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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재의 가치를 아는 신앙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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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어느 날 스승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스승님! 저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동료들이 나를 따돌리는데 아무래도 저는 너무나 비천한 존재인 모양입니다. 죽고 싶습니다.”조용히 듣고 있던 스승은 벽장 속에서 주먹만한 돌 하나를 꺼내주며 말했습니다.“이 돌의 가치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어안이 벙벙한 제자는“스승님,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하며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스승이“시장에 나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오너라.”며 제자에게 돌을 들고 나가게 했습니다. 제자가 시장에 나가 채소장수에게 물었습니다. 채소장수가 말했습니다.“예끼! 이 사람아 돌덩이가 무슨 가치가 있어 갖다 버려!”하고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정육점에 갔습니다. 자세히 쳐다보던 정육점 주인이“보통 돌은 아닌 것 같고... 돼지고기 두어 근 값은 쳐 주겠소!”하더랍니다. 이번에는 방앗간에 갔더니“내가 돌을 볼 줄 아는데 이 돌은 보통 돌이 아니군. 쌀 한말 값은 나가겠어!”그럽니다.‘그럼 그렇지, 돌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어!’중얼거리면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보석가게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무심결에 한번 흘낏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돌을 정밀감정을 하더니 이마에 땀을 흘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당신이 받고 싶은 액수가 얼마요? 얼마를 부르든 내가 다 주고 사리다. 이 돌은 사실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나고 희귀한 보석이요. 부르는 게 값이요. 1억? 10억? 100억?...”깜짝 놀란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보아라! 네 동료들이 아무리 너를 돼지고기 두어 근이나, 쌀 한말, 아니면 하찮은 돌덩이 취급을 한다고 해도 너의 가치는 네가 값을 매기는 그대로다. 중요한 것은 너는 너를 얼마짜리로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여러분, 육신이 건강하고 온전한 정신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가치를 볼 수 있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자신만의 가치를 자기가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신이 보는 내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의 가치 평가에는 남이 보는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각에 의해 내가 평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조건이라든가 혹은 내적인 품성까지도 그 가치가 평가 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평가가 때로는 내가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깨닫게 해주는 유익이 있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절대적이지는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평가에 매여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불행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의 가치를 남의 평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 삶을 그르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공히 겪는 이러한 가치 평가 기준이외에 나를 알고 인정해 주는 가장 정확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아닌 평가 받아야 할 대상이 우리에게는 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내 존재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는 이 사실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 예배를 통해서 내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우리들의 평가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진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채로 무려 18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고 긴병에 장사 없다고 오랫동안 병중에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것을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온 가족들과 식구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정신적 지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말은 하되 의미가 없는 말이요, 들을 수는 있지만 뜻이 전달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사랑을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은 살아 있는 인생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었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볼 때에는 아무쓸모가 없는 버려지고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R. B. 페리(Ralph Barton Perry)]라고 하는 사람의<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먼저는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소비하느냐를 생각합니다. 가졌더라도 구두쇠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면서 사느냐하는 것까지가 사람의 가치입니다. 이런 물질로 인해서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리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키는 최소한 얼마이상은 되어야 되고, 얼굴은 어떠해야 되고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운동선수들이 인기가 많고 연예인들이 인기가 많습니다. 이걸 보면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또 하나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가치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가치입니다. 곧 목적이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열심히는 사는데 그 목적이 뚜렷하지도 못하고 높지도 못합니다.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 가치도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것을 향하고, 높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고,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살 때에 그만큼 인생의 가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준해서 여기에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해봅니다.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의 기준에 의해서 생각해 볼 때에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민폐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필요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삶을 살아가던 여자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의 사람됨을 보시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무엇을 봅니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먼저 보여야 합니다. 인격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성품너머에 있는 형상이 먼저 보여야합니다. 그래야 무시하지 않고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를 보십시오.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이 어떻게 생명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무 자유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지금 이 여자는 매어있는데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완전히 속박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어딘가에 어디에 매어있지 않습니까? 혹시 풀려 나와야 할 것에 매어서 아직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언가에 지독히 매어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요즈음 공공장소는 어디에나 금연장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래도 아직 담배를 꼭 피워야만 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간혹 이런 사람들 보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공항이나 역전에 보면 추운 겨울날씨에 바깥 한쪽 구석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서 급하게 빨고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안 피우고는 안 되는 보이지 않는 끈에 매어서 노예가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뿐입니까? 욕심, 명예심,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잘못된 습관에 매인 것...다 매인 것입니다. 제정신이 아니라 매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하셨습니다.‘저는 매었다, 매었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셨습니다. 은혜를 부여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생각해 보십시다. 미래가 보여서 사랑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까? 어렵습니까?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아이들 중에 지독히 심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정말 때려주고 싶고“아이 교육을 저 따위로 시키냐?”고 따져보고 싶은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들의 생각은 다릅니다.‘저 아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저러나.’그럽니다. 왜입니까? 내 자식이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겁니다. 아무리 고집을 부리고 뒹굴고 남들이 볼 때는 천하에 벼르장 머리 없는 아이로 봐도 부모가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쟤가 의지가 있어. 개성이 있다고 쟤가.”그럽니다. 좀 비정상적으로 보일만큼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만 하여간 사랑하니까 미래를 보잖아요.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까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 여자를 봅니다. 이 매어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병을 고치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평생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살 것을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삶을 살 여자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을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가 되고,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그리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고... 여러분, 온전한 자유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풀어 주신 일들에 또 다시 매어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유하게 된 그 불쌍한 곳에서부터 우리의 존재 가치가 시작되었음을 기억하고 자기의 존재 가치를 분명히 깨달아 살아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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