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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감사하는 마음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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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킨다. 추수감사절은 구약성경에서 초막절(장막절), 또는 수장절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이 삭막한 광야에서 40년 간 지내면서, 광야에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면서, 안식처를 주신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제를 드렸다.

  또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한 날들을 떠올리며, 갈 길을 몰라 방황할 때,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이 가야할 길을 인도하시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해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다 함께 기쁨으로 감사하였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농사를 지었는데, 추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기에, 환희의 축제라 하였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안식처를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동행하여 주시며,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가 되자.

  감사는 수증기와 같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은혜의 단배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감사는 메아리와 같다. 감사하다고 외치면, 감사하다는 말이 되돌아온다. 따라서 감사를 배우고, 감사를 훈련하면, 인생은 행복하게 된다.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 우리는 감사한 만큼 강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행복이 임하게 된다. 우리가 감사하는 만큼, 살만한 세상이 된다. 근육은 사용할수록 발달한다. 어떤 부분의 근육을 집중해서 키우느냐에 따라 근육이 발달한다. 감사의 근육도 사용할수록 더욱 발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토록 반복해서 감사를 명령하신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감사의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한다. (시100: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라고 하였다.

  감사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행동은, 마치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려는 어리석은 행동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고, 예배나 기도에 직접 뛰어들어가는 실수를 자주 한다. 감사함으로 주님께 나가자.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하였다.

  지옥은 감사가 없고 불평만 있는 곳이다. 그러나 천국은 불평은 없고, 감사만 있는 곳이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스올의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감사의 목소리로 제사드릴 때,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자.

1. 주님 안에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이 나타난다(4).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이다. 바울의 수감생활을 염려해서, 호의를 베풀어준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감사와 사랑’의 편지다.

  사도 바울은 늙고, 아프고, 부자유한 몸으로,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의 주제는 기뻐하라는 내용이다. 왜 우리는 기뻐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속죄와 구원의 기쁨이다.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구원받았다면, 이 기쁨은 세상이 뺏어갈 수 없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셨기에 기쁘게 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뿐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기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님의 품에 안기어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도 요한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 받는 잠시의 환란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쁨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이렇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고 예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가 누리는 이 신령한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않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맑은 날에는 기쁘다가 흐린 날에는 그 기쁨이 없어진다. 일이 잘 될 때는 기쁘지만, 어려움을 당하면 그 기쁨은 없어진다.

  건강할 때는 기뻐하나, 병들 때에는 그 기쁨이 사라진다. 살 때에는 세상에 기쁨이 있으나, 죽을 때는 세상의 기쁨은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은, 환경변화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다. 영원한 기쁨, 온전한 기쁨이다.

  성도들은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어야,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이 세상의 시험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반드시 그의 삶 속에는, 그리스도인이 된 표시가 있다. 성도가 은혜 받게 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회개와 기쁨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안에 있다면,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끊임없이, 어떤 경우에도 계속 기뻐하라는 말이다. 기쁨은 생활의 활력소다. 진정한 기쁨이 없는 마음에는, 감사가 없다. 불평과 원망, 허무가 찾아온다. 기쁨이 없으면 만사가 귀찮고 짜증스럽다. 자연히 보람도 성취도 열매도 없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잘 웃고, 감사하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다. 진정한 기쁨은 감사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감사로 증명된다. 감사가 없다면 세상의 쾌락이요, 재미일 뿐이다. 세상 쾌락과 재미로 기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는다.

  재미와 기쁨은 그 차원이 다르다. 세상 쾌락과 재미에는 감사가 없다.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했다. 우리가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기도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했기 때문이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따라서 참 기쁨과 감사로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 자신을 평가해 보시기 바란다.

2. 영적 감각이 회복되어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된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은 자들이었다. 죽은 자들은 감각이 없다. 감각이 죽었기에, 기쁨과 감사를 느낄 수 없다. 우리가 기쁨과 감사를 누리려면, 먼저 우리의 감각이 회복되어야 한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감각이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과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움은 무관심보다 사랑에 가깝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내가 사랑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슬프다는 말은, 감각이 있다는 말이다. 애통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위로 받아 회복될 수 있다. 문제는 무감각이다. 감각이 없을 때,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먼저 우리의 무감각이 치료되어야 한다.

  우리의 감각이 살아날 때, 기쁨도 감사도 살아난다.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출 수 없다. 즐거운 기색이 우리의 표정에 드러난다. 그렇다면 무감각해진 우리의 감각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나요?

(1) 깨어짐을 통해 감각을 회복하라.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깨어짐을 통해, 감각이 회복된다. 바울은 계속 깨어졌다. 고난을 통해 깨졌다. 깨어짐은 고통이다. 깨어질 때 아프다. 깨어질 때 상처가 난다. 연약해진다.

  그런데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 감각이 회복된다. 감각이 살아나고 개발된다. 민감성이 회복된다. 깨어짐은 아프지만, 깨어짐을 통해서 우리 내면의 생명이 꿈틀거리게 된다. 병아리가 알에 나오려면 껍질을 깨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알을 깨지 못하면 죽게 된다.

  바울은 위험으로 인하여,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다. 바울의 몸에는 육신의 가시가 있어서, 그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 자신이 약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자, 오히려 약함을 자랑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2) 깨달음을 통해 감각을 회복하라.

깨달을 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다. 깨닫지 못하면 기쁨도 감사도 없다. 깨달음이 찾아오면, 모든 사람 때문에 감사하게 된다.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통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로마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음을 깨달았기에, 그는 모든 사람을 향해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 인생을 돌아보게 되면, 우리를 괴롭게 한 사람 때문에 괴롭고 힘들었지만, 결국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변화되고 성장하게 됨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향해 관용을 베풀고, 모든 사람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었다.

(3) 사랑을 통해 감각을 회복하라.

사랑하면 감각이 회복된다. 한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스테반에게 돌을 던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스테반을 돌로 쳐죽이게 하였다.

  그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자, 그의 감각은 회복되었다. 사랑하면 예민해진다. 귀가 열려 상대방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들린다. 눈이 열려 상대방의 눈짓, 몸짓, 손짓 하나하나 모두 다 눈에 들어온다. 사랑하면 온몸이 열린다. 감각이 살아나, 옷깃만 스쳐도 사랑을 느낀다.

(4) 성령 충만을 통해 감각을 회복하라.

우리 노력만으로 감각을 회복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실 때, 우리의 영혼은 부흥된다. 부흥은 다시 회복됨을 말한다.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말씀이 깨달아져서, 은혜의 눈물이 흐르게 되고,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남을 탓하던 내가, 문제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죄가 깨달아지고, 회개가 저절로 나온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사랑스러워진다. 교회에 가고 싶고, 예배 시간이 기다려진다.

  하늘도 땅도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만들어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다 좋아진다. 장점만 자꾸 보인다. 기도하고 싶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해야 한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의지하시기 바란다.

3.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되려면, 염려를 바꿔라(6).

염려는 우리의 기쁨과 감사를 빼앗아 가는, 가장 큰 적이다. 염려가 찾아오면 불안과 두려움이 함께 찾아온다. 기쁨과 감사는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충만해진다.

  염려는 비생산적이다. 염려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염려를 정복할 수 있나?

(1) 염려 대신 기도하라.

염려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염려의 열매는 두려움과 불안, 원망이다. 그러나 염려를 기도로 바꿀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다.

  관심을 가지면 집중하게 되고, 상상하기 때문에 문제가 커진다. 그런데 기도로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게 된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 따라서 염려는 기도하라는 신호이다.

  병들었을 때, 염려하지 말고,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자녀가 속을 썩이면, 염려하지 말고, 자녀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사업이 어려우면, 사업이 어렵다고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된다.

  염려를 내어쫓을 수 있는 능력은 믿음뿐인데, 우리의 심령에 믿음을 채우는 일은 기도해야 한다. 인간은 기도할 때, 염려의 무거운 짐을 벗게 된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평안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다.

(2) 염려 대신 감사하라.

사도 바울은 염려를 극복하는 비결이, 기도와 또 감사에 있다고 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하면 염려가 사라진다. 감사를 시작하면 감사가 넘치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은 염려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먹을 것을 위해 염려하고,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염려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을 이방인들의 삶이라고 하셨다.

  천국에서는 감사가 가장 크다. 그 나라에는 근심의 구름이 없고, 감사의 찬송만 넘친다. 그러므로 천국백성들은, 염려대신에 감사하면서 살게 된다. 세상은 염려를 앞세우나, 믿음은 감사를 내세운다. 사람에게 염려하면서, 동시에 감사할 수는 없다. 염려는 지옥이고 감사는 천국이다.

  오병이어 앞에서 예수님의 감사는, 5천명을 먹이는 이적을 가져왔고,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기도는 시체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 감사는 인생을 복되게 만들어 주는데,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멕시코의 어떤 마을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온천과, 그 옆에는 얼음물같이 차가운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오르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한다. 동네 아줌마들은 빨래 광주리를 이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간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원에게 “이곳의 부인들은 참 좋겠어요!, 뜨거운 물과 찬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요. 이 곳 사람들은, 뜨거운 온천과 차가운 냉천을 동시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내겠군요.” 말했더니, 안내원은 반대의 말을 했다.

  “아니요,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 물이 땅에서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빨래하는데 꼭 필요한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더 불평이 많지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고, 또 우리의 소원이 다 이루었다 해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기쁨과 감사를 주지 못하고, 더 큰 욕망과 욕심만을 갖게 한다면, 그 소유나 성취는 감사의 조건이 아니라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만다.

  결론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감사할 조건에서 나오지 않는다. 감사는 바른 자세, 건강한 신앙에서 우러나온다. 들의 잡초는 전혀 가꾸지 않아도, 잘 자란다. 그러나 귀한 화초일수록, 사랑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법이다.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은 가꾸지 않아도, 내 마음 속에서 잘 자란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은, 애써서 잘 가꾸어야만 한다. 우리 인간의 언어가운데 가장 좋은 단어가 ‘사랑’과 ‘감사’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축복 받은 사람들은, 이 말을 많이 사용한다. 늘 생활 속에서 사용한다. 만날 때도 사용하고, 헤어질 때도 사용한다. 모든 생활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지 마시고, 감사의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란다.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 감사의 말은 모든 불평, 원망, 괴로움도, 다 흡수해 버린다. 큰 음이 작은 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심으로,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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