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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그렇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합 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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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까이 지내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이 상처를 하였습니다. 60대 초반의 사모님이 투병 끝에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아들과 딸 남매가 있는데 둘 다 다 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목사님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습니다. 제 전화를 받자마자 울기부터 하셨습니다. 아주 많이 힘들어하고 계셨습니다. 내일 만나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고 하자 내일 아들 내외가 프랑스로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딸은 아버지 걱정 때문에 한 달을 더 있는다고 하지만 한 달 후면 딸도 결국 미국으로 떠날 것입니다. 60대 중반의 영감 목사님이 덜렁 사택에 혼자 남게 생겼습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낮에는 그래도 이런 저런 교회의 일로 정신없이 지낼 수 있겠지만 하루의 일을 끝내고 아내도 자식도 손자도 없는 빈집에 들어갔을 때 느껴질 그 외로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내가 그와 같은 일을 당한다면 나는 과연 어떨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과연 건강하게 보람 있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당연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건강하게, 보람 있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아내와의 결혼이 내년이 30년입니다. 아내는 결혼 때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팔불출 같은 소리입니다 만은 결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아들 셋이 다 잘 자라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저와 친합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잘 못하리만큼 무뚝뚝한 아버지이지만 아이들이 멀리하지 않고 좋아해 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나는 지금 큰 아들 내외와 손녀딸과 함께 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예쁩니다. 손녀 민희는 조금 더 예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퇴근하여 집으로 갈 때마다 마음이 바쁩니다. 속으로 민희야 할아버지 간다를 외치며 달리는 차에서 뛰듯이 집으로 갑니다. 일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기다리는 시간에도 마음이 바쁩니다. 당연히 집에 들어서면 손녀부터 안습니다. 올해는 정말 민희 때문에 제 인생 최고의 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내년 미국 유학을 위하여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큰 아들 내외와 손녀와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대략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과 며느리가 떠나는 것도 힘들지만 그보다 손녀 민희가 내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둘째 아이와 셋째 아이가 있지만, 늘 결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내 손에서 죽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또한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에 하나 내가 늘그막에 우리 선배 목사처럼 자식들이 다 내 곁을 떠나 살게 되고 아내마저 나보다 먼저 하나님께 가서 퇴근 후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야만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나는 건강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여전히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어디 쉽겠습니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내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불현듯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아내가 있고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사랑하는 손주들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존재이고 저들이 없다면 하나님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감사하는 것을 지금부터 훈련하고 연습하지 않는다면 저는 내년 손녀 민희가 내 곁을 떠날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할 겁니다. 비참하게 무너질 것입니다. 평생 믿고 설교하였던 하나님은 여전히 내 곁에 계셔도 하나님은 내게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저는 무너질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나의 삶은 사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잘 모르지만 저는 스스로 다른 것은 몰라도 믿음 하나 만큼은 비교적 괜찮다는 생각을 평소에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후배 목사 하나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리더쉽을 분석하면서 저에게 ‘목사님은 믿음의 은사를 받으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 해 주었을 때에도 저는 스스로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잘 믿는 사람 중에 하나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생각하는 문제는 그와는 좀 다른 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믿어지느냐 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졌을 때에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흔들림 없이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쉽게 찬양하듯 정말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고 하는 면에서는 저는 아주 조금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면에서 생각해 보면 저는 여전히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이와 같은 생각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신앙의 철이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철이 들었느냐 철이 아직 들지 않았느냐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혜와 감사를 알면 철이 든 것이고, 은혜와 감사를 모르면 철이 안 든 것입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특징은 은혜와 감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와 감사는 당연한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다 당연하지 않은 일입니다. 때문에 저들의 마음에는 늘 불평과 원망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늘 불행합니다. 철없는 아이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의 대부분은 철없는 아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들은 당연한 것으로 특별히 감사한 마음이 평소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냐고 누가 물으면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그런 것들이 늘 하나님의 은혜로 느껴져서 감사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는 것이 만만치는 않지만 그래도 굶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 별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병이 들고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평소에 건강하게 지낼 때 그것이 고마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평소에 건강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게 되면 그때 어쩔 줄 몰라 하고, 삶의 의미와 보람 그리고 건강을 송두리째 잃어버리지만 그렇게 귀한 사람과 평생을 살면서도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선 저와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수준에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 속에서 늘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외양간의 소가 없어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나중이고, 먼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 때, 외양간의 소가 있을 때, 우리에 양이 있을 때 그것만큼은 확실히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기 이전에 있는 것 때문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정말 우리가 잘 아는 오늘 본문 말씀에 도전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모님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선배 목사님을 보면서 새로운 도전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박국 선지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끊어졌을 때에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와 같은 불행이 나에게 닥쳤을 때에도 건강하게, 보람 있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행복은 감사에 있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행복하다고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철이 덜 들면 행복해도 그것을 당연시 하지 그것을 감사해 하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누구나 다 행복해 집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면 항상 기뻐하며 사는 삶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최고의 감사는 죄 사함과 구원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는 시편 32편 1절의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인지 압니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몸과 삶으로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죄가 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씀을 그냥 머리로만 알 때에는 그 죄가 나에게도 있다는 것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도 나 정도는 양호한 편이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씀이 몸으로 실감되면서부터 표현하기가 어려우리만큼 절망적이었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해결할 수 없는 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흰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처럼 나에게 귀한 것은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감사는 아내가 결혼할 때보다 더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퇴근 때마다 ‘민희야 할아버지 간다’를 외치며 달리는 차에서 뛰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감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힘으로도 눈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죄악에서 나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깨끗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0절 이하에 보면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금 그릇과 은 그릇이 귀한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이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금 그릇과 은 그릇이라고 무조건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질그릇이라도 깨끗한 그릇을 쓰신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랍니다.

저는 그릇이 깨끗하지 못하여 전혀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깨끗케 하여 주심으로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저는 요즘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을 준비하며 참 행복합니다. 그와 같은 일에 제가 쓰임 받는 다는 것이 주는 행복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다는 것과 우리에 양이 있다는 것과 외양간에 소가 있다는 것과는 수준과 차원이 다른 행복입니다. 사람은 소유가치가 높을 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을 때 잘 사는 것입니다. 행복한 것입니다. 존재가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에만 생겨납니다.

필립핀에서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으로부터 필립핀에 아름다운 곳에 실버타운을 지는 것이 요즘 유행이랍니다. 한달에 200만원 정도의 생활비만 쓸 수 있으면 그림 같은 집에서 밤낮 골프를 치면서 가정부를 두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실버타운을 짓는 분들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저 한두 달 행복할 겁니다. 친구나 친척들이 방문하여 부러워할 때만 행복할 겁니다. 한두 달이 지나고 친구와 친척들이 떠나게 되면 외로워 질 것이고 불행해 질 겁니다.

늙을수록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모델로 삼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전에 수도육군통합병원이 있던 근처에 우리 교단이 운영하는 실로암 안과 병원이 있습니다. 무료 개안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입니다. 이 병원의 초대원장님은 이 장로님이라는 분으로 이대병원의 교수로 계시다가 정년퇴직하신 후 실로암 병원이 개원되자 원장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분이 무보수로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평생 교수로 계시다가 은퇴를 하셨음으로 연금이 나오셨고 자기 생활은 연금으로 충분하다며 무보수로 원장일을 보아 주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꼭 그렇게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젊어서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어느 때가 되어서는 젊어서 열심히 번 돈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어서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것도 힘들지만, 젊어서 돈을 제법 번 사람이 늙어서도 돈 욕심 때문에 그것을 놓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돈만 벌다가 죽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추한 일입니다. 아니 어리석은 일입니다.

삶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면 젊어서는 돈을 잘 벌고 늙어서는 그 돈을 잘 쓰다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젊어서 쓰지 않고 무조건 버는 것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물론 늙어서 자기 앞가림을 하지 않고 무조건 다 쓰면서만 사는 것도 안 되겠지만 아무래도 젊어서는 자신의 노후를 위한 준비가 중요한 때이고 노후는 젊어서 마련한 것을 베풀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근사하고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돈이 있으면 쓰는 것이 아름답지만 사실 돈이 없어서 늙어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하면 많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나름대로 몫 지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몫과 자식들의 몫을 구분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가 노후에 살 수 있는 몫도 준비하고 떼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몫은 이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할 때에 나름대로 계산해서 떼어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나름대로 정한 자식의 몫은 자식에게 주겠지만, 제가 나름대로 정한 저와 제 아내의 몫은 죽을 때까지 가능하면 다 쓰고 죽고 싶습니다. 그리고도 남는 것은 다시 다 하나님께 드리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다면 남는 것이 별로 없이 그 동안 잘 써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에서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모님을 먼저 하나님께 보내드리고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선배 목사님과 훗날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나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생각하고 찾아낸 묘안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 죽을 때까지 죽도록 충성할 일은 세상에 깔렸습니다.

오래 전에 설교 중에 한 번 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인 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있습니다. 일반 학교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소위 문제아들이 모인 학교였습니다. 선생님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 아이들이 마음을 잡아 높은 대학 진학률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수위를 하셨던 분은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전직 학교 교장이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를 찾아가서 그 장로님을 직접 만나 뵌 적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근사한 일 아닙니까? 저도 꼭 그렇게 제 인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수위셨으니 저도 인생을 수위로 마치면 참 근사할 것입니다. 전 정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합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있을 대 사람은 행복합니다. 저는 요즘 보이지 않은 성전 건축을 생각하며 참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가치 있는 일을 찾았다라고 생각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일에 제가 젊어서 모을 수 있었던 재산의 일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재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아마 제가 중요한 책임을 맡고 이 일을 진행하게 될 겁니다. 아마 제가 높은 뜻 숭의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을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나 제 꿈과 소원은 그 사역에서 앞에서 말씀드린 세인 고등학교의 수위 장로님과 같이 나로 그 사역의 문지기 같은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에 양이 있고 외양간에 소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이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나님은 제게 그렇게 해 주실 겁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제가 말 한대로 살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생명을 걸만한 하나님의 일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그렇게 헌신하며 살 수 있다면 하박국 선지자처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건강하게 보람있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죽어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 겁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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