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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시 5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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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Ⅰ. 본문 해설

본편에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곧 이 세상의 인간들을 향한 도덕적 통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백성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목적을 구현해 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도(道)와 덕(德)으로 이루어집니다. 도(道)가 인간 존재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선(善)과 악(惡)의 기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덕(德)은 거기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려는 인간 영혼의 올바른 힘입니다. 인간은 영혼의 올바른 힘 안에서 선을 택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덕스러운 삶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구현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영혼이 이러한 올바른 힘을 갖는 유일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혼의 힘을 강화하는 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선택받은 언약 백성들은 이러한 삶을 사는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와 예배는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며 살아야하는 충심(忠心)의 삶을 대신하는 수단으로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다윗의 고백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시 51:16). 헌제자(獻祭者)의 마음과 삶, 하나님을 공경하는 경배의 정신이 없는 제사 행위가 하나님께는 너무나 가증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시 50:7-8).

Ⅱ. 진정한 제사, 감사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제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제사가 감사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더욱이 이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너무나 당연한 당신의 존재방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2-13).

A. 개념적 감사와 체험적 감사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감사는 단지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영혼의 움직임입니다. 감사는 그 본질에 따라 둘로 나뉩니다.

1. 개념적 감사

첫째로 개념적인 감사입니다. 이는 단지 이성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감사의 의무를 알고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난 좋은 일을 단지 이성적으로 발견하고는 그것을 곧바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변화도 감사하는 당사자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어떤 감흥(感興)은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마음도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영혼의 힘찬 움직임에서 나오는 감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깊은 변화를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감사를 통하여서는 충분히 영광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때로는 이런 이성적인 감사가 놀라운 감정의 분위기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행동을 찬양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출 15:11-12). 그러나 사흘 후, 물이 부족한 상황이 되자 그들은 마라에서 쓴 물을 인하여 곧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 15:24). 그 놀라운 감사의 찬송이 울려 퍼진지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무지(無知)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개념적 감사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던 인파의 감사 찬송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들어오시는 길 앞에 겉옷을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깔았습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 그들의 이 찬송 속에는 감사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주린 자를 먹이시던 그 기이한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할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 오는 감사의 찬송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렬이 찬송하여 온 성을 소동케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위대한 선지자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가져온 찬송이었습니다. 그 감사는 영적인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념적인 감사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감사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감사에는 그 사람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적 감사에는 이러한 쇄신의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감사는 영적감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체험적 감사

둘째로 체험적 감사입니다. 이는 단지 이성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것 이 아닙니다. 체험적 감사는 단지 이성적으로만 감사의 조건을 파악하거나 곧 사라질 감정만의 감사가 아닙니다. 체험적 감사는 전인격적이고 영혼을 쇄신시키는 힘이 있는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자신과 자신을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정당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대한 확장된 이해가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신의 악함,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자신의 무능, 그의 영원하심과 자신의 존재의 덧없음을 대비함으로써 마음과 영혼을 깊이 휘젓는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를 경험적 감사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감사의 조건이 되는 사건을 경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회고(回顧)하는 방식이 경험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감사의 경험은 전 인격적이며 전 존재적인 감사로서 영혼과 마음을 쇄신시키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 감사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감사를 기도, 간구 등과 함께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혜의 방편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러한 감사는 우리 속에 있는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려고 하는 영혼의 경향성을 약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이 감사를 은혜살림(vivification of grace)의 방편으로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영혼으로 살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습니다. 청교도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게 있어서도 이 감사는 매일매일 실천해야할 경건한 헌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 세상에 사물의 질서들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맞도록 설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 밖에 있는 사물의 질서들이 우리의 마음에 맞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기뻐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 낙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모든 사물들의 질서 너머에 계신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 자신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행하심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려는 그 뜻의 궁극적 성취를 즐거워하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자신의 행복을 합치시킨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정하신 창조목적인 선에 모순되게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모순되게끔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관성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불변하신 성품에 기초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 밖에서 찾고, 자기의 행복을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께 합치시키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을 받으며 항해하는 배가 순탄한 항해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같은 삶의 목표를 가질 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으로 다가오게 되고, 우리의 마음 안에는 그 선하심에 대한 감사가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적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영혼의 작용입니다. 이런 감사의 과정을 통해 자기 안에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소욕(所欲)들은 죽고,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며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원치 않는 상황 속에서 마음에 괴로움이 가득할 때에, 생각을 정돈하고 심령을 모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가져옵니까? 혼란과 불만으로 가득 찬 채 계속되어오던 삶을 소망과 기쁨으로 바꾸는 지도리(pivot)가 되게 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여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B. 전 삶을 동반한 감사

이어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14절). 시인은 여기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서원을 갚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제사가 종교적인 의뢰라면, 서원을 갚는 것은 실제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전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헌제자와 제물이 일치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축소판인 제사는 헌제자가 제물을 드리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 제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제사 자체가 헌제자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헌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살다온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하는 삶이 그의 본성을 포함한 전 존재와 나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성경에서 이 서원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좁은 의미의 서원과 넓은 의미의 서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째로, 좁은 의미의 서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개인적으로 서약함으로써 맹세하는 것입니다. 어떤 헌신이나 특정한 행동을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러한 약속이 공동체 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교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맹세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맹세를 어기거나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더욱이 고의적으로 자신이 그 맹세를 깨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양심을 거슬러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깔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를 매우 주의하여야 하며, 서원한 것들은 자신에게 해가 될 지라도 반드시 갚으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막 대하는 것이 되며, 이러한 노골적인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무시는 그의 영혼에 심각한 피해를 남깁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약속한 바를 노골적으로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자이기에 그 스스로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노골적으로 불이행하면서 시간을 끄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로, 넓은 의미의 서원입니다. 이 서원은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약속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행동 그 자체가 이제는 하나님께만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모든 신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함으로 자신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후자가 포괄적인 서원이라면, 전자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서원입니다. 이 후자의 서원 역시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갚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영혼에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비록 개별적인 서원은 갚지 않은 것이 없다 할지라도, 구속의 은혜에 합당하지 않도록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의 영혼이 곤고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사람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찬양과 경배의 노래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또한 그런 감사의 찬양을 통해 그의 영혼이 쇄신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상을 향하여 은근히 남아있던 사랑의 부스러기들이 떨어져나가고 마음은 순결해지며, 하나님께 온전한 복종의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 뜻과 은혜를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도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다른 모든 은혜의 법칙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체험적이고 진실한 감사 역시 은혜 세계의 다른 부분들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께 드려 최선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Ⅲ. 감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권

이어서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 존재로서 감사드리는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특권을 밝힙니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15절). 감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특권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며, 이러한 친밀한 교통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시인이 본문 속에서 말하고 있는 환란 날이란, 사물들의 질서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그것이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오게 되어 무엇인가 괴로움을 당하며 싸워야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로 인하여 이런 환란을 만날 때도 있고, 죄는 없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연단을 받을 때도 이러한 환란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환란을 불이나 물, 혹은 폭풍 등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러한 환란은 환경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러한 환란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들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환란은 환경에 변화를 일으킴과 동시에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첫째로, 환경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고통스럽게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 땅의 자원이 많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많은 물질들을 필요로 하며, 때로는 엄청난 시간과 강인한 정신이 요구됩니다. 이런 환란 속에서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자원을 요구받게 되고, 이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을 때 그는 파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자들에게 이 환란을 감당할 자원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환란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풍부한 공급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 자신의 전 삶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환란 가운데 부르짖는 그 신음을 특별히 유의하십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독점(獨占)적인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특급으로 배달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사는 사람들이 환란 날에 받게 되는 특권입니다.

둘째로, 내면의 변화입니다. 변화된 사물들의 질서는 변화된 내면의 질서를 가져옵니다. 사물들의 질서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일 때, 신자의 내면에는 그로 인한 고통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환경적 질서의 변화가 세상의 자원을 필요로 한다면, 내면의 질서의 변화는 하늘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이 환란을 당하게 되면 실은 이 땅의 자원보다는 하늘 자원의 공급이 더 절실해집니다. 언젠가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십억의 재산을 가진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 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 사람은 자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전 재산을 정리해보니 남은 재산이 사십억 원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분명히 환경적인 질서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충분한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음을 택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무너진 내적 질서를 바로 잡아줄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환란 날에 고통 하는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이는 명백히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고통당하는 날에 하늘의 풍성한 자원을 경험하고, 그것으로써 이 세상 자원의 부족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솟아나는 내면의 깊은 위로, 극복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하늘을 열고 부어지는 그 놀라운 지혜의 빛, 고통 속에서 산산이 깨어질 사람들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보듬고 극복하게 하는 천적 사랑의 능력, 그리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불굴의 정신 같은 것들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놀라운 하늘 자원들이 부어질 수 있습니까?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겉으로만 바른 생활을 하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자에게 이러한 축복이 주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환란의 날에 울부짖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는 없습니다. 환란의 날에 그들의 입은 다물어질 것이며, 그들의 혀는 천정에 붙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앙모(仰慕)하고 그 뜻대로 살려는 모든 사람들은 그 환란의 날에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 위기 가운데 놓였을 때에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 분에게 이 세상은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받는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셨고,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성취되지 못한 현실을 보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보며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내면의 세계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복은 17장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으로서 고난을 앞두고 드리는 그 긴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눈앞에 다가오는 육체의 고난보다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한 기쁨이 그 분의 심령 속에 가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며 사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 전체는 고난과 시련, 환란으로 잇대인 삶이었으나, 그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기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그 놀라운 평강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어지는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으로 시련들을 이기며, 당신에게 고통을 준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오늘날,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는 반드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용납할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환경을 향한 불평은 하나님을 향한 불평을 배태(胚胎)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어그러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사람과 사물들의 질서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평과 불신앙은 다시 속박의 올무가 되어 우리의 영혼의 자유를 앗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환란의 날을 극복할 하나님으로부터의 충분한 공급이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수많은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으며, 자신을 위해 은밀히 무언가를 감추고 하나님을 향해 인색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유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복종할 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치열한 환란 날에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감사하는 자에게 환란의 날에 응답이 되십니다.

Ⅳ. 감사로 나아가자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겨우 개념적 감사밖에 드리지 못하는 처지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개념적인 감사가 당신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감사라면, 그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체험적인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삶 자체가 전적으로 전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향하여 각기 품었던 두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밖에서 어떤 행복을 찾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 행복이 있음을 믿고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바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즐거워하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셔서 후히 누리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자원들은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만 사용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 “십자가로 평화를 이루심(롬 5:10)”을 듣고 실천 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두 가지 감사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특히 개념적인 감사의 경험에 대해 나누어봅시다.
3. 체험적 감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체험적 감사의 경험이 개념적 감사의 경험과 어떻게 다른지 서로 간증하여 봅시다.
4. 감사의 실천이 우리의 영혼을 놀랍게 쇄신시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5. 감사가 일상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은혜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회개와 감사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봅시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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