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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드릴 것 (눅 2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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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간계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잡으려고 한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대제사장 같은 유대인의 영적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특히 그들의 형식주의, 과시욕, 위선, 율법에 대해 지적으로 교만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지함, 그리고 사랑 없음을 질타하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었으며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 묻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대답하시자 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비난하며 예수님을 아예 죽여 없앨 충분한 공식적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하고는 그를 잡을 방도를 찾고 있던 차였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의 온 무리가 큰 소리로 외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기에 그에게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요구했더니 오히려 대답하기를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며 묵살하는가 하면(눅19:37-40), 성전에 들어가서는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며 말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다 그를 죽이려고 꾀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눅19:45-47).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백성이 두려워서 즉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본문 19절, 눅19:48). 게다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그들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가지 계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첩자들을 대신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첩자들은 위장을 잘 하고 자기 진짜 신분과 임무를 노출시키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표적으로 삼은 사람에게 접근해서 신임을 얻으며 친근한 관계를 맺고 상대방의 실수를 엿보며 약점을 캐어 쌓아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들을 고용한 자들에게 그들이 써먹기 좋은 정보나 증거물을 넘겨주는 일을 하고 그 대가를 지불 받아 사는 자들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그 계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본문 20절에서 우리는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한 것을 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고용한 첩자들은 아주 머리가 좋고 유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상대방의 환심을 사면서 상대방에게서 자기들이 내심 원하는 발언을 이끌어내도록 말을 걸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21절에 보면 그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던진 말은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치켜세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저런 계산을 하며 외교적인 수사를 하지 말고 생각하는 그대로 말씀해주셔야 한다는 일종의 포석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쳐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준비해온 간교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22절입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이 질문은 참으로 기막힌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냥 “세”라고 번역된 말은 소위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입니다. 이것이 고약한 것은 유대인들 자국의 주민세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자기나라를 정복한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금을 내기 위한 돈에는 그 로마황제의 초상과 이름이 찍혀있었습니다. 그 세금을 낸다는 것은 자기 나라가 그 로마제국의 속국이고 그 백성은 로마의 시민도 아니고 그 로마제국의 속국의 백성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세금을 내는 것은 국민적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세금 내는 일을 즐거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고용해 보낸 첩자들은 바로 이 사실을 파고들어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시면 예수님을 백성으로부터 떼어놓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로 여기고 있었으며 로마제국에 맞서서 그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해주리라는 기대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할 뿐 아니라 분노하며 더 이상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눈에 가시 같던 예수를 처치하는 일은 더 이상 아무런 어려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시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그 사실을 로마총독에게 알려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로마에 항거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는 자로 잡아들여 처형하게 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직접 대지 않고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백성으로부터의 지탄과 보복을 면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내심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답해주기를 더 바라고 있었습니다. 본문 20절에서 보는 대로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냈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무리를 선동해서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끌고 가 세우고 그를 고발할 때에 결국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23:2)라고 거짓말을 한 것만 봐도 얼마나 그들이 예수님을 그 방향으로 몰고 가 잡으려 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이 마련한 계책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셔도 잡히실 뿐 아니라 죽음을 면하기 힘든 진퇴유곡의 덫을 놓은 것입니다. 이 계책은 사실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에게 보기 좋게 당한 일에서 경험한 예수님의 지혜를 그대로 써먹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다 내쫓으시고 난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시자 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기를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대꾸하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눅20:1-8).

  어쨌든 예수님께 당한 대로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얽어맬 수 있게 되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예수님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던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묘한 예수님의 대답 때문에 다시 한 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상대하려는 이가 누구인지를 진정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간계를 아시고(23절)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갖고 있던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드렸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이 로마제국의 지배와 로마황제에 대한 세금납부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데나리온을 받아 드시고는 그들에게 다시 보이시며 물으셨습니다: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24절). 그러자 그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절). 로마제국과 그 황제에게 반역을 부추기는 말도 전혀 아니고 유대인의 영적 지도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백성의 신뢰를 저버리는 말도 전혀 아닌 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첩자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책잡지 못하고 그저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기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26절). 진퇴양난의 위기를 빠져나가는 예수님의 지혜는 솔로몬의 지혜를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명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세상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과 진리를 듣고 받아들이며 따르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간교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사실입니다. 거짓말, 악한 자들의 매수와 어리석은 자들의 선동 등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없애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예수님 대신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렇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쓰러뜨리려는 세상과 그 세상을 뒤에서 움직이는 사탄의 계략과 공격에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 어떤 간계를 써서 대적해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지시는 것 같아도 결코 주님께서는 패배하지 않으시며 세상의 꾀에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맞섰던 모든 자들은 결국 자기들 꾀에 빠지고 죄의 악순환에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세상의 악의와 적대감도 같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상대하기에 필요한 우리의 지혜를 오직 주님의 지혜로부터 얻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에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가이사에 대한 복종”과 “하나님께 대한 복종” 사이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두 가지 일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다 취해야 하는 일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치의 오해 없이 바로 이해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유대인의 정복자이고 지배자인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시며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타협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충하고 하나님의 인내와 예언자들을 통한 오랜 경고를 무시함으로써 자초한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적 징벌을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도리를 온전히 지켜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제국도 결국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또한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고 있고, 게다가 비기독교국가일 뿐 아니라 반기독교세력들이 창궐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음해하며 곤경에 빠뜨리려는 흉계가 계속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조금이라도 타협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아무리 악한 정권이 들어서도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나라 국민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다 하면서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신앙의 도리 또한 바르게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민권을 하늘에 가진 이들로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드릴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이 생각하듯 당신이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심을 밝히셨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내심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시며 백성의 앞에 서서 로마제국의 통치에 맞서주기를 기대했을지 모르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백성을 회개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바른 신앙을 깨닫게 하시며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함임을 알게 하려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적인 욕망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바르게 배워 알고 그대로 실천하며 그가 가라고 하시는 길을 흔들림 없이 충성되게 걸어가는 제자가 되기를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과 그 실천이 또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이 나라에서 그 믿음과 소망을 전하며 그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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