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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이유 없는 감사 (욥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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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설교, 지루했지만 행복했던 시간>
이번 40일 새벽 기도회는 저에게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욥기를 만만하게 본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설교한 것을 책으로 내겠다고 선언한 다음부터 책임감이 무거웠습니다.
그러잖아도 완벽증 같은 것이 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책은 더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지난 40일, 정확하게 부흥회 이틀 빼고 38일 동안은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주일 저녁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월요일 새벽 기도회를 위한 설교 준비를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저녁 시간까지 하루 종일 일하다가 주일 밤늦게까지
설교 준비를 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지난 40일 동안은 월요일에도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제가 원해서 한 일이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참 고달프고 고독한 과정이었지만, 그러나 또한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의 해석이 100% 옳다고는 못하겠지만 욥기의 비밀을
풀어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뿌듯한 감격이 가슴 가득차 올랐습니다.
어떤 날은 욥기 말씀에 제 자신이 너무 큰 은혜를 받아 화장실에 가서 엉엉 운 적도 있습니다.  이제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던 40일 새벽 기도회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욥기가 저의 마음에 남겨준 감격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도 감사할 수 있을까?>
저는 욥기를 깊이 있게 읽기 전까지는 부당한 고난을 당했던 욥이 잘 인내하고
믿음을 지켜서 나중에 갑절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이 욥기의 뼈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그렇게 가벼운 책이 아니었습니다.
훨씬 더 심오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이야기들은 새벽 기도회 시간에 충분히
말씀 드렸으므로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추수 감사주일을 당하여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감사한다면 아무 이유 없이 감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과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대개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감사할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감사,
화목한 가정 주셔서 감사, 건강 주셔서 감사, 기도 응답 주셔서 감사,
등등, 무엇인가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못 받은 것, 실패한 것, 가슴 아픈 것, 부정적인 것에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사업이 안 되어도 감사, 자녀들이 수능시험을 잘못 보았어도 감사,
가정에 불행이 찾아와도 감사, 질병에 걸렸어도 감사, 등등
잘 안 된 것에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의 참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중요한 물음 중에 하나는 아무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1: 1).
7남 3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가축 떼를 거느린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이를 시기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욥을 참소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훼방하고 막기 위하여 우리를 끝없이 걸고넘어집니다.

본문 말씀은 사탄이 욥의 믿음에 시비를 건 말씀입니다.
천국 회의가 열렸을 때 하나님은 땅 위 이곳 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다닌 사탄에게 묻습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1: 8).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의 마음에 시기심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즉각 욥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9-11절을 보세요.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말이 아무 까닭 없이, 즉 아무 바라는 것
없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물질 축복과 자녀 축복을 주시니까 하나님 잘 믿는 것이지
그가 누리는 것 다 빼앗아 가시면 즉시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는 참소이지요.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하여 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 아무래 장로가 저렇게
신앙 생활 잘하는 것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축복을 주시고 갖가지 울타리로 지켜주시니까
저렇게 잘하는 것이지 어찌 아무 이유도 없이 하나 바라는 것 없이
사심을 다 비우고 하나님 잘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감사하는 모습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까?
재산에 손실을 입고, 실패하고, 자녀들이 속을 썩여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사탄은 욥을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다 두고 사심 없는 신앙이 불가능하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믿었습니다.
욥이 신앙 생활 잘하는 것은 그 따위 보상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이렇게 욥은 하나님도 믿어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누가 이겼습니까?
내기에서 하나님이 사탄을 이겼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완전히 K.O. 승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라는 사람 하나는 잘 보셨습니다.
욥이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악에서 떠난 것은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징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무 바라는 것 없이 순전한 믿음 하나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차례로 잃어버렸습니다.
생떼 같은 10명의 자식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건강까지 잃어버리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해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종기를 긁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최고의 축복을 누리던 사람이 최악의 불행을 당하는 사람으로 역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불행을 당했지만 욥은 결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욕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욥은 자신의 부당한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하고
불평한 적은 있지만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참소가 다 거짓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 것도 감사할 것이 없는 그런 형편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실패했고, 괴로운 일이 많았고, 건강까지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합 3: 17-18).

만일 여러분이 이런 가운데에도 감사할 수 있다면 굳건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믿을 만한 분들입니다!
이번 추수 감사주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좋은 것만 감사하지 말고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 실패한 것, 가슴 아픈 것까지도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추수 감사절>
요즈음 교인들 가운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을 당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 슬픈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나 다 가슴이 아려와서 절로 눈물이 납니다.
이번 추수 감사주일은 우리의 시야를 좀 더 넓혀서 이와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분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흥미로운 주제로 서로 토론하는 과제를 부여했습니다.
곧 핵전쟁이 일어나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죽을 것인데
핵폭발을 피할 수 있는 동굴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동굴에 꼭 6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후보자는 10명이나 됩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6명은 장차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를 새롭게 건설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주 신중하게 선택을 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10명의 후보는 '결혼할 수 없는 수녀,' '공산주의자인 의사,' '눈먼 소년,'
'일본인 교사,' '갱생한 창녀,' '품행이 나쁜 여가수,' '정치가,' '여류 핵물리학자,'
'청각 장애를 가진 농부,' 그리고 '아무 기술도 능력도 없는 백수인 나,'
이렇게 10명 중에 4명을 제외시키되 논리적인 이유를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10명의 후보자들이 다 한 두 개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이 가장 먼저 전원 일치로
제외시켜야 한다고 본 인물은 '정치인'이었습니다.
워낙 기회주의자인 데다가 6명을 가지고 또 당을 만들어 헐뜯고 싸우면
한국은 분열이 될 것이 뻔하다는 이유로 정치인을 제일 먼저 제외했습니다.

그 다음에 만장일치로 반드시 6명 중에 포함시켜야 할 사람은 '나,' 즉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6명이 살아남아 인구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수적인데 나는 아무 기술도 없고
백수이지만 번식 능력은 있기 때문에 인구를 늘려나가는데는 최고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학생들이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의견의 일치를 본 사람은
'청각 장애자 농부'였습니다.
농사짓는 분이므로 식량 보급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이 세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학생들 가운데 뜨거운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논쟁은 '일본인 교사'와 '눈먼 소년'이었습니다.
일본인은 제외시켜야 한다는 쪽은 과거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준 상처와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쪽은 새 한국 새 아시아를 건설하는 마당에
과거 역사는 다 잊고, 경제적 감각이 뛰어난 일본인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각 장애를 가진 소년에 대해서는 크게
실리주의적인 쪽과 인도주의적인 쪽이 맞붙어 논쟁을 했습니다.
실리주의를 따지는 학생들은 겨우 6명만 살아남기 때문에 작은 공동체에서 뭔가 공헌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측면에서 시각 장애인은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현실적인 이유를 댔습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인 쪽에서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직도 어린데다가 장애까지 가진 소년이기 때문에
무조건 구해놓고 봐야 한다는 인간애적인 논리였습니다.   

이렇게 시각 장애를 가진 소년을 놓고 실리주의적인 쪽과
인도주의적인 쪽이 설전을 벌이다가 대세는 실리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습니다.
지금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에 감정이나 동정심에 빠져서는 안되고 냉정해져서 뭔가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치열한 설전을 지켜보던, 평소에 언어 장애가 있어서
거의 발표를 하지 않는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이 학생이 떠듬떠듬 한 말을 책에서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는 소년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여러분이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아주 바쁠 겁니다.
좋은 나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신 없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그 사회에도 경쟁이 생기고,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혀 권력을 놓고 싸울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 이 눈먼 소년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자기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야 할 겁니다. 
그러면 남을 돕고, 남을 위해 나의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 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도울 수 있고 위로해야 할, 상처받은 이웃이 있다는 사실은 축복입니다.
다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아무 이웃도 돌보지 않는 세상은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차갑고 냉정하고 오직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세상, 숨이 막히는 세상이 되고 말겠지요!

하나님은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 이 세상을 살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이 되게 하려고, 자기만 아는 삭막하고 냉정한
세상이 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번 추수 감사주일 새벽에 우리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작은 헌금을 드렸습니다.
또한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과일도 함께 주님께 바쳤습니다.
함께 나누고 베푸는 우리의 모습을 분명히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금년 추수 감사주일은 인간적으로 아무 감사할 것이 없어도 주님 한 분만으로 감사합시다.
무엇보다도 깊은 상처와 슬픔으로 고통 당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감사절이 되게 합시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했던 이기심에서 벗어나 우리의 이웃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추수 감사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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