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큰 사랑 (신 5:6~10, 약 2:5~8, 눅 10:25~28)

  • 잡초 잡초
  • 261
  • 0

첨부 1


구약의 말씀: 신명기 5:6~10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아멘

서신서의 말씀: 야고보서 2:5~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반드시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0:25~28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아멘

사람이 마지막 때가 되면 자기 자손들한테 인생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을 남겨놓습니다. 유언을 남겨놓습니다. 그래서 유언의 말씀은 대부분의 경우 듣는 가족이 아멘으로, 할렐루야 하면서 화답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 중에 노자라는 분이 있는데 이분의 글을 봤더니 임종 직전의 스승님 찾아 가서 마지막 유언을 부탁합니다. 스승님이 임종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웃고 편안한 마음으로 계셔서 마지막 분부하실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스승님이 하는 말씀이 나한테 네가 보기에 남아 있는 게 무엇이냐? 그랬더니, 노자가 하는 말이 선생님 이빨은 다 상해서 없고요 혀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말 하드랍니다. 스승님 하시는 말씀이, 네 말이 옳다. 딱딱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오래 남는 법이다. 이게 유언입니다. 딱딱한 것보다 부드러운 게 오래 남는다. 노자의 사상을 잃어보신 사람은 스승님의 말이 이빨보고 혀보고 하는 말씀이었지만 그 속에 아주 진실 된 노자 스승님의 고백이 들어있는걸 알고 있을 겁니다.

장면을 바꾸어서 오늘 율법교사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와서 유언을 듣자고 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한테 답을 하나 청합니다. 질문은 뭐냐니까, 선생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어떻게 이해하느냐. 율법교사가 대답하기를 내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진실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또 무엇이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그대로 해라. 노자 스승의 답변이나 예수의 답변이 형식적으론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질문을 유도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유도 하면서 그 답을 가지고 그럼 그대로 하여라. 오늘 말씀은 노자선생님이 답변한 것 가운데 이발은 빠져서 아무것도 없지만, 딱딱한 것은 없지만 부드러운 것은 남았지 않느냐. 부드러운 사랑도 남아있지 않느냐, 이렇게 해설될 여지가 있을 겁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을 하였으니 그대로 하여라.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중에서 특별히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셨던 율법,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확실하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신명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당대에만 축복받는 게 아니고 수천 대에 이르러서 축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을 삼사 대 까지 이르러서 자손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다. 저주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런가 하면 사랑과 축복을 주신 하나님 두 하나님이 극명하게 대비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격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저주는 삼사 대 까지만 하시고 축복은 수천 대까지 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엄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처벌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여리셔서 그렇게 많이 처벌 못하십니다. 복은 수천 배까지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 약속에 의거해서 율법을 가르쳤고 모든 백성들은 율법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렇게 가르쳤던 율법 교사들은 도대체가 영생이라 이름하는 축복받기 위해서는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랄 것 같은데 뭘까 하고 예수께 온 겁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을 경전을 이론을 가르친 스승은 참 많습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스승은 적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율법 교사들은 우리는 율법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교사이기는 좀 부족했습니다. 예수께 와서 당신은 율법교사가 아니고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이라고 자부하시는데 당신 답은 뭡니까. 사실 답은 율법교사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께서는 아는 데로 지키면 된다. 뭐가 문제냐. 여기서부터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율법 교사들과 논쟁도 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 나름대로 새로운 영생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보면 네가 말한 그대로 살아라. 그러면 살 것이다 해놓고 그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안하겠습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을 얻으려거든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여라. 어떻게 사랑 하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과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영생에 가고 동시에 이웃을 자기 몸 사랑 하듯이 해야 영생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을 보고 우리가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이 도대체 뭡니까?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됩니까? 영생 때문입니다. 영생을 오늘말로 바꾸면 우리에게 미래는 있습니까? 미래는 어떻게 얻어져야 하는 나라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미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미래를 준답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단 둘이 외롭게 살려고 그러느냐.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도 이웃과 함께 사는 나라이니라. 아주 예수님께서 핵심적인 얘기를 하십니다. 구원은 이웃과 함께 받아야 됩니다. 저 혼자 받는 이웃이 아니고 제 형제자매와 함께 받아야 되고 내 가족과 함께 받아야 되고 우리 식구들 우리 모두 같이 일했던 사람들, 뜻을 나누고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함께 받아야할 구원이지 제가 하나님 앞에서 나 홀로 받는 구원이 아님을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내가 홀로 받는 둘 사이의 나라가 아니고 우리와 함께 우리 모두가 함께 받아야할 그런 나라고 그 나라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수천 대에 까지 이르러서 주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맺을 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으신 하나님, 경의의 하나님, 의의 하나님. 구약성경 전체 테마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로운 하나님 그분만 의롭기 때문에 그분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선 안 된다. 야훼 하나님만 옳고 그분만 섬겨야 된다고 해서 모든 우상숭배가 금지되었습니다. 그 분만 섬기면 됩니다. 제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섬기면 됩니다. 그럼 구원 받습니다. 제가 일하는 직장에서도 제 생업에서도 제 가정에서도 저는 하나님만 섬기면 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백성에게 예수님 보시기에 다른 게 부족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다. 계속 하나님과 공의로운 관계를 가져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공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그렇게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철저한 공의로운 관계로 사는 사람들은 왜 이웃과 수평적으론 관계가 깨집니까? 왜 영생이란 나라는 하나님과 홀로만 맛보려고 합니까? 옆 사람과 함께 나누면 안 됩니까?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수직적 공의에만 있지 않습니다. 수평적 사랑에 있습니다. 제가 공의와 사랑을 수직과 수평으로 단순 도식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사는 공동체 없이 어떻게 하나님과만 단독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까? 율법 교사들은 사실은 하나님과 관계를 올바로 갖는다고 하는 전제 가운데 예컨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창녀들 안식일도 직업상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구원의 공동체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공의가 지배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그렇게 가르쳤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되 이웃을 섬길 수가 없고 사랑할 수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 하고 계셨는데 오늘 율법교사가 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영생을 얻겠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말은 하나님 섬긴 것은 좋다 이웃도 사랑해라.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성 하나를 율법 교사들과 유대백성들이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데리고 와서 묻습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예수의 대답입니다. 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냐고 묻지 않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기 혹시 죄 안 지은 사람 있으면 돌을 들어서 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정의로운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입장에서는 죄를 범한 여인, 유대교 남자는 제외 되고 여자만 죄인으로 취급하는 당시 남존여비 사상 속에서 죄를 범한 여성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의 답입니다. 누구 여기 죄 안 지은 사람 있으면 쳐라. 같이 간음죄를 저질러 놓고 왜 여성만 데리고 오고 남성은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한테 네가 얼마나 많은 간음죄를 범했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몇 번 범했냐고도 묻지 않았습니다. 과거가 어떠냐고 일일이 캐묻지도 안았습니다. 두 번째 말씀입니다. 여성한테 하는 말이 이제는 용서 받았으니 새롭게 살아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그 말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와 사람들은 다시 여성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면 누구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되냐면 데려온 사람하고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여성이여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사랑하는 유대백성들이여 다시는 이 여자 괴롭히지 마라. 영생을 얻으려면 그렇게 해라. 유대 백성들이 생각하는 수직적 공의, 예수님 거기에 대해서 수평적 사랑도 첨가 돼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사느니라.

오늘 예수는 구약을 없애 버리는 게 아니라 구약을 완성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유대교 율법을 폐기 시키려고 온 게 아니라 유대교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수용하고 새로운 영생의 나라를 베풀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런 여인의 얘기를 통해서 율법 교사들의 얘기를 통해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은 이겁니다. 나의 목적은 지금만이 아니고 지금 해결 할 수 없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그러나 확실한 내일의 미래를 주려고 왔다. 혹시 여러분 미래가 보이십니까? 지금 이렇게 사시다가 일 년 후 이 년 후 제가 가질 직장, 제가 봐야 할 시험, 또 제가 같고 싶은 부, 명예, 다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런 꿈이 있고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다 있다고 합격한다고 영예를 차지한다고 재산도 차지한다고 출세도 하고 재능도 있다고 다 믿고 미래를 향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미래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우리 미래는 확실하게 있고 그 미래를 향해서 저는 오늘 최선을 다하고 살아갑니다. 영생이 뭡니까? 하고 물으면 지금 사는 것이 확실하면 지금 말고 미래사는 것도 확실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 확신이 있으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그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미래에 투자하십시오. 미래를 가지고 사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확실한 미래 먼저 볼 수 없으나 우리에게 펼쳐진 미래를 향해서 여러분 사십시오. 간음한 여인에게 과거는 묻지 않겠으나 다시 범죄 않고 미래를 너에게 주노라. 똑같이 죄를 범한 자들이여 그런 수직적 사고 버리고 이제는 이웃과 함께 구원받을 길을 간구해라. 미래에 확신이 없는 자들이 과거를 잘 들춥디다. 제가 총회나 이런 회의 가서 보면요 법이요 하고 소리치는 사람 참 많습니다. 껀만 생기면 법 이온데 법이오 하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과거에 관한 얘기입니다. 과거에 잘못된 얘기 다 들춰가지고 하길 원하고 미래에 확신이 없는 사람치고 과거가 좋았노라고 과거의 탐닉에서 노래하고, 미래에 대한 자신이 없는 사람치고 과거를 들춰내면서 욕하기 시작합니다. 그거 청산하면 미래가 열립니까? 예수님 말씀은 과거는 심판의 대상이고 용서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만들어라. 내가 미래를 약속하노라. 왜 우리는 미래 얘기를 못합니까? 사랑이 뭡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은 과거는 우리 다 심판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보장되고 열려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에게도 미래가 보장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편협됩니다. 의인만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죄인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미래가 어둡다고 과거를 탐닉하는 것은 율법적 사고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는 자들은 영생도 믿어야 한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되는 게 아니라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야합니다.

유대교 율법이나 구약성경을 해석한 가장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우리가 늘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유대교 학자 중에 신학자 중에 마르텡오버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아주 성경말씀을 단순도식으로 해석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관계에 존재입니다. 서로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고 이웃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관계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저를 제가 하나님을 정말 인격적인 하나님 이라고 믿고 하나님도 저를 인격적 존재로 받아 줄때 그 관계를 나와 당신이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속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관계 말고 또 다른 관계가 있는데 이웃을 상대방을 I-it 라고 하는 물상화하고 상대화 하고 객관화 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되면 이웃사랑도 깨지고 하나님 사랑도 깨집니다. 간음한 여인을 데려왔던 율법 교사들은 간음한 여인을 당신이라고 인격적 관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물건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도 죄인을 심판하시고 용서하시고 미래를 주신 당신으로 보는데 감히 사람이 이웃을 물건으로 보느냐. 그런 태도 가지곤 하나님 나라 못간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당신으로 봐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인격적인 당신으로 보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웃 간에 관계는 그렇게 해서 다시 나와 당신간의 관계로 회복이 돼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목적은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제단에 있는 십자가 한번 보십시오. 십자가는 딱 두 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시겠습니까? 위와 아래가 연결 된 겁니다. 그 하나님 말씀이 동시에 여러분은 이웃과 옆 사람과 함께 내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 할 수 있습니까? 두 개의 사랑은 함께 십자가에서 메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속에 우리가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믿기로 부활이라 이름 하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죄 지은 자가 회계하고 용서함 받는 타락한 세상이 다시 변하는 새로운 미래가 다시 열립니다. 하늘나라가 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미래가 열립니다. 아름다운 미래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이 선물을 오늘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박종화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