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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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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모든 추수가 끝나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파종하고 모낼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겨우살이 준비를 지나 새로운 날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주간 저는 중국 길림성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벌써 영하의 날씨를 오가고 있고 하루걸러 눈이 내려 온통 하얀 물결로 가득합니다. 이미 추수를 다 끝냈으니 긴긴 겨울을 맞이하는 마음들이 어떻게 생각하면 푸근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현실들을 볼 때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우리네도 이제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런 날씨 속에서도 교회 김장을 위해서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그리고 저를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여 주신 두 분 장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특히 말씀의 승리를 위해 시간 시간 기도해 주신 모든 성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어둠의 세력에 억눌려 있던 심령들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며 그저 감사한 것뿐입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가 무엇으로 인해 하나님께 송축 드려야 할까요?

먼저 거룩한 이름을 송축해야 합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갖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기에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 형상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고 그 앞에 절하며 섬기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아니 사탄이 그만큼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 하나님입니까?
첫째로 야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참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고 믿기 보다는 엉뚱한 거짓 것에 속아서 거기에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의 삶의 풍요로움도 누구로부터 주어집니까?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돼지 대가리를 가져다 놓고 거기다 절하며 사업이 잘되기를 빕니다. 며칠 전 수능 시험만 해도 그렇습니다. 엿을 사다가 시험장 문에 붙여놓고 빌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보았습니다. 또 절에 가서 부처 상 앞에 절을 하며 빌고 있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잠언 16장 3절은 말씀하고 있으며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잠언 16장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엉뚱한 데로 다니면서 그 길을 찾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아니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그 길을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아 섬길 수 있기에 감사한 것이요 그 하나님을 우리는 송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고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자녀를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용서받을만한 자격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을 송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었는데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 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찌 우리가 송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송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송축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번 중국 길림성 매하구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면서 아주 뼈저리게 실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곳에는 공식적인 교회로서의 삼자교회와 비공식교회인 가정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교회를 이끄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집사나 권사님들이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은혜는 알고 뜨거움은 있는데 그들 자신부터가 말씀의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들 자신도 그렇고 그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성도들 역시 말씀에 목말라 있습니다. 아니 말씀에 목말라 있다 보니 얼마나 사단의 세력에 억눌려 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전하는 그분들부터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몇 백 명씩 심지어는 천명 가까이 모이는 교회도 있는데 인도하는 분이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냥 파김치가 되어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물질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활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될 예물조차도 제대로 드리지를 못합니다. 아니 드리지 못한다기보다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누구도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주님께 드리라고 가르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인도하는 분들부터가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라고 가르쳤다가는 큰일 나는 줄 알고 있으니 어찌 가르칠 수 있겠고 가르치지를 않으니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 않고서야 어찌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계속해서 가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도하는 분들에게 생활비를 드리는 것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아니 드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생활비를 받으면 삯군 목자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말씀이 왜곡되고 있으니 가르치는 분들도 힘들고 배우는 사람들은 또 말씀의 깊이가 없으니 점점 더 세속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물은 놔두고 너희만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한 것과 똑같은 모습이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고 현실이었습니다. 은혜는 믿음으로 받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예배하신 복은 주님께 드림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설사 안다고 해도 그걸 전했다가는 삯군으로 몰릴까봐 두려워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가 얼마나 교묘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말씀을 모르면 열 처녀의 비유를 전하면서 그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신부가 아닌 들러리라고 하니까 수군수군합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열 처녀가 신부가 아니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그들이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배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깊이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배우고 깨달은 만큼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어서 망하는 일이 우리에게 없어야 합니다. 연약하다고 해도 말씀대로 실천하고 따르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죄 가운데 묶어 두려고 하고 병으로 고통당하게 만들며 파멸 가운데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로 우리에게 관을 씌워주신다고 했으니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은 은혜와 충만한 복으로 넘치게 하시기 위해서 몸소 저주를 받고 채찍에 맞아 주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을 송축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을 송축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은 소원을 품어 기도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구하는바 소원을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를 이렇게 살기를 바란다고 하는 소원이 우리들에게 다 있습니다. 그 소원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로 14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가지고 기도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원망할 것도 없고 시비할 것도 없이 그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런데 소원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하나님 앞에 아뢰지 못하고 있거나 하나님께 아뢰기는 해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힘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면 우리는 날마다 새 힘으로 넘쳐날 줄로 믿습니다. 이번 중국 사역만 하더라도 얼마나 피곤한 몸으로 시작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도 철야를 하도록 만드셔서 인간적으로 본다면 아주 파김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몸으로 대련에 도착해서 한 시간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는 다시 밤새 아홉 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옮기게 하셨습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대련에서 강의를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신학교가 공안 당국에 신고가 돼서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러 오기로 한 학생들조차도 대부분 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초 계획과는 달리 그곳을 떠나서 북쪽으로 옮겨 현지 교회를 돌아보고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불평도 하지 말라고 제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무언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구나 생각하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현지 교회를 돌아보고 가장 약한 가정 교회에서 집회를 시작하는데 제가 준비해 간 강의안은 그곳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데 자그마치 한번 시작하면 보통 4시간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저도 놀랐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정말 하나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처음에 조선족 가정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됐는데 완전히 까브러져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저에게 힘이 넘치게 하시면서 그들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하는데 한 시간 전하고 나니 그들 얼굴에 생기가 돌기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말씀가운데 그들의 얼굴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들이 말씀을 빨아들이는데 얼마나 놀랍던 지요. 오후에 잠시 중국인 삼자 교회를 들렀는데 삼자 교회라고 하면 그저 정치로 물든 가짜 교회인줄만 알았는데 그 교회는 영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였습니다. 여자 장로님이 교회를 인도하시는데 그분부터가 문화혁명 때 기독교인들이 다 잡혀가 죽을 때 혼자서만 살아남은 분이었습니다. 너도 하나님을 믿느냐고 공산당이 묻는데 젊은 새댁이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구먼 하고 풀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만 살아남아 신앙을 지켰는데 1980년에 개방이 시작되면서 삼자교회를 시작하게 될 때 그가 일어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1000명이 모이는 교회가 됐는데 자기가 키워낸 젊은이를 신학교에 보내 목사를 만들어 그에게 교회를 다 넘겨주고 새롭게 개척을 시작하여 지금 몇 년 만에 다시 천 명이 모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부의 간섭이 있기는 해도 그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려고 애쓰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그래도 말씀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분이라 저희를 만나더니 잠시라도 좋으니 말씀을 전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 지도자급의 성도들을 급히 열락을 해서 모이는데 금세 이십 여명이 모여서 얼마나 말씀을 달게 듣던 지요? 그런데 그 교회 역시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될 예물과 말씀을 인도하는 자를 모든 좋은 것으로 섬기는 일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담대히 그 말씀을 전하니 자기들이 그 말씀을 알지 못했노라고 이제부터는 힘을 다해 섬기겠노라고 다짐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감사하던 지요?

다시 돌아와 다음날부터 사랑의 교회라고 하는 조선족 교회에서 수요일 목요일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떠나는 날까지 거기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했지만 또 다른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도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해서 목요일로 집회를 마치는데 처음에는 중국 돈 일원 이원도 제대로 주님 앞에 드리지 못했다는 분들이었는데 그 중의 한분이 감사하다면서 제게 봉투를 내미는데 거기 이백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일거리가 없어서 한 달 이백 원 주는 일자리조차 찾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것도 나이 육십이 넘은 할머니가 이백 원을 내놓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일입니까? 아니 말씀을 인도하는 이에게 한 푼도 줄줄 몰랐던 교회가 따로 백 원을 봉투에 넣어서 사례로 전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 그대로 교회에 예물로 전하고 나오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금요일에 현지 중국인 가정교회 지도자들 14명을 모아 다시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 모두가 300명에서 800명까지 인도하고 있는 분들이라고 했는데도 자기들부터가 말씀을 모른다는 겁니다. 한 번도 말씀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자기들이 말씀을 바로 전하는지 잘못 전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라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무엇을 전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래 전하는 말씀을 받아 적느라고 바빠요. 그래도 거기서는 통역을 세워서 하니까 그 짬짬이 말씀을 받아 적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말씀을 듣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졸고만 있는 분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깝던 지요? 그래도 나중에는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자기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달라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중국에 들어갈 때 그 길을 막으셨고 다시 겨우 기회를 만들어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더니 방향을 확 바꿔 이 먼 곳까지 이끄신 것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 교회가 아주 큰 교회인줄만 알았다가 교회 규모를 듣더니 깜짝 놀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더욱 소원을 품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짧은 여정이지만 결국 그들에게 딸려 있는 모든 성도를 생각한다면 그 만 명 가까운 분들에게 가르침이 전달된 셈입니다. 비록 몇 명을 훈련시키는 것 같아도 그들에게 딸려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삼고자 하십니다. 이 일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돈으로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오직 시간을 내어 그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우리가 쓰임을 받기를 위해서 소원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이 보내는 일에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하고 또 우리 역시 “나를 보내소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가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말씀으로 준비하고 또 우리가 갈 수 있고 보낼 수 있도록 먼저 앞선 자로서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보낼 수 있도록 나를 먼저 복되게 하옵소서. 나 또한 돌아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주의 영광과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소원을 하나님께서는 풍족하게 채워주시고 새 힘으로 넘쳐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복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먼저 송축하는 자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내 할 도리를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값진 것으로 우리에게 안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시편 91편 14절로 16절의 처음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하나님이 높여주시며 하나님이 환난에서 건져 영화롭게 하시며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고 그 구원을 보여주시는 바 귀한 은혜의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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