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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 맛보기 (마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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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가 화장을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평소보다 월등히 아름다워집니다. 거기다 조명까지 비춰주면 그 아름다움이 더욱 화려해집니다. 그렇게 놀라운 변신을 하고 예식장에 들어서면 모든 하객들이 손뼉을 치며 맞아줍니다. 신랑은 그런 신부를 맞으면서 눈을 의심합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놀라서 신부가 바뀐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 한껏 치장하고 차려입은 신부의 모습이 본 모습일까요, 아니면 화장을 지운 생 얼굴이 진짜일까요? 생 얼굴이 진짜라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정답은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잔주름이 가득한 아줌마의 모습은 진짜가 아닙니다. 이분들은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추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남편들이여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비롭게 변하셨습니다. 영광의 광채를 받아 눈이 부셨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기다가 빛나는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천상의 소리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하는 소리였습니다.

이 모습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봐오던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너무 잘해주셨기 때문에 어떤 때는 친구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두려워 떨었습니다. 본문에는 심히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떨었든지 예수님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평소에 보던 예수님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변형된 모습이지만, 조금 전에 뵈던 그 예수님 맞습니다. 그러니 달리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귀신도 벌벌 떨며 쫓겨 갔습니다. 사나운 풍랑도 야단맞고 잔잔해졌습니다. 물 위로도 걸으시고 죽은 이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뵈던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베드로는 신비롭게 변화된 주님을 보고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이 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비로운 변화산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외쳤습니다.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최고의 인물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율법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계명을 받아 글로 기록했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선지자 역시 계시를 통해 말씀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는 받은 말씀을 외치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베드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명 모두 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계명들을 모세에게 직접 들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살아있는 율법 그 자체였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불과 바람과 지진이 지나가고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세 명 모두 산이나 광야에서 40 일을 금식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 일을 금식하며 계명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까지 40 주야를 금식하면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습니다.

이 세 명 모두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자신의 얼굴에도 그 광채가 옮겨졌습니다. 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평생 그 얼굴의 광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는 얼굴에 너울을 써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리어졌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하늘로 승천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올리어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뿐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스승의 영감의 갑절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 못지않은 활약을 했습니다. 그래도 스승 엘리야의 명성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승천의 영광에 있습니다. 하늘에서 병거가 내려와 모시고 갔으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경험한 빛나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엘리야처럼 부활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만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과 계시의 완성을 위해 삼자 회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명을 응원했을 것입니다.

구름 속에서 울리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빛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 음성이 들리는 장면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은 예수님을 응원하는 메시지입니다.

변화산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 이 모습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낮고 천한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습니다. 그것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 예수님은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영광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이 살짝 비춰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6-18 에 베드로는 이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벧후1:16-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이 변화산의 장면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갑자기 영광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동안 잊고 산 영광의 모습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0 년이 넘도록 이 영광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있는 예수님을 힘차게 응원하려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는 다시 회복될 이런 영광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이 변화된 모습은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 영광의 신비는 예고편입니다. 장차 천상에서 누릴 영광의 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런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이런 영적 신비체험을 하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비체험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취한 듯 홀린 듯 했습니다. 산에다 천막을 짓고 내려가지 말자는 말은 현실을 잊은 말입니다. 주님의 변화된 모습은 너무 황홀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늘의 영화로운 몸체로 잠시 변하신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이 모습은 또한 부활하셨을 때의 그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변형된 몸을 가지셨습니다. 천사처럼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손과 옆구리에는 십자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문을 잠그고 있는 방 안에 뚫고 들어오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에서는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공간을 자유롭게 순간 이동하는 신비로운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변화된 얼굴을 보고나서 착각을 했습니다. 잠시 동안의 변화된 모습이 지금부터 영원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산을 내려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초막을 짓고 여기서 살자고 했습니다. 산은 잠시 영적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닙니다.

사실 초막은 임시로 머물 수 있는 곳입니다. 변화된 영광의 몸으로 거할 곳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혼자 신비에 취해서 헛소리를 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는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결연한 각오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난보다는 영광에 취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변화된 영광의 몸은 장차 우리도 입을 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이와 같은 빛나고 신비로운 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몸은 진짜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화로운 몸이나 이 땅에서 잠시 이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이 몸으로 할 우리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변화산에서 잠시 변형 되셨으나 산을 내려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육신의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영화로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로움은 천사도 부러워 할 몸입니다.

찬송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궁궐 같은 세상보다는 초막 같은 교회가 더 낫다고 여깁니다. 바울처럼 세상의 부귀영화와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변화산은 분명 영적 체험을 한 신비로운 곳입니다. 능력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그 산에서 내려와 이 세상과 맞서야 합니다. 성령 체험을 한 열정의 그리스도인들이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 감동과 감격이 있습니까? 놀랍고 황홀한 영적 체험이 있으십니까? 없으면 그 신비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얼굴과 옷이 희고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 주님의 모습은 영광의 주님입니다. 부활 승리하신 주님이십니다. 장차 우리도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광의 보좌에 앉혀 주실 것입니다.

신비로운 체험이란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감당해야할 본분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할 사명입니다. 복음은 산에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가서 전해야 합니다. 직접 세상에 나가 복음의 씨를 뿌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신비를 체험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성찬식이 있습니다. 가톨릭은 이 성찬이 주님의 몸과 피로 변형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떡과 잔이 변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떡과 잔을 받은 우리가 변한다고 믿습니다. 이 거룩한 떡과 잔을 우리 몸속에 받을 때 이 몸은 영화롭게 변할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우리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성찬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비를 체험하십시다. 주님의 떡과 잔을 통해서 장차 누릴 영광의 몸을 사모합시다. (황금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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