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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신앙적 감사 (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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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교회가 2006년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추수감사예배’에서 ‘추수’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곡식 추수를 말합니다.
그 감사의 표현으로 우리는 곡식과 과일로 이 제단을 이렇게 장식했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이것을 보면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나아가서 이 말은 삶의 모든 것의 추수를 말합니다.
자녀, 사업, 신앙성장,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말합니다.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 2006년, 저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강물처럼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이 성전에 이 한 해 우리 가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우리 교회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파도치기 바랍니다.

오늘은 또 2006년 하반기 119 새 생명 큰 잔치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 잔치의 초대에 응해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119 새 생명 큰 잔치,’ 이 이름에서 ‘119’가 무슨 뜻일까, 궁금하실 것입니다.
‘119는 소방서 전화번호인데 교회에서 왜 이 숫자를 쓸까?’ 하실 것입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성도가 한 가정을 구원하자’는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에게 전도해서 그의 영혼을 구원받도록 하는 일은 119 구조대원들이 육신적으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실은 영혼구원이 육신구원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혼이 먼저 구원 받아야합니다.

오늘은 설교를 하는데 투런 홈런을 쳐야 하는 날입니다.
사냥으로 말하면 일석이조,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아야 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이니까 ‘감사’라는 일루 주자도 홈인을 시켜야 합니다.

‘119 새 생명 큰 잔치’를 하니까 오늘 처음 오신 분들도 홈인을 시켜야 합니다.
그분들에게 ‘예수 믿는 것은 이렇게 좋은 일이다.’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설교를 하는데 안타도 치지 못할 때가 많은데, 한 마리 새도 잡기 어려운데 투런 홈런을 쳐야 한다는 것은 대담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2부 예배에서는 홈런이 아니라 번트로 둘을 홈인시켜야 합니다.
2부 예배에서는 감사절 칸타타가 있어서 설교가 짧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 그리고 ‘처음 오신 분들’ 이 두 가지 명제를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불평이 사라지고 감사가 넘친다.’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교회에 나오면 마음에 가득하던 불평이 서서히,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어떤 집사님이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 경비원이 형편이 참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가정불화가 있어서 아내가 집을 나가버렸고 자녀들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혼자 있을 때는 한숨을 자주 쉬었습니다.
집사님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도 한숨을 쉬었는데 ‘주여-’ 하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신앙의 깊은 맛을 알게 된 다음에는 얼굴이 밝아졌고 ‘주여-’ 하고서 한숨을 쉰 것이 아니고 ‘감사합니다.’가 붙었다고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믿음이 깊어지면 불평이 사라지고 감사가 넘치는 대표적인 본보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을 선포한 예언자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서 1장을 보세요. 심한 불평, 투정,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박국서 1장에 담겨 있는 하박국의 속마음은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서 2장에서 대답을 주셨습니다.
대답을 받고 깨달은 하박국의 마음에는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것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3장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구약에 있는 감사의 노래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감사의 노래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 실제로는 감사한 마음이 없는 것보다, 감사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이렇게 감사가 넘치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외부 강사를 청했습니다.
약속한 집회날짜 며칠 전에 그 강사가 그 교회에 전화를 해서 설교의 본문과 제목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외출 중이고 마침 교회에 와있던 성도 한 분이 그 전화를 받아서 메모를 해서 목사님 책상 위에 갖다 놓았습니다.
목사님이  외출에서 돌아와서 그 메모를 보셨는데 본문이 ‘호박국 몇 장 몇 절,’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의 뜻은 ‘포옹’입니다.
요즘 ‘허그’라는 말을 많이 쓰지요.  하박국이 바로 허그입니다.

하박국은 처음에는 불평을 포옹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응답을 포옹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감사를 포옹했습니다.
이런 변화가 여러분에게 있기 바랍니다.
오늘 하박국의 감사는 ‘신앙적 감사‘입니다.

저는 그동안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여러 종류의 감사를 말했습니다.
‘상대적 감사와 절대적 감사’라는 말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런 어려운 일을 겪었는데 나는 그런 일을 안 겪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상대적 감사입니다.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무조건 감사합니다. 전부가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절대적 감사입니다.
여러분, 절대적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타의적 감사와 자발적 감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감사하라고 하니까 거기에 이끌려서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은 타의적 감사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솟구치는 감사는 자발적인 감사입니다.
여러분, 자발적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리 감사’라는 말도 했습니다.
미리 감사는 앞일을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미리 감사는 성숙한 성도가 드릴 수 있는 감사입니다.

그러면 신앙적 감사는 어떤 것입니까?
신앙적 감사는 ‘감정적 감사’에 대칭이 되는 말입니다.
감정적 감사는 감사를 표면으로, 잠시 느끼는 것입니다.
감정적 감사는 정서적 감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 주례를 할 때 종종, 신랑과 신부의 사랑은 정서적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피차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성숙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데, 감사도 그래야 합니다.

아까 본문은 성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감사의 찬양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과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 감사가 신앙적 감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감사가 신앙적 감사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세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이다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 가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그 가운데 아주 중요하고, 나와 기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와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시편 22편 5절에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하였습니다.
시편 68편 19절에서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도 미가서 미가서 7장 7절에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주 속회 인도자들을 위한 보조교재를 만들어서 교회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인도자들만 보지마시고 속도원들도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홈페이지 교육 코너에 들어가서 남자속회, 여자속회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그 보조교재 앞부분에 ‘도움 찬송 몇 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움 찬송’은 속회 시작하기 전에 부르는 찬송인데 알기 쉽게 말하면 준비찬송입니다.
찬송 전문가들이 ‘준비찬송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찬송은 다 찬송이지 준비찬송 따로 있지 않고 본 찬송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서 ‘도움 찬송’이라고 하고 있는데요, 그 날 속회와 관계있는 찬송을 한두 곡 선정해서 올려놓습니다.

지난주일 남자 속회와 여자 속회 도움찬송으로 올려놓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성가 “날 구원하신 주 감사”입니다.
‘이번 주일은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니 오늘 속회에서는 이 복음성가를 부릅시다.’ 하면서 악보를 올려놓았습니다.
2부 예배 전에 찬양을 인도하는 안원기 리더에게도 오늘은 이 찬양을 불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복음성가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론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이 복음성가의 작사자, 아우구스트 스토롬(August Storm)이라는 분인데요, 이 분은 참 여러 가지 감사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복음성가에 감사란 말이 스무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있는 감사가 어떤 것입니까?
“날 구원 하신 주 감사”입니다.

야구에서 1번 타자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후속타자들도 잘 치고 나간다고 합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신앙적 감사는, 여러 감사들 가운데서 1번 감사입니다.
톱 감사입니다.

신앙적 감사를 하게 되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먼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본문 가운데 18절 뒷부분을 보세요,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뻐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시편 13편 5절에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하였습니다.

시편 21편 1절에서는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로 인해 큰 기쁨과 즐거움이 성도 여러분에게, 특히 오늘 처음 오신 분들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하박국은 편안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순조로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안전이 보장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태평성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을 보세요. 중간에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나운 바벨론의 침공을 말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창자를 뒤흔드는 소식입니다.
입술에서 ‘이거 어떻게 하면 좋지’ 덜덜 떨리는 소리가 나오도록 하는 두려운 일입니다.
뼈를 상하게 만들고 몸을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가축도 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7절의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생계의 기초가 뒤흔들리게 됩니다.

하박국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감사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역설적인 감사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감정적인 감사를 가지고는 이럴 때 결코 이렇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정적 감사는 상황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좋은 상황에서는 감사를 하지만 좋지 못한 상황이 되면 감사가 사라져 버립니다.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신앙적 감사를 하는 분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아까 소개한 복음성가 “날 구원하신 주께 감사”에는 여러 가지 감사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는 감사할 수 없는 것도 감사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도를 거절하는 것도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찌르는 장미꽃 가시에도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믿으면, 신앙적 감사를 하는 사람들은 상황을 초월하여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오는 환난 날을…”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내가 기다리므로”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는 수 없지, 피할 수 없으니까 앉아서 겪어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념이 아닙니다.

‘환난아, 고초야, 이방인의 압제야, 가난아, 포로생활아, 오너라, 내가 그런 가운데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야구 이야기를 여러 번 이야기 하는데, 타자가 ‘시속 150km의 강속구야 오너라, 내가 홈런을 치겠다! 그것도 장외홈런을 날려버리겠다!’ 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선언입니다.

신앙적인 감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또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힘을 얻습니다.

19절을 보세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이 하여서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다는 것은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힘이 근원이신 하나님은 신앙적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그 힘을 주십니다.
그의 발에 힘을 주셔서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십니다.
저 밑바닥에 있는 문제들에 걸려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높은 곳으로 다니게 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이긴 다음에, 모든 원수의 손에서 이긴 다음에 승전가를 부릅니다.
그 승전가가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편 18편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사무엘하 22장 32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신앙적 감사의 소유자는 이렇게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환경에 대해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두려움에 대해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불평과 회의에 대해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1947년, 성경연구에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것입니다.
사해 부근에서 어떤 목동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기 위해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상하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니 양피지에 기록된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발굴대가 들어가서 많은 동굴에서 많은 사본들을 발견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유대인들이 이 사본들을 독에 넣어서 동굴 속에 숨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사본들과 함께 어떤 규칙집 같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잘 연구해서 유대교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외에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에세네파(Essenes)라는 종파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뤄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그 공동체를 쿰란 공동체(Qumran community)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성지순례를 하는 분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이 쿰란 공동체가 있던 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약 4천 명 가량 되었는데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성경연구와 육체노동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사해사본 가운데는 쿰란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하박국서를 베낀 것과 하박국서 주석이 있었습니다.
쿰란 공동체가 성경들 가운데서도 하박국서를 중요하게 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그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사는 것이 최고의 경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박국은 현재의 상황이 어떠하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승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세력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경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고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의 감사는 현재 살아가고 경험하는 세계가 모두 만족스럽고 선하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개인이건 사회이건 국가이건 간에 모든 역사를 궁극적으로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 신앙적 감사였습니다.

이 감사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훈련을 거쳐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박국을 보세요, 그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질문을 했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얼마나 사모했습니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 일반적인 감사도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에는 훈련이 필요하듯 감사도 훈련을 거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적 감사는 더욱 많은 신앙적 훈련을 거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훈련을 잘 받아서 신앙적인 감사를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19절 끝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은 자기의 신앙적 감사를 강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감사를 이렇게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노래는 산문보다 더 강한 표현이지요.
교회에서도 찬양을 통해 설교 못지않은 은혜를 받는 일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박국은 자기의 신앙적 감사가 널리 퍼져나가기를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신앙적 감사를 소유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지휘자가 자기의 노래를 쉽게 지휘할 수 있도록, 오늘날 작곡자들이 피아노를 쳐가면서 작곡을 하듯  자기가 수금을 가지고 연주를 해 가며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자기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부르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하박국의 이 신앙적 감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 분도 빠짐없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는 이 아름다운 신앙적 감사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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