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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하여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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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인생을 위하여 (눅 13:10-17)

이 시간에는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하여”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치론의 대표적인 학자인[R. B. 페리(Ralph Barton Perry)]는 그의 저서 ‘가치론’에서 사람의 가치를 약 4방향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입니다. 즉 얼마나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신체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건강하고 잘 생겼느냐는 것이죠. 다음은 정신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지성과 감성이 풍부하며 호감을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즉 그 사람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평가는 일반적인 세속적 평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상적인 평가기준으로 볼 때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여성인데 몸이 꼬부라진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가 꼬부라진 채로 무려 18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지체부자유에다가 정신까지 장애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여자를 세속적 가치에 준해서 판단해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여자에게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속적 가치로는 제로입니다. 누가 사회에서 이 사람을 필요하다고 하겠습니까?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민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인격에 어느 누가 사람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타인에게는 물론 가족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요, 아무 쓸모가 없는 무가치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삶을 살아가던 여자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가치 있는 인생이 되려면 본문을 잘 알아야 합니다.

1. 자기 평가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이야기 하나 하고자합니다. 날마다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어느 날 스승을 만나 “스승님! 동료들이 나를 따돌리는데 아무래도 저는 너무나 비천한 존재인 모양입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조용히 듣고 있던 스승은 벽장 속에서 주먹 만한 돌 하나를 꺼내주며 “너는 시장에 나가 이 돌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알아보고 오너라.” 했습니다. 제자가 시장에 나가 채소장수에게 물었습니다. 채소장수가 말했습니다.“예끼! 이 사람아 돌덩이가 무슨 가치가 있어 갖다 버려!”하고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정육점에 갔습니다. 자세히 쳐다보던 정육점 주인이“보통 돌은 아닌 것 같고 돼지고기 두어 근 값은 쳐 주겠소!”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방앗간에 갔더니“내가 돌을 볼 줄 아는데 이 돌은 보통 돌이 아니군. 쌀 한말 값은 나가겠어!”그럽니다.‘그럼 그렇지, 돌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어!’중얼거리면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보석가게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무심결에 한번 흘낏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돌을 정밀감정을 하더니 이마에 땀을 흘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당신이 받고 싶은 액수가 얼마요? 얼마를 부르든 내가 다 주고 사리다. 이 돌은 사실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나고 희귀한 보석이요.” 깜짝 놀란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보아라! 네 동료들이 아무리 너를 하찮은 돌덩이 취급을 한다고 해도 너의 가치는 네가 값을 매기는 그대로다. 중요한 것은 너는 너를 얼마짜리로 생각하느냐?”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대로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사람 평가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한다면 정확히 해야 합니다. 그럼 주님은 그 여자를 어떻게 평가하셨을까요? 16절을 보니까 주님의 평가가 기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간단한 문구지만 굉장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 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셨습니다. 외모로 보지 않았습니다. 소유로도 지식으로도 건강과 젊음으로도 노동력으로도 평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내면적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셨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볼 때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는 자신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자기 평가를 잘해야 합니다. 자신을 마치 구세주라도 된 양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가치한 존재로 비하해도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만난 다음 예수님은 물론 어느 누구도 육체대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새 피조물 귀한 하나님의 형상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일군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무가치하고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귀하며 사랑받고 쓸모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함부로 목숨을 끊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안다면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과 바꾼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지체이며, 그러므로 내가 없으면 안 될 귀중한 은사가 나에게 숨어 있다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해병대를 나온 사람은 평생 해병이라는 자존감으로 살아갑니다.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도 그런 자존감으로 삽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보다 수천 배 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자존감 회복이 시급합니다. 지나친 자기 비하가 자신을 쓸모없게 만듭니다. 이 자존감이 회복될 때 비로소 성도는 귀한 가치 있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2. 자기를 얽매는 모든 것에서 해방 되어야 합니다.

16절에 예수님께서 “매인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매여 있었습니다.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들을 수 있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마저 없었습니다. 그는 귀신에 매여 자유를 모르고 산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땅도 그린벨트로 매여 있다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을 살려면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얽매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잘못된 사상과 잘못된 관념과 잘못된 지식에 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신에 매여서 이사조차 맘대로 가지 못하고 길가에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 맘대로 치우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를 건설하고 경제를 부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매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경 마카비서에도 나오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매여서 안식일에는 전쟁이 나도 꼼짝할 수 없이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실 때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라고 주신 것이지 꼼짝할 수 없이 당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전통도 좋은 전통은 살려가야 하지만 나쁜 전통을 과감히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지장 되는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히 개혁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얽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까? 욕심입니까? 악습입니까? 잘못된 관념입니까? 전통입니까? 사단입니까? 상처입니까? 소극적인 생각입니까? 부정적인 생각입니까? 불신입니까? 명예심, 자제 못함입니까? 나는 환자여서, 나는 없어서, 나는 여자니까 남자니까, 나는 이래서 저래서 못한다는 것도 다 매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생각의 변화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좁은 물에서 자란 사람은 아무리 해보아야 작아요. 그러나 큰물에서 자란 사람은 뭐가 다르더라도 다릅니다. 그것은 생각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잠23:7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한 의식적 개혁이 일어나 얽매인 것에서 자유 함을 얻지 않는 한 어떤 뾰쪽한 수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은 본문에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즉 우리가 생각만 조금만 바꾼다면 상상도 못할만큼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18년 된 병자의 모습이 우리의 영적 모습이 아닐까요?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실망하고 지치고 피곤한 상태라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것에 매여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자유 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더욱 가치 있고 아름답게 크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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