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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감사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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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 소유나 환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행복은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는 비유컨대 ‘행복을 느끼는 입맛’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무조건 행복합니까? 입맛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만일 입맛이 없다면 진수성찬은 그림의 떡이요, 심지어는 고통을 주는 애물단지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찬밥 한 덩이에 김치만 있어도 입맛이 있는 게 훨씬 더 행복합니다.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지능지수(Intelligence Quotient)가 높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지수(Thanksgiving Quotient)가 높으면 반드시 행복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평소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감사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피조물로서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당연한 일입니다. 동시에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명심하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 감사 신앙을 회복하시고, 감사 지수를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나 자신도 충만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감사와 관련해서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나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1]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

  감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타락한 인간성 때문입니다. 타락 후 죄로 가득해진 마음 속에 감사가 자리 잡지 못하는 겁니다. 롬1:21 보면 타락한 인간성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감사치 않는 인간성이 문제입니다. 말세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화됩니다. 딤후3:1~2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 ”
 
성경의 예를 봐도 그렇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 공급해 주시고 보살펴 주셨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쉬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은혜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예를 보면 90%나 됩니다. 누가복음 17장 보면 예수님이 문둥병자 10명을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명 중 오직 1명만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표시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탄식하십니다. 눅17:17 “ ...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처럼 은혜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피조물로서 성도로서 합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짐승과 같은 사람, 심지어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하나님이 은혜 베풀어서 우리 인간을 존귀케 해 주셨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짐승과 같다는 겁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소나 나귀도 제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의 백성이 주인 되신 하나님을 몰라보는 것은 한심스럽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은혜가 중지됩니다.
9명의 문둥병자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병은 고쳤지만, 더 이상의 은혜는 받지 못했습니다.
미국 어느 도시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무단 횡단을 하는데 과속으로 트럭  이 달려옵니다. 청년은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걸어갑니다. 마침 한 신사가 그 광경을 보고 황급히 뛰어 들어가 청년을 구해줍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감사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유유히 가버립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행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비난합니다. 그 후 2주가 지나서 그 도시의 법정에 재판이 일리고 있었습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한 청년이 청년 최후의 진술을 하는 순간입입니다. 그는 재판장을 똑바로 보는 순간 많이 본 사람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두 주 전 자기를 구해준 신사임을 기억해냅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재판장님! 저 몰라보시겠습니까?” 재판정이 가만히 보니까 바로 그 청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기억나네. 지난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구세주의 역할을 했지. 하지만 오늘은 당신의 심판자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구먼.”

물론 그 청년이 미리 감사를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법을 초월해서 봐 줄 수는 없었겠죠. 그러나 그런 무례한 태도의 청년은 당연히 부정적인 정신 상태였을 테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이처럼 매사에 부정적이고 일이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보고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은혜를 받고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잘 헤아려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를 잘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간혹 고난을 통해 은혜를 헤아리게 합니다. 고난의 때에 역설적으로 은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지선 자매를 아시죠. 대학 4학년 때 귀가 길에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한 후 화염에 싸여 심한 화상을 입은 자매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 수술을 거듭했지만 얼굴을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비관한 나머지 죽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오히려 감사하는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때는 수백만 명이 그의 홈피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겪으며 느낀 소감을 적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나는 알게 되었다. 짧아진 8개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눈썹이 없이 무엇이든 눈에 여과 없이 들어가는 것 경험을 하면서 작은 눈썹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1인 10역을 해 주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참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평소 모습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의 결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르는 채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족한 은혜라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잊지 않고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은혜를 받고서 감사하는 사람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 비하면 은혜를 받고서 감사하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 정도만 되도 신앙이 좋은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도 까맣게 사는데 말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은혜를 받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병을 치유 받은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다시 와서 감사함으로 그 이상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고 영생하는 자리에 이르렀을 겁니다. 말하자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면 은혜 위에 더욱 더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확대재생산을 하게 합니다. 스펄전 목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불행 중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난다. 형통 중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부디 이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갈수록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은혜를 받지 못해도 감사하는 사람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는 대개 낙심, 하나님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바로 그런 감사의 사람들을 소개해 줍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제국 내의 많은 나라와 족속을 통합하기 위해 두라 평지에 금 신상 만들어 놓고 각 나라와 족속의 관리들을 집합시킨 가운데 그 신상 앞에 절하도록 강요합니다. 절대 군주의 엄명입니다. 어기면 봉변, 아니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모두 다 절을 합니다. 그런데 세 친구들은 유일신 여호와를 믿는 신앙인이었기에 절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왕 앞에 붙잡혀 갑니다. 왕은 노발대발하며 심문합니다. 짐짓한 일인지, 즉 고의적으로 한 일인지 묻습니다.(14절) 그리고 마지막 기회를 줍니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절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에 넣어 죽이겠다는 협박도 합니다.(15절) 그러나 세 사람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16절) 오히려 왕 앞에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17절~18절.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며, 만일 도와주지 않고 순교를 당하게 하셔도 감수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만 순교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조차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감사’입니다.

그러자 분을 못 이긴 왕은 명령을 내립니다.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하고 풀무불에 집어넣습니다. 그때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왕이 보고 있는데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겁니다. 단3:24절 보면, 왕은 네 번째 사람이 ‘신들의 아들’ 같다고 외칩니다. 다신교에 물들었던 자신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네 번째 사람을 가리켜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자는 그냥 단순히 천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성경적으로는 규명이 안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방 왕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친구는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불탄 냄새조차 없는 가운데 풀무에서 나옵니다. 그 광경을 본 왕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각 나라와 족속에게 공문을 보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조롱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세 친구는 더욱 높여집니다.(단3:30절)

  세 친구는 목숨을 잃을 것조차 각오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고난조차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원리입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실은 감사하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말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프랑스인 쟝 도미니크 보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여년전 잘 나가던 사람입니다. 세계적인 패션 잡지 <엘르 Elle>의 편집장으로 저널리스트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퇴근 길에 뇌혈관이 터지며 뇌졸중에 빠집니다. 뇌졸중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자물쇠 증후군’에 걸려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 인체의 기능이 한꺼번에 정지되고 꼼짝 못하게 됩니다. 왼쪽 눈만 움직이고 귀로 들을 수 있을 뿐 사지가 마비되고  혀까지 마비되어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망을 잃지 않고 대필자를 세운 채 왼쪽 눈을 깜박거리며 작품을 씁니다. 1년 3개월 동안 무려 왼쪽 눈을 20만번이나 움직여 가며 <잠수복과 나비>라는 작품을 씁니다. 그 책은 20만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가 만일 절망했다면 그 작품은 세상이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한 말입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당신은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는 세 종류의 사람들 중 어디에 속합니까? 자문해 보시고 최소한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감사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세 찬구들처럼 놀라운 승리를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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