키아벨리즘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결과가 어떨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인류의 멸망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가 이 무서운 핵의 위협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안보불감증도 역시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북한정권을 돕는, 죄악을 방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가 보유 하고 있는 핵폭탄을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 일렬로 늘어놓으면 거의 180m마다 하나씩 놓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를 몇 번이라도 파괴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는 “그 무엇보다 지구를 살리는 일이 시급하다”는 뜻으로 “Earth First”라는 단체도 생겼습니다. 이 단체의 사람들은 만일 어느 국가가 지구 환경을 파괴한다면 이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테러행위도 불사하겠다는 의연한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들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의 현실입니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사람의 생명을 능가할 수 있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지고(至高)의 가치를 가집니다. 또 예수께서 보혈을 흘려주셨기 때문에 귀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삼고 거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더욱 존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인간 존중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런 자세야말로 올바른 신앙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 다시 말하면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알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람을 주님께로, 교회로 인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큰 계명을 순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동기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교회 부흥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전도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부흥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동기일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동기는 오직 사랑이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남편의 영혼을 사랑하고, 아내의 영혼을 사랑하며, 부모와 자식, 형제와 이웃의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생명의 창조주요, 구속자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 마음에 맞게 되고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부흥하도록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2. 이제 사무엘서 본문을 상고해 보십시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고, 이스라엘이 패전하게 되었을 때, 그 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투쟁과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지게 됩니다. 사울 왕가에 섰던 아브넬이 국가의 통일을 논의하기 위하여 다윗과 회담하고 돌아가는 길에 다윗의 군 사령관 요압에 의하여 암살당했습니다. 요압은 전쟁 때 자기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의 군인들에 의하여 죽임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민족 대사를 논의하는 마당에 사적인 감정을 노출하므로 통일에 엄청난 장애 요인을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평화를 지향해야하는 마당에서 국가의 지도급 인사가 살인으로 보복을 했다는 것은 용납 받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태를 맞게 된 다윗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분노하고 애통해 했습니다. 하나는 민족의 통일 전선에 암초를 놓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난시에 생명을 가볍게 여겨 살인을 자행하므로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물꼬를 터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사건이 연이어 터졌습니다. 그것이 오늘 구약 삼하4: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다윗의 나라가 점점 안정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본 사울의 정부 군 지휘관 가운데 바아나와 레갑이라는 사람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있던 이스보셋을 그가 침상에서 낮잠 자고 있는 사이에 죽여서 그 목을 들고 밤새 달려 다윗에게로 와서 그 목을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자신들이 다윗의 원수를 해치웠으니 다윗이 매우 기뻐하고 포상해 줄 뿐만 아니라 새로 세우는 다윗의 왕국에서 중용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남의 생명을 해친 대가로 자신이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이런 세상은 한마디로 난세입니다. 정의가 살아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은 이미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군사정권을 용서해 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고 정권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정의사회구현”은 또 무엇입니까? 지금도 입만 열면 “나는 물가는 확실하게 잡았다”고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말하지만 아직도 그 도치된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가가 결코 인간의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살인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요3;15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물론 육체의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생명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인격, 명예도 역시 생명에 버금하리만큼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나는 형제의 생명을 소홀히 대한 일은 없습니까? 남의 명예를 해친 일은 없습니까? 겉으로는 그렇지 않아도 속으로 미워한 일은 없습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것들이 다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큰 과오중의 하나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통째로 삼킨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전혀 마음에 거리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나 우리는 정반대로 처신하면서도 “나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가인에 의하여 억울하게 살해당한 아벨이 땅에서 부르짖는 피의 호소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그 약한 자들의 호소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참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야할 줄 믿습니다.

3.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서 다윗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1) 9절에 “내 생명을 여러 환난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여호와시라는 말씀입니다.

a. 사실 이 말은 다윗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울이 끈질기게 다윗을 죽이려고 온통 국력을 총동원해서 찾아다녔습니다. 그래도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일국의 왕이 목동 출신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했다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도 어째서 사울은 다윗의 생명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를 향하여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내 손에서,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도 여러분, 이것은 결코 다윗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구원해 주시고 보장해 주시고 지켜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의 생명과 그 인격을 지극히 존중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생명 존중에 대하여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셔서 독생자를 주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나는 내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가족 중 믿지 않는 이들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내 이웃, 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생명을 그냥 방치하시겠습니까? 나는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내가 다른 이의 생명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목숨까지 버리시면서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대한 배은망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만일 우리가 무관심하게 그냥 둔 탓으로 한 영혼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하나님은 그 멸망하게 된 영혼에 대한 책임을 먼저 믿는 우리에게서 찾으시겠다고 했습니다.

새 성전에 계속 혼자서 나오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주신 것은 나 혼자 누리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너는 복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고....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혼자만 누리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십시오. 사람을 주님께 데려오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 구원받도록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2) 11절에 “하물며 의인을 그의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고 했습니다.

a. 평화를 이야기해야할 시기에 피 흘린 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가 평화롭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b. 바아나와 레갑은 국가적인 대사를 경영해야 하는 마당에 개인의 출세욕에 사로잡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남을 죽이고서라도 내가 잘되어야 하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요기도회 때 성령의 은사에서 상고했듯이 교회 안에서 우리는 혼자로서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로서는 주님 앞에 설 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고 합심 협력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새 생명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고 더욱 풍성하도록 복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