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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품으시는 예수님 사랑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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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품으시는 예수님 사랑 / 요한복음 21:1-14

우리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오래하시고 혹은 여러 직분을 맡아서 교회 봉사를 오래 하시다 보면, 우리 성도들 마음에 반복해서 힘을 주고 은혜를 주시는 그런 성경 구절이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나 어려움을 당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할 때, 혹은 우리 심령을 얽매는 무거운 짐이나 고통이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새 힘을 얻기 원하고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붙들어 주시는 그런 은혜를 간절히 바라게 될 때, 바로 그런 때에 변함없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말씀, 위로를 주시는 말씀, 새 힘을 주시는 말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인하여 감격하게 하는 말씀, 그런 말씀들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통해 자주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그래서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1. 14절에서 말씀하시듯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21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당신을 나타내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그 발단부터 살펴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을 친히 증거 하셨지만 제자 가운데 가장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는 어느 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고서는 갈릴리 바다로 떠나 버렸습니다.

왜 베드로가 갑자기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였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지만 본문 말씀 요한복음21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베드로가 심심해서 그저 하루 소일거리로 낚시하러 간 그런 성격의 사건은 아닙니다. 즉 주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간 것은 이제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그 옛날의 생활로 돌아가겠다 하는 그야말로 폭탄 같은 결심과 선언을 했던 일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니 부활이니 복음의 사도니 교회니 하는 이런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자기도 그저 물고기나 잡으면서 조용히 살아가야겠다 하고서는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1) 그런데 여기 21장 사건 바로 앞 20장의 사건을 보시면,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19-23을 보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장사지낸바 된 지 사흘 되던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에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고,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고,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주님의 그 부활의 권능으로 그들을 평강 가운데 인도하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뿐만 아니라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이제부터 제자들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으로 보냄 받는 주님의 사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아가 죄악으로 죽어가는 세상을 향하여 사죄의 은혜를 선포하는 너무나도 귀한 사명과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런 놀라운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들은 지 불과 몇 날이 못 되어서 베드로는 그 모든 주님의 약속과 사명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면서 떠나버린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20:26이하를 보시면, 여드레 후에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두 번씩이나 나타나셔서 거룩한 사명과 약속을 주셨는데, 이런 갑절의 은혜를 받고서도 베드로는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을 잊고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몸을 돌려 버렸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베드로의 결심과 행동을 볼 때 다른 제자들은 당연히, “베드로야 네가 주님의 사랑을 그렇게 받았는데 그럴 수 있느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주님을 외면할 수 있느냐?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우리가 그 주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 있느냐?” 하면서 응당 말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베드로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말리기는커녕 남은 제자들도 덩달아서 ‘나도 사실은 베드로와 같은 생각이 꿀떡 같았는데 베드로가 선봉이 되어 주니 이것 참 좋은 기회다’하고서는 너나없이 모두 베드로의 뒤를 따라 고기 잡으러 가버립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으며, 요한복음의 저자이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모친 마리아를 돌보도록 부탁을 받았던 요한마저도 베드로와 같이 물고기 잡으러 가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2. 이렇게 주님의 거룩한 사명과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같이 고기 잡으러 간 그날 밤 날이 새어갈 무렵, 우리 주님은 다시 세 번째 그 갈릴리 바다에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이 때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신없이 어지럽혀져 있었든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들 같아서 이들은 자기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분이 주님이신 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는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내리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그물 가득 잡은 후에야 그 말씀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신 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이 여기 기록된 이 사건을 보시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일찍이 있었던 또 다른 사건과 아주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요한복음21장의 사건은 바로 주님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그 일을 반복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주께서 제자들을 구별하여 부르실 때에,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갈릴리 바다에서 배에 올라서 말씀을 전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배에서 수많은 군중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셨습니다.

이에 일생을 고기잡이에 바쳐왔던 고기잡이 전문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그 날 만큼은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를 못했는데, 그러나 베드로는 배에서 설교하신 예수님의 설교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든지 아무런 대꾸를 못하고 주님 말씀대로 묵묵히 그물을 내립니다. 감화력이 있고 권위가 있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선생이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해서 그물을 내렸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는 아무런 확신이나 기대 없이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바로 그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했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바다의 고기들까지라도 복종하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위엄과 권세 앞에서 거룩한 신적인 영광과 권능을 느끼고, 자신은 이런 신적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분 앞에 감히 서 있을 자격도 없는 죄인됨을 깨닫고서는, 참으로 경외하는 마음 가운데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했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당신의 신적 위엄을 경험하고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주를 경외하는 베드로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2) 이 일련의 사건을 볼 때에 주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서 그물을 내리라 하셨던 것은 그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주님 앞에서는 인생이 스스로 죄인 됨을 입으로가 아니라 그들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뼈저리게 느끼게 하시려고 이 일을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자는 감히 그 분 앞에는 나가지도 못할 자임을 알게 하시고자 이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죄인 되고 연약한 인생이 자신의 생명과 삶과 존재 전부를 의탁하고 의지하여야 할 분이 바로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조차 못할 신적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예수님 당신임을 알게 하시려고 이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3) 그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러나 그 본체는 하나님과 동등이신 우리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 인생이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고 의지하여야 할 분이시라는 이런 깨달음 가진 자로서 이제부터는 바로 그 주님에게로 사람을 취하여 오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함으로 피조물인 인생들이 원래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주는 사명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이 갈릴리에서 먼저 경험하고 깨달은 하늘의 은혜를 이제부터는 자신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자가 되어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그 앞에 설 수조차 없는 주님 안에서 그 때 경험한 신적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주님의 말씀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과 권세가 있어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업과 아비까지도 내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3. 그런데 이제 다시 오늘 본문의 사건으로 돌아오면 이렇게 자신들의 생업과 부모와 형제까지도 뒤로한 채 주님이 주신 고귀한 사명에 불타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전부를 드렸던 이 제자들이 과거의 그 모든 은혜를 잊어버리고서 이전의 생업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서 그 은혜를 누리게 하며 인생들이 정말로 가야할 제 길을 갈 수 있도록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뒤로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들의 영혼마저도 영적인 기근과 배고픔으로 메마르고 지치며 곤하여진 채 성도로서의 삶에 아무런 기쁨과 보람도 없이 그저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살이에 혼을 빼앗기고서 그렇게 살아보고자 돌아섰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하늘의 위엄과 영광 가운데 계신 그 주님과 교제함으로 받았던 그 깊은 감동과 은혜는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는지, 또한 그 주님이 감히 그 앞에 설 수도 없는 죄인된 자신에게 하늘의 사명을 주심을 인하여서 온 몸으로 떨며 전율하면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던 그 은혜는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는지 이들은 다시 이전의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이런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신 우리 주님은 먼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미 그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아시고 묻는 물음입니다. 제자들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 처량한 처지를 아시고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밤새도록 수고하고 고생하였다만은 나를 떠나서 너희 힘으로 한 마리의 고기라도 잡을 수 있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인생을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살게 하신 그 주님을 떠나서 다시 이전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 너희의 마음이 참 만족을 주는 그런 소득이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먼저 체험한 자들로서 이제 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사명을 주셨는데, 주님 주신 그 사명을 뒤로한 채 이전 생업으로 돌아가니 너희 계획대로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서야할 자리가 어딘 줄을 알고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한 인생들에게 살 길을 인도해야할 그 복된 자리를 떠나니, 너희가 참 기쁨과 위로를 받고 살 수 있는 안식의 처소가 세상에 있더냐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하여서 그들의 모든 죄악을 씻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삼아 놓았는데, 그런데 그 주님을 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때에 과연 세상이 너희에게 무엇을 주더냐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갔더니 세상이 잘 왔다고 너희에게 박수치면서 환영하고 너희를 인정해주고 너희를 높여주더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 5절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신 물음은 비단 이 열 한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 받은 이후에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 망각하고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볼 때가 많이 있지만 그 때 과연 주님을 떠난 너희의 심령에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겠느냐 오늘도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로 혹은 여러분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받은 이후에 여차여차한 이유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피곤하고 고달프다고 느껴져서 세상으로 가면 혹은 교회에서 받은 사명과 직분이 무겁다고 망각하고 신앙을 버리지는 않으나 사명과 관계없이 살아가면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잘 될 것 같지만 그러나 결단코 아무 것도 세상에서 얻는 소득이 우리에게는 남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생사나 축제를 앞두고 있는데, 주님의 교회의 거룩한 사명을 외면하고 살면 우리 영혼에 참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얻은 소득은 소득대로 남는 것이 없고 나아가 우리의 심령은 이제는 주님 앞에서 부끄럽고 민망하여 주님 주시는 평강과 위로와 안식마저도 누릴 수 없는 초라한 형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 하반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아무 것도 얻은 소득이 없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얻은 소득이 없다”는 것이 제자들의 슬픈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5.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갑절의 은혜가 숨어있습니다. 즉 주님의 은혜와 사명을 망각한 채 세상으로 갔지만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어 허탈감에 빠진 제자들에게 이제 우리 주님이 다시 찾아 오셔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대로 주님은 왜 너희가 나를 이같이 배신했느냐 하면서 따지시거나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고자 했으니 나도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도망간 것도 부족해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밤새 고생하여 지치고 고달픈 그 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식탁을 준비해 놓으시고는 떡과 생선을 구워서 그들로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부활도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도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양 무리도 다 잊어버린 채 그렇게 살아가려고 세상으로 달려갔지만, 그 세상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여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로 막막하고 기가 막혀하는 그 처량한 제자들을 위하여 주님은 풍성한 식탁을 준비하셔서, 그들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시고 그들 마음에 처음 사랑의 감격을 느끼게 하시며 천국 잔치의 풍성한 은혜를 다시 맛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연약한 인생인지라 한 번 주님을 부인하고 넘어졌지만 그러나 주님은 아무 책망하심 없이 그저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면서 처음 그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받았던 그 고귀한 사명을 다시 회복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비록 낙심하고 실패한 자들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한 번 주셨던 은혜와 사명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어서 그 온전한 사랑과 고귀한 사명을 다시 회복케 하심이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달리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고 단 한 마디“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십니다.

베드로가 선봉이 되어 물고기 잡으러 가버린 일을 베드로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사실 베드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정말로 마음으로 아파하고 통곡하면서 회개하기는 했어도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심으로 다시 주님을 대면하기가지 했어도 베드로의 마음에는 아직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되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던 그 실패의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좌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심으로 자기가 부인했던 일에 대하여는 묻지도 않으심으로 이미 주님은 용서했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자신은 그 일이 용서가 되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주님 버리고 도망가고 저주하며 부인한 일을 이제 알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앞으로 성도들 앞에서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를 생각할 때 베드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용서되지 않는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 안목을 생각할 때 실패의 중압감과 고통은 베드로로 하여금 차라리 주님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베드로는 마귀가 양심을 송사하는 것을 견딜 수 없고 사도로 사는 것도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물고기 잡으러 가는 이상한 선택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 마음 중심에는 혹시나 주님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지 않을까 밤새 고기를 잡으면서도 해변을 뒤돌아보았을런지 모릅니다.

배에서 그물을 내리면서도 ‘이게 아닌데’ 하면서 주님이 나를 찾아오지 않고 이대로 주님과의 관계가 정말로 끝장나면 어쩌나 하는 그 마음에 배를 내리면서도 줄곧 불안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누군가가 “주시다” 하는 말을 할 때에 베드로는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바다 속으로 뛰어내려서 주님 계신 데로 쉬지도 않고 달려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실 때, 그 말에 숨어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드로는 압니다. 마치 주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그동안 마음고생이 정말 많았지, 이제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용서했지 않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것을 모르겠느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사도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힘 줄 것이라는 것을 모르겠느냐, 베드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이제 너도 너를 용서하고 힘을 얻고 용기를 내려무나.” 바로 그런 말씀으로 들려진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속마음을 주님의 그 따뜻한 눈빛으로 그리고 그 인자하신 음성으로 느끼면서 이제 베드로는 주님이 나누어 주시는 조반을 받아먹으면서 자기도 눈빛으로 주님께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 정말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주님 제가 물고기 잡으러 오면서도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세요. 정말로 이것으로 주님이 영원히 나를 버리면 어떡하나 얼마나 두려웠는지 아세요. 얼마나 초조하게 제가 밤새 고기 잡으면서도 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 생각에 힘들었는지 아세요. 주님 이렇게 다시 와 주시니 정말로 이제야 제가 살 것 같은 것 아세요. 그런데 주님! 솔직히 아직도 자신은 없어요. 제 본 모습은 십자가에 앞에서 부인했던 모습, 그것이 제 본 모습이어서 솔직히 아직도 사도로서 살아갈 자신은 없어요. 그런데 주님! 아직도 자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 능력과 본분에 맞지 않게 저는 정말로 사도로 살고 싶어요. 주님 이름 증거하며 살고 싶어요. 자격 없는 줄 알지만, 그래도 주님 그렇게 살고 싶어요. 주님 저는 어떻게 해야 되죠. 주님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아마 분명히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기도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의 떡을 받아먹었을 것이다.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알기에 주님은 조반 먹은 후에 베드로가 너무나 하고 싶으면서도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고 있는 가슴에 묻혀 한이 되어버린 말을 물어서 하게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실 베드로는 얼마나 주님께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슨 염치로 세 번이나 주님 부인하되 저주하며 까지 부인했던 사람이 ‘주님 사랑해요’하고 말을 하나, 누가 그 말을 들으면 비웃지나 않을까 하면서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말이 하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차마 그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베드로가 하고 싶어 하던 그 말을 하면서 베드로의 마음에 남아 있는 모든 실패의 아픔들과 상처와 고통을 주님 사랑으로 다 씻어 버릴 수 있도록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한편으로는 너무나 감격한 마음으로 그러나 여전히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송구하여 차마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 제 마음 아시잖아요’하면서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가 정말로 주님께 무릎 꿇고 눈물로 간구하고 싶은 것을 허락하시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지금 정말로 타는 마음으로 “저에게 주님 당신의 양을 먹이는 직분을 다시 주시면 안 되나요”하고 정말로 간청하고 싶은데, 차마 민망하여 그 말을 못하고 있는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 아시고“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은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혹 여러분의 마음은 이전의 생업으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오늘 여러분의 심령은 과거에 경험하고 주 앞에서 눈물로 받았던 모든 은혜와 감격과 감사가 사라지거나 사라지진 않았어도 식어버린 가운데 그야말로 낙엽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 같이 참된 생수에 메말라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의 일이나,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성도의 사명은 다 잊었거나 잊지는 않았어도 생명력 없이 근성으로 습관적으로 주님 사랑하는 간절한 심령을 싣지 못한 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지내지는 않습니까? 첫사랑의 뜨거운 감격과 설레임 그리고 열정이 식어버린 채 무미건조해져서 주님을 섬기는 우리 삶에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 붓지 못하는 모습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세상으로 돌아갔지만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어서 깊은 한숨과 허탈감에 괴로워하던 그 제자들을 다시 품으시고 안아주시고 은혜를 회복시켜 주신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을 감동하시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사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한 이유는 제가 이런 주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이나 목회의 길을 포기했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 번 그리했고, 주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또 한 번 그리하여서 두 번 그리하였지만 저는 사실 일 년에도 몇 번이나 지쳐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저에게도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리고 지쳐 힘들 때 마다 다시 오셔서 “권목사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권목사야! 너의 부족함 내가 안다. 그것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느냐”하고 말씀해 주시는 주님이신데, 하물며 여러분에게는 더욱 큰 은혜와 감화로 이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시 회복하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 심령에 오늘과 내일 앞으로 영원토록 충만함으로 하나님 앞에 인생으로서 성도로서 서야할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을 붙들고 은혜로운 인생길 걸어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권재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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