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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숨 리필 (마 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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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운동이든지 잘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긴장하기 때문에 제대로 동작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상을 당하기도 쉽습니다.

힘을 가장 많이 써야 하는 역도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유연성입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바벨을 들어 올리는 것은 팔 근육의 힘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팔 힘이 아무리 세도 허리가 유연하지 않으면 가벼운 바벨도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역도는 온 몸에 힘을 빼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필요한 근육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올림픽을 앞두면 선수촌에서 각종 종목 선수들이 체력 테스트를 받습니다. 단거리 육상 선수를 제외하고 100 미터를 가장 빨리 달리는 선수는 바로 역도 선수들입니다. 육중한 몸을 가졌지만 몸이 유연하기 때문에 단거리에서 순발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순발력만 테스트 해보면 역도 선수들이 100 미터 육상 선수들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수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속에서 앞으로 나가려면 팔 다리를 저어야 합니다. 이때도 물에 몸을 맡기고 힘을 빼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도록 수영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힘을 쓴다면 이내 지치고 맙니다. 그저 땅에서 걷는 정도로 팔다리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운동뿐만 아닙니다. 몸을 쓰는 모든 일에는 이 원칙이 적용됩니다. 악기를 연주할 때도 몸에 들어간 힘을 빼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반복하는 육체노동을 할 때도 힘을 빼야 합니다. 만약 힘이 들어가면 근육이 상합니다.

몸에 힘을 빼는 원리를 인생에 적용하면 어떤 말이 될까요?
그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불교에서 자기 부인은 무념무상을 뜻합니다. 세속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헛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명상이란 머릿속에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 그런 명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으로 어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맑은 정신을 얻어 건강을 찾는 정도입니다.

기독교에도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기 부인’은 불교와 명상과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은 역설적입니다. 여기서 ‘자기 부인’이란 사실 더 적극적인 자기 긍정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5>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입니다. 그래서 세상 무엇과도 목숨과 바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 나서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서 목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결국 죽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 어떤 것과 바꿀만합니다. 누구나 제 목숨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과 공력은 자기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생명을 만드는데 아무런 역할이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의 어떤 지혜와 방법도 아직 이 생명은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제까지 인간의 생명 구원에 대한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해 먹고 영생하려고 했습니다. 진시황의 주치의들은 영생불멸의 물질로 '수은'을 추천했습니다. 그 당시 수은은 금보다 귀한 것이었습니다. 수은을 조금 써보았더니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졌습니다. 진시황은 수은이 불로장생의 약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국의 수은을 모아 수은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수시로 수은을 먹고 얼굴에 발랐습니다. 결국 수은 중독으로 코가 썩고 정신병이 생겼습니다. 말년에 그는 정신병적 폭정을 거듭하다가 측근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유전공학을 이용해서 생명의 영역까지 건드리고 있습니다. 아직은 난치병 치료를 목적으로 합법적인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생명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이 찾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인도하는 목숨을 찾는 길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이 말은 적군의 고지를 향해 돌격하라고 부하들을 채근하는 소대장의 함성 같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병사는 살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살 확률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100% 산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목숨은 누구나 하나뿐입니다. 만약 목숨이 세 개 쯤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쩌다 사고로 하나를 잃어도 아직 두 개가 남았으니 조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은 하나뿐이니 소중합니다.

어떤 커피점에서는 리필을 해줍니다. 커피를 더 마시고 싶을 때 리필을 요청하면 다시 한잔 가득히 부어줍니다. 목숨도 이렇게 리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병으로 앓다가 목숨을 잃으면 주님께 리필을 요청하는 겁니다. 주님 한 번만 더 살게 해주세요. 기도하면 “알았다. 네 목숨을 100 년 연장해주마. 조심해서 잘 살거라.”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죽기를 각오할 정도의 용기나, 죽지 않고 목숨이 연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살려면 우선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앞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천국 열쇠를 맡기도 했고, 교회를 세우는 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3 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해서 광주리의 떡을 나를 때는 정말 신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승승장구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어 갔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면 천하를 얻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의외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라.” 이 말씀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 보려고 해도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한참 잘 나가는데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면 그 다음에 뭐가 남습니까? 남이 보입니다. 자기를 긍정하는 사람에게는 자기만 보입니다. 자기에 가려서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힘과 재주만 보입니다. 그래서 교만해집니다.

교만하게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면 주변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자기 부인은 겸손입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챙깁니다. 나 살기보다는 남사는 일을 우선합니다.

십자가는 바로 남을 위해 제 목숨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죽는 척 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곧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얼른 보면 철저한 패배입니다. 로마의 무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흉악범들의 형틀인 십자가형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사단의 승리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기 위해 예수님은 우선 죽으셔야 했습니다. 죽음이란 늪에 빠져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는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단은 인간의 죄를 가지고 고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람을 죽음의 못에 빠뜨려 멸망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모든 계략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단의 철저한 패배였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실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십자가의 길만이 구원의 길이요, 승리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으며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이 역설을 받아들이려면 이 역설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리임을 확신하는 자라야 합니다. 이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 죄가 용서받고 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믿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인생살이가 고달프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달픈 인생이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입니다.

십자가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기꺼이 지는 것입니다. 내 문제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남의 문제를 떠안고 지는 것입니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남 잘못 때문에 벌어진 것을 내가 떠안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보고 내가 억울하게 되는 것입니다. 손해와 억울함을 지나쳐 아예 내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남의 고통을 떠안아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희생이 있기에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희생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당할 고통과 죽음을 면하게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구원의 혜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해도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천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단 한번 뿐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이지 다시 재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반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가 다시 나타나는 곳마다 죽음의 권세는 무너지고 생명을 찾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에 덮여 그늘지게 살던 사람들이 생명력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가득한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치른 제자들은 그 결말이 어떻게 될까요? 본문 27 절을 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십자가의 희생은 그것을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갚진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보상은 어떤 것일까요? 이어 28 절을 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왕권을 가지고 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왕권은 하나님 보좌에서 누리는 왕권입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하나님의 왕권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요한계시록 22:5 말씀에는 우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 가운데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있는 왕권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는 거침이 없습니다. 그 놀라운 권세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 보좌 왕권을 누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한 청년이 3 번째 골수를 기증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전남대 조교로 일하는 34 살 서태호씨입니다. 그는 헌혈을 하다가 골수(조혈모세포)도 기증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선뜻 기증자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뼈에 구멍을 뚫는 골수 기증을 세 차례나 하면서 세 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http://news.media.daum.net/culture/life/200611/10/hani/v14678439.html

이 기사를 읽다보니 몸뚱아리를 아낀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오늘 찬양에 내 몸에 주의 흔적 남게 해달라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 어떤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고 살았습니까?

이 시간 이 찬양을 다시 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한 새로운 결단을 하십시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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