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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을 잡으시는 주님 (사 42:6~7, 마 14: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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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간부터 추워진답니다. 수능고사가 있는 주간인데 안 추울 리가 있습니까? 수능고사일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자녀들이 수능시험을 잘 치르고 원하는 대학에 꼭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학교의 급훈을 보니 “대학의 문은 좁지만 우리는 날씬하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들어가고 싶으면 그렇게 썼겠습니까? 수능 고사장에는 선생님도 부모님도 함께 들어갈 수 없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은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을 꼭 잡고 들어가세요. 성령님은 기억나게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공부한 모든 것이 잘 기억나서 답안지를 훌륭하게 쓰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절대로 잡은 손을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손은 인간의 얼굴과 오장육부를 대변합니다. 손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손을 보면 건강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건강하기 위해서는 머리는 차가워야 하고, 손과 발은 따스해야 하고, 배는 좀 곯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손은 건강의 척도입니다. 손을 보면 건강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손은 중요한 감각기관입니다. 발로 차봐서는 모르지만, 손으로 만져보면 압니다. 손을 잡는 것은 중요한 인간관계입니다. 서로의 감정을 교감하는 수단입니다. 손을 잡는 것은 사랑과 교분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 손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는 것은 화가 났다는 뜻입니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는 것은 숨기지 않고 작전이나 본심을 드러낸다는 입니다. 손바닥은 인간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위입니다. 손바닥은 마음 속이라고 합니다. 손바닥을 보이는 것은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손금을 봐주는 사람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있으면 인간은 곧 정직해집니다. 손금을 보는 사람이 묻는 말에는 고분고분 모조리 대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가운데 손가락이 다섯 개 이상인 것은 없습니다. 엄지는 작은 손이라고 합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다른 증거가 하나도 없더라도 엄지 하나만 갖고서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엄지가 없으면 다른 네 손가락이 다 쓸모가 적어집니다. 엄지 때문에 다른 손가락들이 다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손쓴 사람”(homo habilis)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손을 가지고 있고 손이 발달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손을 쓰므로 “도구를 만드는 사람”(homo faber)이 될 수 있습니다. 미래는 손이 발달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손은 많은 미래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손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손으로 하는 일들을 잘합니다. 섬세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는 병아리 감별에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난자에서 핵을 추출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몇 배나 빨리 합니다. 이동전화의 문자 보내기 기술은 세계 최고입니다. 컴퓨터 게임도 최고의 수준입니다. 프로 게이머가 많고 세계 다른 나라에서 게임을 배우기 위하여 유학을 옵니다. 부인들은 손으로 거의 모든 부엌일을 합니다. “장맛은 손맛”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약밥을 만드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찹쌀을 삶아놓고 거기에 검은 설탕을 넣고 대추, 밤 등을 넣고 손으로 버무립니다. 제가 왜 옆에서 기다리는지 아십니까? 약밥 얻어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작업이 끝나면 어머니의 손을 꽉 움켜잡고 손을 빨아먹기 위해서입니다. 그 맛이 약밥보다 월등합니다. 정말 엄마 손맛은 일품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손 좀 빌려다오”, “나는 그 일에서 손 뗐다”, “손이 모자란다”,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손 위의 사람” 등의 표현을 씁니다. 그 중의 하나가 “손잡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함께 협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맹을 맺고 협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손잡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동맹을 맺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손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손을 내미시고 잡으십니다. 이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손을 잡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귀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손을 의식하고, 주님의 손을 놓지 말고, 꼭 잡고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손을 잡으시는 것은 주님의 본능적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14:31에는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라고 합니다. “즉시”라는 말은 예수님의 본능적 동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입니다. 무의식중에 저절로 감싸는 본능적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물에서 건져내고 자신은 죽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어머니가 불구덩이에서 아기를 밖으로 던지고 자신은 죽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이런 본능적 사랑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이시겠습니까?

  독일의 목사인 베르너 퀸스텐마허는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100가지 이야기’라는 그의 책에서 “머리와 손은 짝을 이루어 일한다”고 합니다. 머리와 손은 항상 함께 일합니다. 손은 사고와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 손은 주님의 사고입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는 것은 주님이 늘 생각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잠언 17:18에는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고 합니다. 남의 손을 잡는 것은 때로는 위험합니다. 남의 손을 잡는 것은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헤어진 가족을 찾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그 사람이 보고 싶다’에서 어떤 젊은이가 나와서 어머니를 찾습니다. 이 젊은이는 어릴 때에 엄마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갔는데 정신없이 한참 가다가 보니 엄마 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 손이나 잡으면 실패합니다. 손을 잡는 것은 중요한 결정입니다. 오래 전에는 학교 다닐 때에 여학생 손 한번 잡아서 그 책임을 지느라고 결혼한 사람도 봤습니다. 물론 그 후에 사랑하게 되고 잘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31에는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누가복음 8:54에는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손을 잡고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손을 잡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는 무덤 밖에서 말씀만 하셔도 썩어 냄새가 나는 시체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각색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사 고치셨습니다. 나환자인 한센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깨끗케 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행렬이 동네 밖을 향하여 갈 때에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셔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나가셔서 침을 뱉어 흙을 바르고 고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하늘의 음성에 놀라 고개 숙인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두려워말라고 하시며 일으키셨습니다. 손을 대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 낫게 하시고 손을 잡아 주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의 손을 잡아 주신 것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문에 앉아 있는 한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상한 마음을 배운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많은 짧은 민화들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민화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들의 사랑으로 삽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는데 어색할 뿐 아니라 인색합니다.

  게리 채프먼이 쓴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사랑의 언어를 설명합니다. 제1의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입니다. 제2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제3의 사랑의 언어는 선물입니다. 제4의 사랑의 언어는 봉사입니다. 제5의 사랑의 언어는 육체적 접촉입니다. 육체적 접촉을 전혀 갖지 않고 지낸 아이들보다 안아 주거나 입맞춤을 해준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는 것은 사랑을 전달하는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잡아 주신 것은 이런 효과적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어릴 때 철길 위에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둘이서 서로 손을 뻗어 잡고 걸으면 떨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철로를 걸어갈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양쪽 철로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손을 잡는 것은 협력입니다. 서로의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협력의 힘은 바로 배가에 있습니다. 손을 잡음으로 힘을 배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손을 잡으면 우리의 힘이 배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손을 잡으시는 것은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42:6에는 “나 여호와가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으시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주님이시면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걸어가게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니, 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는 물 위로 용감하게 걸어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갑자기 물결을 보고 겁이 나서 물에 빠집니다. 예수님께 거의 다 와서 빠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예수님은 물에 빠지지 않게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물 위를 걸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물 위를 걸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 위를 걷지 못합니다. 빠지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물 위를 걷게 하십니다. 그리고 빠질 때에 다시 건지십니다. 주님의 손이 물에 더 이상 깊이 빠지지 않게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에 대하여 보호하시는 본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생물의 보호본능을 아시지요? 물고기는 산란기가 되면 가장 안전한 곳에 알을 낳습니다. 새끼를 까기까지 수컷이 지키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나비와 같은 곤충들은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보호합니다. 식물도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모사와 같은 식물은 외부의 침략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어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호본능의 원조가 누군지 아세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2:3에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보호본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본능은 본성적이며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보호는 본능적이고, 본질적이고,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사건입니다. 큰 혜택이며 지나칠 정도로 편애한다고 할 정도로 지극합니다.
  이사야 31:5에는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어미 새의 새끼에 대한 보호본능도 대단합니다. 모성애가 뛰어난 새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본능에는 비교도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십니다. 졸지도 아니하시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는 이유를 아세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구책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이로 한번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자구책, 하나님의 본능 발동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한순간도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느끼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을 잡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32:10에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눈동자와 같이 지키십니다. 눈동자는 자동으로 보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은 자동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2에는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놓지 않고 내내 이끌어주신 주님이십니다.

  세쿼이어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거목입니다. 큰 세쿼이어는 나무 가운데 큰 구멍을 뚫어 자동차가 지나다니기도 합니다. 세쿼이어는 한 그루가 아니라 여럿이 숲을 이뤄 군락을 형성합니다. 때로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면 숲의 나무들은 부러지거나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나지만 세쿼이어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우뚝 서 있습니다. 알고 보니 세쿼이어는 땅 밑을 파보면 얼기설기 뿌리들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뿌리가 서로 손을 잡듯이 꼭 잡고 있으니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센 폭풍우에도 견디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가면 세상 폭풍에도 끄떡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2절은 더 은혜롭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이 찬양이 우리 여정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코리니코프가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저항할 수 없이 맹목적으로 끌려간 것 같다”. 이런 저항할 수 없는 주님이 잡은 손의 힘을 느끼며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한껏 힘을 쓰며 울며 세상에 나옵니다. 생존을 위한 의욕이 넘칩니다. 그 힘으로 엄마 젖을 얼마나 힘껏 빠는지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 힘은 가는 빨대로 3미터 정도 되는 물을 빨아올리는 힘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손을 쫙 폅니다. 이제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손을 폈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시편 80:17에는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손은 펴고, 손을 놓고 가지만 주님은 내 손을 잡고 낙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주님의 손은 우리를 잡고 함께 가실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을 잡으면 고아 아닌 고아가 됩니다. 주님의 손을 놓치고 혼자 가면 곧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손을 잡아달라고 손을 뻗치고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지만, 자기들이 필요 없으면 잡으려던 손도 뿌리치고 혼자 막 달아납니다. 이 할아버지도 섭섭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을 뿌리치지 마시고 꼭 잡으세요. 주님의 손을 잡는 자는 주님의 힘을 얻습니다.

  이 손을 잡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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