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 감사하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눅 17:11-19)

  • 잡초 잡초
  • 207
  • 0

첨부 1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추수라는 말 자체가 매우 멀게 느껴집니다. 구약시대에는 ‘수장절’이라고 하여서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고 이 절기를 지냈습니다.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는다든가 추수를 한다든가 라는 개념이 쉽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 년에 가을걷이를 하는 가을철에 날짜를 정하게 되고, 그 가운데 지난 1년간을 회고하며 우리 삶의 추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과 감사의 심정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13절>이하를 보게 되면,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일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는 내 자녀, 노비,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을 하되 그다음에 뭐라고 말씀을 하시냐면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동안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모든 물산과 내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신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찌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물상과 손을 댄 일에 복을 주실 것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절기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키는 11월 셋째 주일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이와 같은 날을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절기가 정해진 날짜지만 우리는 왜 이날이 며칠날로 정해졌냐 하는 것 보다 가을걷이를 하는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우리 삶의 시절을 반추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이와 같은 축복의 절기로 생각을 해서 감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지난 한 주간동안 하나님께 감사한 일들을 여러 가지 생각해 보셨을 겁니다. 숙제로 드린 대로 최소한 15가지 이상 감사한 일을 적어보셨을 것이고,

또 많은 경우는 한 100가지쯤 감사한 일을 적어보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몇 가지 적어보다가 열 개 정도만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더 오래오래 살아야 되겠다. 하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무엇인가 아직도 해야 될 일이 남아있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우리의 모든 용도가 이미 폐기될 만큼 끝났다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서 숨 쉴 이유도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을 그 나라로 부르셨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세상에 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룰 계획도 있고, 뜻도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아직 무엇인가 하실 거라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용도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자비를 얻은 것에 대해 무척 감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행한 것에 대해서 심은 대로 거두기만 한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 도저히 두려운 마음으로 설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자비하심을 더하여 주시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늘 용서하시고 이해하시고 새로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나 허물을 찾기보다는 은혜로 이해하고 덮어주셨고 또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써 가리워 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제가 맡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자비도 감사하고 사람들의 자비도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는 날마다 새로운 꿈과 계획이 있고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음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계획도 없고, 노력에 대한 의지도 없고, 모든 소망도 없다면 그 삶은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매우 길었을 것인데 하루하루가 길다고 느껴본 적은 없고 늘 시간이 모자라다 생각이 들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주셨다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계획과 꿈을 가지고 소망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네 번째는 무엇인가 복음을 위한 작은 기여와 헌신이라도 이룰 수 있는, 또 마음이라도 헌신하고 싶었던 마음이라도 있었던데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해도 결국 복음에 합당한 것일 때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요, 소원의 역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제3기 사역에 들어서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교회에 해야 될 사명에 대해서 그것이 구체화되고 있음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인물양성, 그리고 빵과 복음을 함께 전하는 선교의 사역, 그리고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나눔과 마음을 같이 함에 대해서 보다 구체화 됨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여섯 번째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음에 대해서 감사했어요. 물론 우리는 사람에게 기대하면 실망합니다. 사람을 믿으면 언제나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무엇인가 기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실패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을 확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나가고 또 무엇인가 마음속에 따뜻함을 느끼고 사랑에 대한 의지와 소망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인간에 대한 기대보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기대임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대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런 소망도 가지지 못하게 되죠.

일곱 번째는 건강해서 자꾸 어떤 계획과 소망을 가진다는 겁니다.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면 새로운 일을 계획할 수 없습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새로운 계획을 마음에 생각조차 못하게 되죠. 건강하기 때문에 마음도 몸도 건강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새롭게 계획하는 것을 봅니다.
삶에 자꾸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됨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늘 어떤 사물을 짜증 나고 어떤 것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삶이 슬프겠습니까?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고, 삶에 대해서 자꾸 소망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홉 번째는 사람을 볼 때 자꾸 판단하고 비판하는 마음보다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들고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열 번째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듦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노력에 대한 의지가 포기되어지면 그것은 우리의 진보에 한계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꾸 무엇인가 새로워지려고 하고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와 같은 것들을 차례대로 적어가며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 감사하지 않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려움도 고통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기본적인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 앞에 감사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심정 속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정말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를 좀 고쳐주십시오.”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올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문둥병 환자들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요. 그러므로 간절히 그들의 위치 속에서 할 수 있는 소리밖에 지르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가라, 제사장에게 보여라."
당시 문둥병은 천형의 병이었어요. 죄로 말미암아 오는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둥병은 따라서 의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나으면 나았다고 판정을 할 수 있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문둥병 걸리면 마음도 괴롭고 몸도 괴로운 겁니다. 사람들이 상대를 안 해요. 환자로써 배려도 안합니다. 벌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은 다 나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이제 가다보니 열 명이 다 나았어요. 그중에서 아홉 명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냥 히히 낙락하다가 제 갈길 갔습니다. 그중에서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만이 주님께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 제 병이 가다 이렇게 다 나았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아홉 명은 어디 갔느냐?” 하면서 마음에 심히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면서 이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귀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면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단락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우리 인간들의 심정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인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간절히 구하는 인간의 심정을 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갈 때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여들게 되죠. 한 촌락으로 들어가는데 그중에서 열 명의 문둥병환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병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쫓아 나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 앞에 와서 덥석 손을 잡거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쳐주십시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문둥병은 당시에 천형의 병으로써 사람들이 외면하는 병이었어요.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침으로 사람들이 자기에게 접근을 못하게 했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은 사람들과 같이 못살았어요. 따로 어떤 계곡 같은데다가 그들의 처소를 정하고 따로 분리돼서 살아야 됐습니다.
쉽게 이해하시려면 <벤허>라는 영화를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 벤허의 가정은 권문세가죠. 대단히 호화로운 가정인데 그 어머니와 누이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문둥병환자들이 있는 계곡에 가게 됩니다. 나중에 벤허가 그걸 알고 찾아가게 되는 데요. 맨 나중에 어떤 장면이 나옵니까.
그 어머니와 누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문둥병이 낫게 되죠.

그러니까 문둥병은 아무리 권문세가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문둥병에 걸리면 하나님한테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사람들과 분리해서 있어야 되요. 이 문둥병환자들은 그 당시에 몸도 썩어져가는 고통 속에 있지만 너무 마음이 괴로웠던 거예요. 사람들이 문둥병환자를 보면 "저 죄인..." 이런 거란 말입니다.
나은 것을 의사한테 보여서 판정받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판정받는 이와 같은 종교적인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도 그들은 똑같이 내놓고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예수님 앞에 가서 몸부림 칠 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너무나 괴로운 마음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떤 것도 고쳐주시는 이러한 것을 보고 듣고 예수님께 간절히 멀리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마치 열 두해나 혈루병 걸렸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 병이 나은 것처럼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붙잡고 낫게 해달라고 몸부림치고 싶었던 거지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때, 그렇지 않아도 가련한 심령들이 더욱더
슬픔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죠. 멀리서 구슬픈 눈망울로 예수그리스도를 요청하고 있었죠. 정말 우리 이런 경험 하신 적 있습니까?
별로 우리에게 실감이 안날 텐데요, 배는 고픈데 진열장에서 맛있는 음식이 모락모락 김이나요. 그런데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수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물끄러미 그걸 바라볼 때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면 얼마나 서글프겠습니까?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예수님께 나가질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멀리서 소리를 질러 “나를 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소리 높여 가로되>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이 상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정말 멀리서라도 예수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 가지고 있는 거지요. 위기에 빠졌을 때 한줄기 빛이 비친다면 그 빛을 향하여 바라보다가 그 빛을 향해서 전력을 다해서 달려가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가끔 기도의 소리가 높아지는 때가 언제죠?
우리 가장 어려운 때 아닙니까? 인간들은 보통 어려운 때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요즘 수능고사 지난주에 시험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늘 매년 같은 얘기 하지만요
목사한테는 수능고사 보는 거 괜찮은 겁니다. 왜냐하면 이 수능고사 볼 때보면 학생이고 부모고 마음이 다 순수해져요. 그리고 아주 겸손해 지는 것 같아요. 저는 일
년에 수능고사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번 봤으면 늘 좋겠다고 생각해요. 네 번만 회개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학생들도 제가 늘 그러거든요.
"목사님이 내년에 청년부 잘 나올 사람만 기도해주려는데, 내년에 청년부 나올 사람만 손들어봐" 그러면 한명도 안 빠지지 않고 다 손들어요.
"손도 낮게 들면 낮게 드는 애는 점수가 낮을 것이고, 높게 드는 애는 높을 것이다"
그러면 또 번쩍 들어요. 이렇게 치사하게 물어보는 데도 치사하게 생각도 안하고 치사하게 다 따라서 해요. 그런 거 보면 자기가 괜찮은 위치에 있을 때 치사하다 유치하게 이러느냐, 그럴 사람들도 뭐 치사하다 유치하다고 하는 사람 없어요.
“손 높이 드세요” 하면 손 번쩍 들고... 그런 거 보면서 사람이 정말 어려움을 겪어야, 절실한 상태 속에 있어야 겸손해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고 평상시에 그러면 목사님 치사하게 그런 조건으로 기도해 주십니까? 그럴 텐데, 그런 사람이 한명도 없었어요. 여태까지.
그런걸 보니까 정말 어려울 때 우리마음이 순수해지는 거예요. 어려울 때 순수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마음이 간절하고 애절할 때 하나님 앞에 더욱 더 순수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졌다고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어려워서 잠을 못자고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며 하나님 앞에 정말 눈물로 호소할 때 바로 그런 때가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느꼈던 때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와 같은 간절한 때에 보통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우리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어렸을 때 여자분 들은 그런 일 안하지만, 남자 분들은 어렸을 때 연세 드신 분들은 구슬치기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고 이런 거 하셨죠?
지나가다 보면 그런 기억이 나는데요, 어른들이 애들 노는 거 보고 그러잖아요.
“애들이 장사야 어른들은 춥다고 하는데, 애들은 거기 나가서 놀아요.” 그런 거 보고 하는 지 요즘은 물론 애들이 밖에서 놀지 않지만요.

그런데 그때 생각하기에 어떤 날 딱지도 많이 따서 가고 구슬도 한 박스씩 따고 그러는데 그거 보면 부자 된 거 같잖아요. 얼마나 흐뭇해요. 그런데 애들이 그거 많이 가졌다고 해서 그거 가지고 뿌듯한 거 같아도 어른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니라구요. 집에서 볼 때는 구슬 가지고 갈수 있어요? 가지고 가면 “너 맨 날 이거만 했구나.” 하고 혼날까봐 어디 음습한데 숨겨두고 들어가잖아요. 여러분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한 번도 따본 적이 없든지, 아니면 안 해봤든지, 둘 중 하나겠지요.

애들한테는 그렇게 귀한 건데 어른한테는 별거 아닙니다. 우리들 가진 게 하나님 앞에는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물질을 많이 가졌어요? 내가 재능과 지식이 있어요? 내가 어떤 일을 성취 했습니까? 애들이 가지고 있는 딱지나 구슬처럼 우리가 뿌듯하게 느끼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보일 때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이런 생각하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는 또다시 생각 하게 되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게 재산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 우리는 간절히 나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간절하게 부르짖을 때 우리에게는 사실 고통스러울 때
지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귀하게 느끼는 때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생각해봅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가다가 이들이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주님의 치유하심의 역사를 입은 거예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너희가 낫다라는 선포 아니예요? 그런데 가다가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아홉 명은 희희낙락하고 신이 나고 좋았어요. 그리고 그냥 가버렸어요. 한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께 다시 쫒아 와서 "예수님, 내 문둥병이 낫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지요.
정말 그 당시에는 천형의 병으로 알려진 그 문둥병이 다 나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죠. '다 나았네, 너무 좋아. 너무 감사해.'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냥 갔다는 말입니다.
마치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고, 오직 장난감 가지고 노는 데에만 흐뭇해하는 아이처럼 자신에게 그 기쁨을 준 사람이 누군지, 아니면 자신에게 그 기쁨을 준 근본적인 대상자가 누구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이와 같은 경우가 너무 많아요. 내가 왜 이 은혜를 누리고 있을까? 내가 왜 이 기쁨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왜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을
까? 하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며 그 축복과 은혜를 주시고 이해를 주시고 또 우리들을 은혜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생각해도 곧 잊어버리고 곧 마음속에 생각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의 기쁨과 감사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와
같은 한명의 문둥병 환자처럼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걸인을 베드로 요한이 일으켜 세웁니다.
“은과 금 나 없거니와 나에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 사람이 일어났어요. 그 사람이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어요. 솔로몬 행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려고 구름떼같이 모였어요. 궁리 끝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어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어요.
그랬더니 모두가 ‘우리가 어찌 할꼬’ 하고 마음이 찔려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러니 결국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운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와 방편과 순차로 삼으셨던 겁니다.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영광의 역사를 주시고,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을 때 분명히 어떤 계획이 있는 거예요. 우리를 낫게 하시고, 그 낫게 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백성을 구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순차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도 보면 이 문둥병 환자를 고쳐주셨으면 그들이 고침 받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더 있어져야 할 것이지요. 그런데 아홉 명은 그 뒤 순서는 잊어버리고 뿔뿔이 갔다 이말 입니다. 한사람은 예수님께 와서 머리를 숙이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라는 책을 보셨을 겁니다. 이 리어왕이 처참한 지경이 되어서 왕이지만 모든 권세를 다 잃고 그렇게 사랑하던 딸들에게로 가죠.
그런데 그 딸들마다 다 배척을 합니다. 마지막 사랑했던 막내딸에게도 가서도 배척을 당하게 되지 않습니까? 너무 괴로워서 독백을 하잖아요.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를 가진 것은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로운 것을 가지는 것과 같더라.>
정말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를 가진 것은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로운 것을 가지는 것과 같다라고 고백하면서 정말 그 독백 속에 가슴 쓰려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은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세어져 가는 것 같아요. 머리카락이 희어져 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 사랑도 희어져가고, 사람의 마음에 은혜의 빛도 희어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의 대가로 비수같이 날아오는 아픈 상처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한 기대도 접으려고 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도 접으려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보고 마음이 많이 상심하셨던 거예요. 한사람만 이렇게 돌아오니까. 돌아온 사람은 원래 이방인이었죠.
정말 어떻게 생각하면 그 고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유대인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 당시 사람에게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와 같은 사마리아 사람 - 이런 사람이 돌아왔단 말입니다.
여러분 큰 배가 움직이려면 기관실이 있고, 기관실에서 동력을 발생해 배는 추진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번듯하게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차 세계대전 때 유태인들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처참한 수용소 생활을 한 것을 우리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숨은 장소>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는데, ‘커리’ 라는 사람인데 수용소에서 죽음을 방불케 하는 이와 같은 고통의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잖아요. 그런데 먹을 것도 없고, 그러니 배도 고프고, 춥고 정말 찌는 듯한, 모든 면에서 최악으로 열악한 상태인데 가뜩이나 거기에 벼룩이 또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이거 정말 사람에게 피를 빨 것도 없는데 벼룩까지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나’ 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이 괴로워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방에 벼룩이 많아서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독일군 간수가 이방에 잘 들어오질 않아요. 이 방에 들어오면 벼룩이 많으니까 빨리 지나가야지. 그래서 그 방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 지속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고통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기쁨이잖아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일학교 선생님들 여기 많이 계시죠? 여러분 그런 생각 들지 않아요? 난 양심의 가책을 많이 받아서 내가 일주일 내내 이렇게 살고 어떻게 주일날 가서 애들한테 “너희는 믿음대로 살아라. 너희는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하고 내가 어떻게 이렇게 전할 수 있을까.”
하면서 너무 괴로워하죠? ‘내년에는 그만 둬야지.’ 꼭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년에는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생각 안하고 ‘내년에는 그만 둬야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성가대도 그렇죠. “내가 일주일 내내 이렇게 엉망으로 살고 어떻게 주일날 가서 성가를 해.” 이런 사람 많죠?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마음 괴롭고 어렵지만 그게 우리에게 끈이 되어서 우리를 지지해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내가 성가대 하는데, 내가 최소한 여기까지는 나가면 안 되지. 내가 그래도 애들을 가르치는데 여기 까지는 나가면 안 되지. 그게 결국 우리를 매어주는 끈이 되는 것 아닙니까?
괴롭고, 고통스럽고, 마음에 가책되고, 그런 모든 것이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을 봅니다.
눈물과 슬픔과 아픔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감사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네 번 감사하는 것이 나와요. 그런데 예수님이 감사하는 거 보면 거의 다 어려운 상황에서 감사합니다. 너무나 모든 것이 잘 풀려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가운데서 하는 거예요.
첫째는 사람들을 먹이고 싶은 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누가 조그맣게 가지고 왔는데 물고기 말라빠진 것 두 마리하고 그 보리떡 다섯 개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거예요. 이건 비교가 안돼요. 사람들에게 무언가 먹을 것을 주고 싶었는데 정말 하잘 것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놓고 감사하고 그 감사의 기도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또 한 번 뭐죠? 마음속에 정말 진노하시는 거예요. 정말 예수님께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결실이 없어요. 실망 속에서 정말 고라신아 벳새다야 정말 너희가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으리라 하면서 가슴 아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진노의 순간에도 감사했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니이다“ 그 가운데 감사한 겁니다. 왜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교만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어린아이들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하는 거예요. 이 어린것들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들은 그래도 복음을 전하며 희희낙락하는 것을 보니 감사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진노하는 순간에도 감사하고 있잖아요.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만 복음을 전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결국은 그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요만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예수님께 교육받고 훈련받았던 그 제자들이 온 세상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했습니다.
이미 죽어서 시체 냄새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여 내 말 들은 것을 감사하나이다. 끝나버린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감사하잖아요.
이미 십자가의 쓴 고난을 당하실 것을 눈에 뻔히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또 떡을 떼어 사례하시고, 이 사례가 무엇이냐면 감사히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어려운 고통을 앞두고도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 이와 같은 은혜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감사의 짝은 다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 번째 돌아와 감사하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예요.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묻잖아요.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으시겠어요? 안온거보면 어디로 갔겠지요. 어디 있느냐? 그 말은 예수님 마음에 심히 섭섭하셨던 것입니다. 이방인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던 너희들은 감사조차 하지 못하느냐. 마음에 섭섭하고 있던 거지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한명 찾아온 이방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하는 자를 극구 칭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붙잡고 닿은 결과 그 병이 나았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깃을 만졌느냐.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렇게 사람이 밀리는데 누가 옷깃을 만졌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다 말씀하실 때 이 여인이 마음에 찔려서 예수님께 고백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덜덜 떠는 이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가 병에서 건져 건강할찌어다> 라고 말씀하시지요.
즉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 앞에 이와 같이 간절히 자기가 얻은 은혜를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에서도, 또 때로는 감사한 마음에서도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얘기치 못했던 이차적인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표현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 하는데 모든 것은 기회가 있을 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여러분 기회 있을 때 하십시오.” 헌신도 기회 있을 때, 봉사도 기회 있을 때, 나누는 것도 베푸는 것도 기회 있을 때 하시라고 말씀드리지요. 나중에 내가 그걸 못했어.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기회 있을 때 하자 이 말입니다.
감사도 기회 있을 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입니다. 지난주에 이러저러하게 바빠서 제가 식사를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점심을 먹어야겠다 해서 혼자 가까운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왔는데 칼국수를 먹었어요. 제가 칼국수 좋아하거든요. 심방가면 칼국수 열흘 동안 먹어야겠네. 칼국수는 좋아하는 데요 지난주에는 칼국수를 가져왔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잖아요. 참 맛있겠다 생각했는데 칼국수 먹으려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보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어머니 생각이 나요.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저의 어머님이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시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어머님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 또 오는 이렇게 어머님 생각이 나나. 생각했더니 저의 어머님이 칼국수를 그렇게 좋아하셨거든요. 굉장히 맛있어 하셨어요. 어쩌다 시간이 났을 때 아파트 아래서 전화해서 “어머니, 시간이 있는데 잠깐 내려오세요.”그래서 모시고 가서 사드리면 굉장히 좋아하시는 거예요. 뭐 한번 드셔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시간된다고 점심 같이 모시고 나가니까 좋아하시는 것이겠죠.
이상하게 어머님 생각이 나더라구요. “어머님이 참 좋아하셨는데... 내가 시간이 없다고 이리저리 핑계하지 말고 조금 더 자주 모셨으면 참 좋았을 것을.” 언제나 지나고 후회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칼국수 먹는 내내 그런 생각이 나더라구요. 아무리 생각이 나면 뭘해요. 이미 어머님은 세상을 떠나고 하늘에 계신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세상의 모든 삶이라는 것은 결국 기회가 있을 때 해야지 시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이라는 것은 기회가 있을 때 하는 거지요. 기회 지나가면 모든 것이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느끼고 표현 할 수 있는 것도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호흡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을 때,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을 때죠. 우리가 언제 감사해요. 기회 있을 때, 내 앞에 무엇인가 있을 때, 내 마음이 아플 때, 내가 기쁠 때, 정말 내가 마음 바꾸면 감사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감사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어야죠. 어떤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해요. 언젠가는 이런 시간들도 우리에게 지나가리라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요새 이런 시 읽으시죠. 굉장히 많이 팔린 시집인데.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 아마 읽으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제가 한 번 읽어 드릴게요. 딱 다섯줄의 짧은 시입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래요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상처를 받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우리는 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감사절이라서 한 절을 더 붙였으면 좋겠어요.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감사하라, 지금이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그래요. 우리는 지금이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 마치면서 우리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걸까? 하는 것만 말씀드리지요.
우린 첫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해요. 우리에게 호흡 주시고, 믿음 주시고, 은혜 주시고,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되죠? 사람에게 감사해야 하죠.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를 통해서 옵니까? 사람을 통해서 임하지 않으세요.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사람을 통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 옆의 사람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요.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여러분 교회 의자에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저쪽으로 피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겠습니까? 여러분 자꾸 옆자리에 앉아요. 그러면 마음이 놓이잖아요. 내가 무슨 범죄형은 아닌 것 같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감사해요.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죠. 늘 그런 생각해요.
자, 우리 옆에 인사 한 번 합시다. “내 옆에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정말 옆에 있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해요. 그리고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배드리는데 여기 아무도 없고 여러분 혼자 있고 여기서 제가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교회 개척하면서 오래 기도한 것 중에 하나가 뭔지 압니까?
"하나님, 제가 새벽기도 드릴 때 어떤 사람 딱 한 사람만 앉아 있고 제가 설교하는 일 없게 해 주십시오“ 제가 오래 그렇게 기도 했다니까요.
그런데 정말 그 기도가 응답됐어요. 처음에 새벽기도 나갔을 때부터 두 사람이 나오더라구요. 두 사람이 늘 같이 나오더라구요.
‘기도는 오래 하고 볼 거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에게 감사해요. 사람에게 감사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도 절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에게 감사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 삶의 주변 여건과 상황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그것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심정으로 내게 주어진 여건과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감사해야 돼요.
내게 마음에 맞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이것을 통해서 내게 어떤 것을 이루시려는가 생각해야지요.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다시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감사하라, 지금이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