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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감사와 찬양의 생활 (시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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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넘치는 풍년을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매년 너무 풍년이 들어서 문제입니다.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우리는 효과적으로 감사하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감사의 시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 번이나 반복되는 어구인 “나아갈지어다”, “그 문에 들어가며”,  “그 궁정에 들어가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시편은 사람들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올라갈 때 사용되었던 노래의 가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본 시를 감사의 시라고 부릅니다.

1-3절은 “기쁨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불러라,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정감 넘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알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것이고 그의 백성이고 그의 양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부듯하고 만족하고 감사함이 가득차오는 것을 느낄 수 가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까.

그리고 4-5절을 보면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찬양하고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지 못해서 안달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아무 곳이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찬양과 감사가 있는 곳에 주어집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찬양하는 곳에 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6장을 보면 다니엘이 모함에 걸려 위기를 맞게 됩니다. 전처럼 창문을 열고 또 기도하면 사자굴속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또 기도했습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질 줄 알면서도 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 상황이 감사할 상황입니까. 그런데도 다니엘은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 26장을 보면 예수님 일행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만찬을 마치고 산에 오르실 때 찬미하며 올라갔다(30)고 했습니다. 그 시간은 찬양이 나올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찬미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완수하고 고난의 길을 무난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강조한다.

성경을 보면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여러 곳에서 강조하십니다. 골 3:15절을 보면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16-7절을 보면 “너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엡 5:4절을 보면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롬 6:17, 대상 16:4,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살후 1:3절에서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또 시편에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대상 16:25절을 보면 “극진히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찬양하라는 말씀이 300여 번 감사하라는 말씀이 똑같이 300여 번이나 나옵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 정신, 자세는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감사하라, 찬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이 질서와 정신과 은혜를 잊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의 질서마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정신의 질서가 하늘에 감사하고 부모에게 감사하는 일입니다. 하늘에 감사하는 사람은 부모에게도 감사하고 스승에게도 감사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모든 정신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감사한 마음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작용으로 부모를 버리고 스승이 학생들에게 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주 막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하늘에 감사하고 부모에게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감사의 대상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알고 뒤늦게 후회를 합니다. 그래서 때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오늘 “있을 때 잘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은혜를 모르는 시대입니다. 참 불행한 시대입니다.

어느 골프장에서 있었던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골프를 치는데 앞 팀이 너무 느렸습니다. 공을 치는 것을 보니까 돈내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앞 팀이 너무 신중하게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늘 집에 와서 쉬는 동안 물었다고 합니다. “돈내기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심각하게 치느냐”고.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우리는 모두 형제인데 오늘 골프에서 지는 사람이 앞으로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거든요”하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시대의 단면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면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감사를 잃어버린 삶의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라고 이곳저곳에서 명령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 속에서 강한 바이러스가 나온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나 생각이나 언어에서는 강한 바이러스가 나옵니다. 그 바이러스는 소망을 주고 삶을 일신시키는 바이러스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웃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웃음이나 기쁨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엡 5:18절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찬송하며 궁정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왜 자꾸만 성경이 찬송하고 감사하라고 하느냐 하면 그 감사와 찬송 속에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건강하게 하고 소생하게 하고 기쁨을 주고 삶을 향상시켜주는 강한 바이러스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말 속에는 몸속에 있는 암 균도 죽이게 하는 강한 바이러스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언어 속에는 실패도 딛고 일어서게 하고 어두움을 밝게 하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고 불평을 잦아들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또 다른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게 하는 강한 바이러스가 들어 있습니다. 또 감사과 찬양의 삶 속에는 삶을 일신시키고 창조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이런 강한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로 천량 빚도 갚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복음에 보면 임금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왕궁을 나오다 자기에게 조금 빚진 자를 만나서 빚을 갚으라고 멱살을 잡고 고발해서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신하가 다시 왕에게 불려가 혼난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까. 감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망하게 만드는 강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는 곳에는 불평이 들어오고 짜증이 굴러오고 원망이 굴러오고 불화를 부르는 강한 바이러스가 작용합니다. 불평하는 곳에는 밝음이나 따뜻함이나 전진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입는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지구상에서 감사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민족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인들 일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감사가 몸에 배고 언어에 대화에 감사가 배어 있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땡큐라는 말은 미국인들의 언어입니다. 미국인들은 말, 언어, 습관이 모두 땡큐로 통합니다. 이 땡큐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감사의 삶을 조성하고 복을 받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인들이 그렇게 잘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미국이라는 나라는 참 엄청나게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땅도 넓습니다. 넓어도 땅 나름입니다. 오늘 중국 땅도 넓지만 그 넓은 땅 중에서 대부분은 사막입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그 사막에서 일어나는 먼지 때문에 우리나라까지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 땅은 넓기도 하지만 그 넓은 땅이 모두 기름지고 풍성하고 자원이 가득 들어있는 땅입니다. 감사의 정신과 마음과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복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미국인들의 이 감사의 정신은 성경에서 나온 정신입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을 창건할 때 이 감사의 정신으로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도 미국인들의 생활에서 나온 절기입니다.

1620. 12. 26. 청교도 102명이 미국 대륙 플리머스 해변에 상륙하였습니다. 117일간의 항해를 끝낸 청교도들은 마침내 배에서 내립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모래를 날리며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곧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드린 감사의 기도내용이 6가지였습니다. 첫째는 180톤급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에 평균 시속 2마일로 117일간 무사히 항해하게 됨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117일간 항해하는 도중 2명이 죽었지만 한 아기가 태어남을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태풍이 불어 돛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지만 그래도 파선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네 번째는 큰 파도가 칠 때 여자들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2번이나 발생하였지만 모두 구출된 것을 감사합니다. 다섯 번째는 신대륙에 도착해서 접근했을 때 일부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을 못하고 배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지만 그 후 무사히 하선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여섯 번째는 3개월 동안 항해하는 중에 누구 하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사람이 한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배에서 내려 그해 겨울 농사를 짓고 집단생활을 하는데 초대지사로 임명된 브레드 포드라는 분이 새 땅에 정착한지 3년 만에 이렇게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금년에 넘치는 수확을 주셨다, 옥수수 밀, 콩, 호박, 채소를 가꾸고 사냥하고 생선과 조개를 넉넉히 얻도록 축복해 주셨다. 야만인들의 습격에서도 지켜 주셨고 질병에서도 건져 주셨다. 무엇보다 우리의 양심을 따라 자유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나는 오늘 모든 순례자들에게 선포한다. 주후 1623. 11월 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어른과 아이들은 전원 모여 이 모든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 이것이 오늘 미국인들이 복을 받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이런 삶속에, 언어 속에, 생각 속을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는 생각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에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863년 남북전쟁이 극렬할 때 링컨 대통령은 그날의 추수감사절을 미국의 국경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모든 미국인은 이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자.”그리고 매년 그날만 되면 역대 대통령들이 추수감사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관례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생각과 환경과 처지를 보고 해석하는 기준이 다르고 판단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런 전통을 가진 미국인들도 오늘은 과거보다 여건이 더 좋아졌는데도 불평이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년 전의 미국인들은 꼭 바라는 것이 16가지였는데 오늘 미국인들은 바라는 것이 92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만족함이나 감사한 마음이 울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바네트 깁슨이라는 사람이 “제발 부탁하노니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법부터 배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감사가 성숙한 삶을 이루게 한다

성숙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압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성숙해 보이질 않습니다. 식사할 때 무조건 앉자마자 숟갈부터 들고 먹는 사람들을 보면 야만인 같이 보입니다. 감사한 마음, 자세, 정신은 성숙함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성숙한 삶을 이루어줍니다.

손양원 목사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을 사람들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이분이 진정한 감사를 표현하신 분입니다. 1948. 10월 여수 순천반란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땅의 좌익세력과 남로당 조직책들이 주동이 되어 난동을 부려 일어난 사건인데 그때 경찰과 그 가족 그리고 양민과 우익인사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습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의 25세 19세 된 두 아들이 한날한시에 총살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 두 아들 장례식 때 그 아버지 손양원 목사가 고백했다는 감사의 기도문이 감동을 주고 그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두 아들을 잃고 그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고백한 이 기도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주는 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에서 밝힌 감사의 고백이 9가지입니다.

1. 나 같은 죄인을 통해서 순교자식을 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2. 허다한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하필 나에게 맡겨주셨는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3. 3남 3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하나님께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4. 한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의 순교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5. 예수 믿다가 병들어 죽는 것도 복이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당해 순교 당하였으니 감사드립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이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믿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의 8가지 진리와 신애를 찾을 수 있는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는 그 후 두 아들을 죽인 원수 강재선을 구명하여 석방시킨 뒤 양자로 입양하고 그를 신학교에 보냅니다. 그리고 자신도 2년 후에 터진 6,25때 공산군에게 순교당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그 모습이 사랑과 감사의 화신으로 사랑과 감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얼핏 보면 속물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는 행동이 짐승만도 못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 너무나 위대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또 그 속에 감사한 마음을 거지고 살아갈 때 손양원 같은 위대한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는 모든 것의 기초정신이고 강한 바이러스를 배출시키는 정신입니다. 이 감사함에서 우러나오는 바이러스가 삶을 일신시키고 불평을 소멸시키고 음지를 양지로 어두움을 밝음으로 멸망을 구원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일신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찬송을 부를지어다.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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