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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선으로 바꾸사 선한 일을 하게 하신다 - 양선 (창 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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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양선은 하나님의 것

우리가 구원받은 그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 가시면 좋을 텐데 왜 우리를 이땅에 남겨 두셨을까요? 내 곁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으로 섬겨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행은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먹고 살 복이 됩니다. 때문에 이 땅에 더 살아 선행으로 그 복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선행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을 무척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너무 무서워요." 아이를 달래는 요령으로 "얘야, 예수님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신데 뭐가 무섭니? 지금 밖에도 예수님이 계셔. 너를 지켜 주실 거야." "진짜 밖에 예수님이 계실까요?" "그럼 예수님은 어디든지 계신단다. 네가 혼자 있을 때 언제나 네 곁에서 너와 함께 계신단다."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세요?"

신앙생활을 이 철없는 아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칭얼거리기만 하고 하나님이 다 알아서 뭐든지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 공동체인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선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선을 행한다" 이것을 양선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양선의 열매"를 나누어 드리려고 합니다. 양선이란 헬라어로 "아가도쉬네"인데 영어(NIV. KJV)로는 goodness-선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양선"이라고 했지만 표준 새번역에서는 "선함", 공동번역에서는 "선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문자적으로 양선이란 "선을 베푼다"는 뜻이지요.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자비의 열매와 양선의 열매는 형제 자매와도 같이 닮은데가 많습니다. 자비는 "선한 마음의 표현"을 말하고 양선은 "선의 행동적 표현"을 말합니다. 양선은 곧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자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양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선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편25:8)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훔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마태19:17)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 선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임재가 강력히 나타났을 때 가장 크게 맺혀진 열매가 바로 양선의 열매입니다.

초대교회는 양선의 열매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사도행전2:44)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힘껏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성도가 가는 곳마다 양선의 열매가 풍성했습니다. 어디든지 선행이 있었습니다.

II. 선악과 - 선행 불가 인생

처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지 완전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악을 알게 되면 선은 사라지고 악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까만 먹물 한 그릇과 깨끗한 물 한 사발이 여기 있습니다. 둘을 함께 부어 놓으면 노랑 물이 되는 게 아니라 까만 먹물이 되고 맙니다. 악과 선을 함께 부어 놓으면 마침내 선행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탄이 하와를 찾아와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이 얼마나 헛된 비전입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악을 생각할 필요도 느낄 필요도 행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선밖에 없었기에 선악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스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헛된 환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빛의 세계에서는 어두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미움이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선의 세계에서는 악이 무엇인지 알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악을 알고 나면 결국 선행이 불가능해 집니다. 죄는 알면 알수록 더 깊이 빠집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파괴되었습니다. 완전부패 전적타락입니다. 악이 인간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은 선과 악을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서로 미워하고 서로 질투하고 서로 비판하는 전쟁터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서로의 약점과 실수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서로 정죄하고 부정하고 고발하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아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선행불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다고요?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법이 필요없는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고요?

우선 그들의 선행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선하게 행동했는데도 상대가 더욱 악하게 나온다든지 그 선이 큰 손해로 되돌아 올 때 그 선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둘째 그들의 선행의 배후엔 더 큰 이기심과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때로 그들의 선행이란 자기 과시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결정적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선행,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선행은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종교의 영으로 발전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를 만들게 됩니다. 율법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사탄의 전략이었습니다. 인간의 선행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최악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III. 선으로 바꾸사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양선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빛의 열매라고도 했습니다.
성령충만과 함께 맺혀지는 열매요 빛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충만히 임할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란 요셉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머나먼 이방 땅에서 머슴이 되어 살아갑니다. 죄짓지 않으려고 하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애굽의 총리가 되지요.

요셉이 형님들 손에 팔려간 13년 뒤, 무대의 장면이 바뀝니다. 요셉의 형들은 온 천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갑니다. 총리대신 요셉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요셉은 이 장면에서 여러번 통곡을 합니다. 반갑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지난 세월이 억울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요셉이 울었다고 하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님들을 깨끗이 용서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이지요.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이 아름다운 선행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무엇이 이 멋진 선행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오늘 본문 창세기 50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벌벌 떨게 됩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동생 요셉이 우리를 형으로 대접했지만 이제는 가만히 안둘거야" 불안에 떱니다. 이때 요셉이 형님들을 용서하며 선포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요셉은 지금 하나님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악한 환경을 선한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악한 인간을 선한 사람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악한 성품을 선행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행하는 이것이 선이라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용서할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나를 바꾸셨으니 하나님의 마음으로 당신들을 용서하고 선행을 베푼다」 이것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큰 일이 바로 "바꾸시는" 일입니다. 사탄이 망쳐놓은 세상,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요셉이 악을 선으로 바꾸었다는 말은 구원론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내가 살아남으로써 또한 당신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장차 인간의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이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 말씀은 만민을 구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명의 부활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집니다. 사람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는 끔찍한 사형 기구가 아니라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로 바뀌어졌습니다. 전 인류의 평화를 상징하는 적십자, 병든 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녹십자로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저주와 질병,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바꾸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언제나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 말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바꾸어 주리라"하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선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찾아오십니다. 헌 것을 가져가시고, 새 것을 주시며, 못 쓰는 것을 가져가시고, 좋은 것, 귀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교회는 바꾸어 주는 집입니다.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가지고 오면 반드시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병든 자를 건강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패한 자를 성공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을 감사와 찬송이 많은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무능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를 천국의 귀한 자로 바꾸어 주십니다.
무거운 인생의 문제로 시달리던 사람을 오히려 남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능력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잠시 여러분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내게 찾아온 기회가 악하고 괴로워도, 지금의 상황만 보지말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선행의 열매를 맺고 나누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나를 통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IV.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았다.

「우리를 선하게 바꾸셔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신다」
이 일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 중 하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히 보내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에베소서2:10)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도서2: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세 살 다섯 살 쯤 되었을 때 아이들만 집에 두고 교회에 갔다오면 아이들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개발해서 놀곤했습니다. 이불장의 이불을 차례대로 쌓아 놓고 미끄럼틀 놀이를 합니다. 방바닥에 물을 부어놓고 비누를 풀어 스케이트 놀이를 합니다. 한 번은 아빠 면도기를 물속에 넣고 뱃놀이를 하는 바람에 비싼 면도기를 망쳐 놓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물건이 사용될 목적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미숙아나 어린아이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던 그가 영적으로 자라고 성령이 임하여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되면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구원받은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두 눈을 같이 사용하다가는 두 눈이 다 나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쪽 눈만 사용하다가 이쪽 눈이 나빠지면 다른 눈을 사용하자! 그래서 가죽끈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 눈이 나빠졌습니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가죽 붕대를 감아 놓았던 눈을 떠 보았더니 눈을 쓸 수 없게 되어 있더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동굴에 사는 물고기들은 눈이 모두 퇴화되어 있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속한 교회를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 전도의 사명을 가진 우리가 전도의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 구원의 문들이 닫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과 재능과 은사를 받고서 선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들이 허약한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너무나 고전적인 얘기지만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사해와 갈릴리 바다의 비교입니다. 사해 바다는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지 내보내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바다는 죽은 바다입니다. 생물들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많은 물들을 받아들이지만 계속해서 물을 내어 보냅니다. 때문에 거기에는 생명이 풍성하고 많은 물고기들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찾아와서 은혜를 받는 것 너무나도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귀한 일은 받은 은혜를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양선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내가 있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을 아껴 이웃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 때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섬기고 싶은데 교회 사역은 싫다고 합니다. 그럴순 없습니다. 그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섬기고 싶은데 다른 사람, 다른 지체를 섬기는 일은 싫다고 합니다. 그럴순 없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지체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공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구원받은 존재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역 그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선행입니다.

V. 선을 심어 선을 거둔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 땅에 와서 잘못한 것들만 모아 수 권의 책을 낸 반미주의 기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반미사상을 좀 더 체계화하기 위해 아예 미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미국에 살며 그 나라를 연구하다가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힘, 거대한 정신을 발견하고는 새롭게 책을 한 권 씁니다. 바로 오연호 기자의 「한국이 미국에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책입니다.

세계 최강을 건설한 미국의 정신이 무엇인가? Volunteerism - 자원봉사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섬김, 양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국민의 98%는 1년에 한차례 이상 기부 행위에 참여합니다. 1년에 4천만 명이 몸으로 자원봉사에 나섭니다. 미국 국민은 1인당 평균 70만원 - 총 1천 9백 억불을 기부 즉 돈으로 선행을 합니다. 청소년 시절 양선 활동의 경력이 모자라면 대학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자원봉사 꺼리를 광고하면 그 봉사를 신청하려고 사무실 앞에 줄을 길게 섭니다. 이런 모습을 가는 곳곳마다 보고는 이 반미주의 기자가 항복을 해버렸습니다. 얼마전 세계 최대의 부자들이 자신의 대부분의 재산을 자선사업(양선)을 위해 내어놓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빌 게이츠는 30조원을 워런 버핏은 자기 재산 85%인 37조원을.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요. 이처럼 기독교 문화는 양선의 문화입니다.

선을 심은 사람이 선을 거두고, 선을 심은 가문이 선을 거두고, 선을 심은 나라가 선을 거둡니다. 양선은 성령의 열매요 축복의 원리입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가운데 하나님께 바친 것만 남는다는 내용의 시 「키탄잘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떤 구걸하는 거지가 황금마차를 타고 오는 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흥분합니다. 저 님이 나를 찾아오시면 내 운명이 이제 달라질 거야. 그 님이 찾아와서 마차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면서 "그대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당황했던 거지는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 님에게 전달합니다. 동전을 받아 들고 유유히 사라져 가지요.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동전 주머니를 보는 순간 한 닢 동전이 번쩍 번쩍 빛나는 황금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합니다. "내 소중한 님에게 내 모든 동전 보따리를 맡길 수 없었던가?"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야 하는데 동네 어른들이 어려운 살림에 등록금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공무원 시험이나 치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그 후 참 긴 시간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교, 대학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도 여러 곳에서 무려 16-7년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닌데 제 돈으로 등록금을 내 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때는 장학금을 두 곳 세 곳에서 받아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가 똑똑하고 잘나서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고향 마을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던 권사님을 만났는데 류 목사는 목회도 평안하고 공부도 맘껏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나서 그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요.

첫째는 저희 할머님이나 어머니가 거지들을 잘 대접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배고픈 거지들이 저희 집에 오면 언제든 밥을 먹을 수 있었답니다.

둘째는 시골교회 많은 교역자들이 시무를 하고 지나갔는데 저희 집안 사람들은 항상 교역자를 잘 섬겼답니다. 호박 하나를 따도 목사님 먼저, 송편 하나를 빚어도 목사님 먼저- 목사님을 섬겼고 평생 교역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적이 없었답니다.

셋째는 제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어머님은 새벽기도 시간 날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그 열매로 류 목사는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만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말씀이었는데 제게는 계시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이게 양선의 신비입니다. 우리 부모가 뿌리고 내가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평안히 잘 먹고 잘 사는 것, 여러 가지 형통한 것 - 모두 내가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누군가 뿌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평생 도적질하여 먹고 살지 않겠습니다. 십일조는 떼어먹지 않고 살겠다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내 자식들이 먹고 살아야될 것, 내 이웃들이 먹고 살아야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고, 또 한번의 십일조를 떼어 구제와 선교를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감사 제물이 없는, 감사 헌금이 없는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 평생을 감사 예물을 먼저 바치고 하나님 앞에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즘은 매일 감사해서 매일 감사 헌금 쌓아서 일주일에 일곱 번 열 번 감사헌금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내 자식이 먹고 살아야될 양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으고 또 모으고 또 모으면 건축하는 기간동안에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천수림을 5그루 정도 한 것 같아요. 몇 년에 한번씩은 나 자신의 청빈을 하나님 앞에 보여 드려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아예 교회에서 단 한 푼을 받지 않고 몇 년에 한번씩은 그렇게 살아봅니다. 까마귀가 주는 것으로 살아보겠다. 한푼도 교회에서 주는 것을 받지 않고 1년을 살아봐요. 그런데 살만 해요. 나 자신을 다듬어 가는 것이지요. 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내가 먹고 살 될 양식이고 내 자식들이 먹고 살아야될 양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때가 더 풍성하고 부요롭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집이 한 평도 없습니다. 제 땅이 한 평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부자로 잘 삽니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농촌교회 목사님들 선교사님들이 저를 찾아오면, 친구들이 모여 밥을 먹으면 반드시 제가 돈을 냅니다. 밥 살 때마다 제가 돈을 냅니다. 평생 밥 사는 자리에서 돈을 내다 보니까 밥 사는 사람이 리더더라구요. 간단합니다. 친구 사회에서 리더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밥 사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 받은 은혜 감사하여 다시 하늘에 뿌리는 날입니다. 천국에 종자를 심는 날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나도 거두고 내 자녀들도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양선의 씨앗도 뿌리십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시고 내 환경을 바꾸시고 내 삶을 바꾸어 주신 것은 다시 양선하라는 뜻입니다. 선으로 바꾸사 선한 일을 하게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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