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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약한 자를 세우는 공동체 (롬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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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약한 자를 세우는 공동체
본문- 로마서 14: 1- 2

저는 오늘 상당히 새롭고 아주 색다른 느낌을 가지고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여러 성도들은 집에서 교회 오시는 일이 익숙하시지만, 저는 그동안 51년 동안을 사실상 교회에서 살았기에 교회가 저의 삶의 일부분이었는데, 지난 주 화요일 홈타운으로 이사를 하고나서 매일 자동차로 출근을 하다가 오늘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일 아침에 교회가는 기분이 이런걸까? 그런 느낌을 가지면서 조금은 마음에 흥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뵈니까 더 새롭고 좋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정에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열심인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좋은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말씀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제일 행복한 것이 뭔지 아십니까? 강조를 하자면 사람이 아니라 성도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면서 제일 행복한 것은 다름아닌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사람이라면 좋은 직장에 다니거나, 돈을 많이 버는 사업을 가지고 있거나 절친한 친구를 두고 있거나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성도라면 그것은 당연히 좋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요.

이런 가치관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이런 저런 일로 계속 교회를 들락거리지요. 지난 주에 등록하신 가정을 심방하면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이 주변의 교회를 다 다녀보셨나요?" 그랬더니 새가족이 겸연쩍은듯 뒷통수를 긁으시면서 ‘예, 사실은 다 다녀보았습니다" 미안할 거 없다면서 저는 그분의 결정을 축복해 드렸습니다. 오히려 저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등록하시기 전에 우리가 사는 주변의 교회들을 다 다녀보신후 결정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 평안의교회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러분 스스로가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번 동광교회에서 소사구기독교연합회가 주최한 집회에서 우리 할렐루야찬양대가 찬양을 하는데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막 감격스러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수도권을 대상으로 선정한 건강한 10대 교회에 선정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지요.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은 성도로써 평생의 축복이요,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좋은 교회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외형적으로 근사한 시설이나 외관보다는 사람, 곧 성도가 중요한 줄 믿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면 좋겠습니까? 외형적으로 보면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공동체가 좋겠지요. 새가족들이 교회에 등록을 하시면 꼭 하는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남자분들이 많으시네요...' 하는 말입니다. 남자들이 오기 좋아하는 교회가 평안의 교회인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주변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평안의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는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교회 나가려면 평안의교회 가세요.’라며 밀어주는 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이 계신지요. 우리는 그런 분들을 잠재적 교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자가 많은 교회, 불신자가 좋아하는 교회, 젊은이가 넘치는 교회, 연중 스포츠가 살아 있는 교회로서의 특징을 평안의교회는 가지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회란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공존할 뿐만 아니라, 빈부가 섞여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교회여야 할줄로 믿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교회에 와서 마음에 평안이 다가오고, 부자도 교회에 와서 감사를 잃지않는 교회가 좋은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이라고 한다면 진정 좋은 교회의 특징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진정 좋은 교회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되 예수의 복음이 강력히 증거되고,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아무리 듣기 좋은 얘기를 많이해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라면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선포되고, 그 십자가의 보혈의 말씀을 듣고 심령에 찔림을 받아 어쩔줄 몰라 "형제여, 어찌할꼬..." 고백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초대교회에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포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의 주된 메세지는 로마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로마교회에는 두 그룹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주로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이고, 또 한 그룹은 로마에 사는 로마인들과 외국인들, 넓은 의미의 이방인들이 중심이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삶의 스타일들이 너무 달라요.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매달아 죽인 짐승의 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더구나 생명의 상징인 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성경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방사람들은 뭐든지 잘 먹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성도가 저 성도의 식생활이나 습관들을 보고서 어떻게 그렇수 있느냐며 판단하고 비평하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그러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종종 벌어진 것입니다. 서로가 비난하고 비판하다 보니까 교회가 늘 평안하기 보다는 시끄러워요.

에베소에 머물던 바울사도가 그 소식을 듣고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먹고 마셔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상처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덕을 위해서 절제 할 수 없겠습니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어느 공동체나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책망하기 보다는, 그들을 우리가 관용하고 품에 안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뻐하실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은 종종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고 그들의 가족을 방문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별명을 붙여주기를 죄인들의 친구란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은 굉장히 정감이 있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왔노라. 그러면서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기를 기뻐하셨고, 죄인들의 삶에 늘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가셔서 죄인들과 같이 죄를 지신 것이 아니라 그 죄인들이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하지 못하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죄인들 속에 들어가서, 죄인들이 의인의 길로 가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주신 줄 믿습니다. 주님이 죄인의 친구라고 해서 오해하시면 안되요. 같이 가서 같이 죄짓고 그것이 죄인의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지금 십자가의 달리시는 문제 때문에 정말 기가 막힌 예수님의 앞으로의 장래가 십자가에 못에 박혀야 하는 그 엄청난 일을 위해서 주님은 마지막 기도하실 때 제자들 중에 제자들을 뽑아서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다오. 내 마음이 심히 곤고하도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다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주님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그렇게 흘렸다고 했습니다.

평안히 기도할 상황이 아니지요. 여러분, 요즘 수능을 앞둔 부모들은 평안히 기도할 상황이 아니지요? 그냥 간단히 기도가 됩니까? 그렇지 않을 걸요? 시험시즌만 되면 절에 무슨 합격기원이나 승진기원을 한다며 백일기도를 한다는 이미지가 좋지않아서 제가 수능을 앞두고도 특별기도회를 따로 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수험생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함은 성도로서 마땅한 일인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에 대해서 고민하시면서 중보기도를 요청하시고 기도하시다가 돌아와 보니까 제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어요? 쿨쿨 자고 있어요.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제자 중에 제자를 뽑아 가지고 온건데, 적어도 이 사람들이면 내 사역에 도움이 될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동행을 요청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얼마나 주님께서 안타까워 하셨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진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뭐라 그랬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성도여러분, 사람이 잘못 했을 때 막 소리를 지르고 그러는 것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격려를 하고 위로를 한다면 효과가 몇 배 더 큰 줄로 믿습니다. 지금 잠자는 제자들에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주님보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이 더 존귀하게 여겨지지 않으시는지요?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습을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준은 주님인 줄 믿습니다. 책망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세워주었을 때 베드로를 중심해서 제자들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면서 순교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까 여러분들이 옆사람을 보면서 말씀하셨듯이 이제부터는 당신을 좀 더 이해하겠습니다. 좀 더 당신을 이해하고, 좀 더 관용을 베풀고, 이해에 관용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되는대로 그냥 말을 했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말을 했어요. 집사가 기도도 안 하고, 권사가 전도도 안 하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는 그가 오죽하면 전도를 못 하고, 오죽하면 기도하지 못 했을까? 이해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내가 품에 안기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 입니까? 연약한 자를 세우는 공동체가 좋은 교회인 줄 믿습니다. 오늘 평안의교회 오늘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로마교회에 가셨던 그 귀한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평안의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연약한 자들이 많아,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속도가 늦고 우리의 목표가 더디다고 할 지라도 그들과 더불어서 함께 가면서 연약한 자를 세우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기를 다짐하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의 허물을 지적할 때 그만큼 주님은 마음 아파 하심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의 연약함을 보시고, 책망하시기보다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시고, 위로하시고, 주님 사랑으로 품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이 마음을 주셔서 연약한 자를 세우는 평안의공동체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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