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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붙어있는 가지 (요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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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시래기’ 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원래 식용으로 쓰는 해조류를 가리키는 말인데 부산이나 울산 지방에서는 물고기를 부를 때 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 라는 속담에 나오는 망둥이를 가리킵니다. 망둑어라고도 하는데 길이는 약 20~40Cm이며 연한 회색으로 보통 때는 맛이 떨어지다가도 겨울이 되면 회맛이 괜찮습니다. 망둥이인 이 꼬시래기는 적응력이 아주 뛰어나 지구 어떤 곳에서도 서식합니다. 바닷물에서도 살고 민물에서도 살고 물의 온도가 높아도 잘 살고 낮아도 잘 사는 생명력이 아주 강한 물고기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자연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꼬시래기도 아주 귀한 어종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망둥이인 꼬시래기는 물고기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아주 흔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꼬시래기를 낚시하려면 미끼를 넣지 않아도 금방금방 물려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회로 먹지도 않았고 물고기로 취급하지도 않았으며 닭모이로 주었습니다. 때로는 닭모이로 주는 것도 괜찮아 낚시줄에 걸리면 뒤로 던져 버립니다. 그래서 낚시꾼 뒤에 가면 날아가는 꼬시래기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물고기이지만 이 정도가 되면 참으로 비참하고 처량한 존재입니다. 너무 안쓰러운 물고기입니다. 그래서 연애하다 장가를 갔는데 아내가 연애할 때 생각하던 사람과 영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꼬시래기에 물렸다고 말했습니다.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이든 간에 꼬시래기가 될 것은 아닙니다. 기왕 인생길에 나섰으면 귀한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는 이 꼬시래기와 비슷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포두나무 가지에 포도가 열리지 않는 쓸모없는 포도나무 가지이야기입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재배합니다. 상당히 잘 크는 나무이지만 좋은 포도를 얻으려면 아주 철저하고 세심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줄기가 얼마나 잘 뻗어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열매를 잘 맺게 하기 위해서는 또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합니다. 심을 때에도 간격을 띄어주어야 하고 3년까지는 열매를 따지 말아야 나중에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3년 뒤 다 큰 나무가 되었을 때에도 순간순간마다 가지를 솎아주어야 합니다. 주부들은 솎음배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땅이 아까워 배추를 가깝게 심지만 나중에 좋은 배추를 얻기 위해서 자꾸 솎아내는 것처럼 이 포도나무 가지도 적당하게 솎아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포도나무가 다 버리게 되고 포도원이 못쓰게 됩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 외에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런 나무는 불 떼는 나무로도 쓰지 못하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이 나무는 그냥 불에 태워 없애야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성전 제사를 드릴 때 포도나무의 나무는 성전에 불 때는데도 쓰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포도나무는 포도열매 외에는 다른 어느 것도 쓰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2절에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거해 버린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나무이고 하나님의 포도원이었습니다. 성경 이사야 5장7절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라고 말씀하시고 호세아 10장 1절은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시편 80편 8절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스스로도 자기들은 포도나무인줄 알았고 또 포도원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포도열매를 맺기 위해서, 포도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의 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도 틀림없는 포도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어느 틈에 그들은 포도라고는 그 열매를 구경도 할 수 없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포도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원을 지켰어야 했는데 나중에 보니 포도나무가 아니고 포도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수풀 가운데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열매가 맺지 않아 쓸데없는 포도나무가 되어 할 수 없이 불에 던져 땔감이 되게 한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고 장탄식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하게 사랑하셔서 포도나무로 정했고 포도원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포도나무도, 포도원도 아닌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어 어쩔 수없이 버려서 불에 태울 수밖에 없는 그런 민족,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두려움으로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새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을 새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까? 이것은 옛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옛 이스라엘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대신 새 이스라엘을 세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옛 이스라엘을 버렸습니까? 포도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새 이스라엘을 정하셨습니까? 포도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도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챙겨주셨습니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울타리를 만들고 망대를 만들어 못된 것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습니까? 갖가지 복을 주셨고 갖가지 다 챙겨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두려움을 가지고 기억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대한민국에게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셨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왜 우리 가정이 이렇게 복을 받고 살아가는가? 우리 교회가 왜 그렇게 큰 복을 받게 되었는가? 여러분, 먼저 주셨습니다. 앞으로 좋은 열매가 나올 것을 기대하시면서 이렇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두려움을 가지고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옛날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그래서 불에 태울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날 또다시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쓸모없는 포도나무가 되어서 버려진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을 두려움을 가지고 기억해야합니다.

또 하나는 아주 틀림없는 사실로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과거에 쓸모없는 포도나무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지금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옛날 이스라엘처럼 열매가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옛날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포도나무였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포도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금은 포도나무라도 앞으로 포도나무가 아닐 가능성, 변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두려움을 가지고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봉사하는 틀림없는 포도나무였는데 어느덧 세월이 조금 지나서 보니 포도나무가 아닌 사람이 우리들 속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참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보아야할 것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쓸모없는 포도나무가 될 때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것을 다 모아 불에 태워 없앤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꼬시래기를 버리는 일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런데 낚시꾼들은 가차없이 버립니다. 마태복은 22장에서 각각 어두운데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자비하신 우리 주님께서 가차없이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6절에도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경건한 소위 신앙이 좋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한 존재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참 좋은 열매를 맺을 것 같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포도나무 아닌 나무가 되고, 열매 없는 나무가 되어 바깥에 버려져 불태워지는 비참한 일들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농사짓는 방법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입니다. 나무를 번식시킬 때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씨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나무로 하는 방법으로 대표적으로 접붙이기나 휘묻히기가 있습니다. 휘묻히기는 줄기가 길면 줄기를 당겨서 땅에 묻는데 그렇게 되면 본래 나무에서 영양분을 받아 땅에 묻혀있던 곳에서 뿌리가 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나중에 자생력이 생겼다고 생각되면 잘라 새로운 한 그루의 나무가 됩니다. 이렇게 번식시키는 나무에는 뽕나무, 석류,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접붙히기가 있는데 접붙히기는 아주 튼튼하고 생명력이 강한 나무를 모나무로 씁니다. 그리고 감을 얻고 싶다면 좋은 감나무의 눈을 붙이거나 가지를 잘라 붙이면 생명이 강한 나무에서 감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방법을 쓰는 경우는 고염나무에 감나무를 접붙히고 탱자나무에 귤나무를 접붙히고 찔레나무에 탱자나무를 접붙히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생명이 강한 감과 귤, 탱자가 나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포도나무 접붙히기를 했는데 포도가 열리지 않아 이유를 알아보니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있지 않고 떨어졌던 것입니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홍해를 건너게 해주셨고, 적군이 쳐들어와서 기도할 때마다 이기게 해주셨고,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어 살게 해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인줄 알고 그렇게 하셨는데 그들은 어느 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고, 당신에게 붙어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잘 붙어있는 줄 알고 이것도 챙겨주고, 저것도 챙겨주셨는데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말만 하나님의 백성일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기만 했다면 하나님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 평화의 열매를 맺고 화목의 열매,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께 붙어 있기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는 열매는 미워하고 분쟁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 않아 알아보니 그들은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을 사랑하지 않아 알아보니 그는 가정에 붙어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내 가정을 돌보지 아니하고 세상만 돌아보고, 내 가정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하나님을 의식할텐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만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께 붙어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당연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정말로 내 아내라면, 내 남편이라면 당연하게 내 남편을, 내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는데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는 경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그 남편에게, 그 아내에게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는 경우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속해져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 눈치보고 저 사람 눈치보는 사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주 추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속해있다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을 신경쓰고 사람들 눈치보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지 아십니까? 이것은 치매도 잘 걸리고 정신분열이 잘 걸립니다. 여기저기 신경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참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예수님 한 분만 신경쓰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도록 되어 있고, 그 사람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렇지 아니하고 이 사람 저사람 눈치보니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해있으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얼굴이 온화해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겉모습도 아름다운 사람, 푸근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더 추한 몰골이 되는 경우에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속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해있으면 아름다운 인생, 멋진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점점 더 추한 인생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실존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제는 자동적으로 사랑하고, 하는 일마다 평화의 일을 만들어내고 사람과 화목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멋진 인생이 되는가?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봉사할 때 힘들었던 예전과는 달리 행복하고 어떻게 하면 봉사자체가 기분이 좋고 늘 행복한 인생이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참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고 명쾌하게 대답하십니다. 좋은 포도나무로 출발한 유대인들, 이스라엘이 어느 틈에 황폐한 포도나무가 된 것은 처음에는 참포도나무에 붙어있다 어느 틈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은 혹시라도 거짓 포도나무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쓸모없는 포도나무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참포도나무에게 붙기만 하면 참포도나무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참포도나무가 바로 당신이라고 너무나 쉬운 말씀을 하십니다. 1절의 나는 참포도나무 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도 참포도나무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계속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수많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임금을 삼으려고 했고, 모시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틈틈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에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찾아와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 시간만큼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끝까지 참포도나무이었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오고 수만 명이 모였을 때에도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있기 위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내셨습니다.

여러분, 아프실 것입니다. 힘든 일, 할 일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붙어있으십시오. 거기에 구원은 물론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힘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참된 순종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봉사를 해도 진정한 봉사를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간에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붙어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기도하면 응답받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구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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