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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사람이라도 더 (고전 9: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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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전투를 마치고 연합군 병사가 자기의 막사에 돌아 왔을 때, 동료 병사 중에 자기 고향 출신으로 같은 부대, 같은 중대에 배속된 전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중대장에게 건의했습니다. 고향 친구가 보이지 않는데 혹시 실종되었을지도 모르니 전투하던 곳으로 다시 가서 친구를 찾아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대장은 “너마저 위험에 처할텐데...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느냐! 죽지 않았어도 깊은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가도 소용없을 것이다!”하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사는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병사는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총알이 빗발치는 격전지로 달려갔습니다. 뒹구는 수많은 시체들을 찾아 헤맨 끝에 총에 맞고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는 친구를 드디어 찾았습니다. 잠시 그 친구와 시간을 보냈고 그 친구는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병사는 자기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중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중대장이 말합니다. “거 봐라, 어차피 죽을건데 그 위험한데를 무릅쓰고가서 그런 고생을 하느냐.”
  그러나 병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중대장님, 제가 그 친구를 찾아간 것은 백번 잘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 그 친구는 숨을 헐떡거리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그 친구가 숨을 거두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 늦가을, 우리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없을까요?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우리의 위로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없을까요? 아니 우리들이 찾아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그런 이웃들은 없을까요? 여러분, 그 이웃들이 생각날 때 주저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서 찾아가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도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는 이 전도의 사명을 일생을 살면서 감당해야 할까요?

  첫째,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엄숙한 명령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전도의 명령 앞에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출근하든, 가게를 운영하든, 사업을 하든 여러분은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영혼을 낚는 거룩한 어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하는 일은 주님의 명령이고, 우리의 사명이지만 그 일이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되어 자신의 일생을 전폭적으로 들여 복음 증거하는 일에 헌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도하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태풍에 시달리기도 하고, 강한 매를 수없이 맞았고, 돌에 맞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 유럽을 뛰어다니고, 배를 타고 항해한 거리를 따져보면 지구를 한 바퀴 돈 거리랍니다. 그는 그 일을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그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복음만 증거할 수 있다면 내 생명을 바쳐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일을 즐겁게 했습니다. 좋아서 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즐거워서, 좋아서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이 어떤 표현을 쓰고 있습니까? 내가 부득불 할 일입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16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부득불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기쁘게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에게도 때로는 복음 전하는 일에 장애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고, 때로는 인간적으로 하기 싫을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그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득불 감당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전도하자고 하면 많은 분들이 억지로 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행복하고 자발적으로 하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오늘 성경의 말씀은 즐겁지 않아도 그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즐거워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전도의 사명입니다.

  여기 계시는 성가대원에게 묻겠습니다. 성가대 하는 게 좋으시죠? 좋아서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아마 10번 중에 9번은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성가대 석에 앉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요? 당연히 앉아야 하지만 ‘오늘은 아이도 아프고 교회 안 가고 성가대 안 앉았으면 좋겠다.’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이기고 그 자리를 지켰을 때 은혜가 되고 즐거움이 되지만 인간적으로는 싫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1부 성가대는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새벽같이 나와야 하니까요. 이 추운 겨울에 왜 새벽같이 나가야 하나 해서 가기 싫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가대원도 때로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좋아서 다 하고, 하기 싫다고 다 안하면 성가대가 운영이 되겠습니까?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하는 것, 그것이 사명입니다. 하기 싫든 좋든 그것이 사명입니다.

  우리에게는 전도의 사명이 주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론 그 일이 하기 싫어도, 피해가고 싶어도 할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사명이 전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예수님이 너무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 언덕을 오르다가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에 짓눌렸습니다. 그 옆에 구레넷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 옆에 로마 병정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으니 예수님을 비키게 하고 구레넷 사람 시몬에게 대신 지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억세게 재수가 없습니다. 구경하다가 십자가를 지다니요... 그는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생애에 불행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것은 시몬의 생애에 놀라운 축복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정이 변했습니다. 물론 그 자신도 구원받았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것이 그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는 기뻐서도 하지만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어느 주일, 오후였습니다. 한 사람이 오전에는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전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른 날은 바빠서 못하니 주일만은 한 시간 전도하는 계획을 세우고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날씨도 춥고 비도 오고 몸도 으슬거리고 감기 기운도 있었습니다. 가기 싫은 마음에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니 일곱 살 짜리 아들이 와서 말을 겁니다.

  “아빠, 오늘은 왜 전도 안 나가세요?” 
  “비도 오고 몸도 으슬거리고... 오늘은 가기 싫네.”
  “그럼 아빠, 이렇게 비가 오고 추운 날은 하나님이 전도하는 것을 안 좋아하시나보죠?”
  “아니... 그건 아니고 아빠가 좀 피곤해서...”
  “그럼 아빠! 대신 제가 전도하러 가면 안되요?”
  “그래? 음... 그럼 조금만 가지고 가서 얼른 전도지 돌리고 집으로 와야 돼!”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아빠를 대신해서 전도하러 갔습니다. 비가 오기 때문에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간혹 만나는 사람에게 “아저씨, 예수님 믿으세요!”하고 말을 건네고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다 돌리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았습니다. 만나서 누굴 주려는데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집 대문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마지막 장을 저기 사는 분에게 드려야겠다.’싶어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한번 눌렀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눌러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눌렀더니 그제서야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이 삐걱 열리는데 보니, 아주 초췌한 모습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중년의 여인이 나왔습니다.
  어린 소년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고는 전도지를 전해주며 “아줌마도 예수 믿으세요, 구원받으세요, 예수 믿으면 행복해져요!”하고 인사를 건네고는 종종걸음을 치며 집으로 왔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주일,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후 광고 시간에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오늘 간증하고 싶은 분 있으면 나와서 말씀하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뒷자리에서 한 중년 여인이 말끔한 차림을 하고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2년 전에 사랑하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달 전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다가 제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없습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저는 외로워서 살 수 없었고, 우울증이 재발해서 죽고 싶은 생각 속에 늘 살았습니다. 비 오는 지난 주일 오후에 저는 자살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해 놓았던 농약을 막 먹으려는 찰나에 누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한번 누르고는 가겠지 했는데 두 번째 또 눌렀습니다. 조금 있다 가겠지... 세 번째 또 울렸습니다. 죽는건 좀 있다 죽어도 되니 누가 왔나 얼굴이라도 봐야지 하고 나갔습니다. 나갔더니 거기 천사가 서 있었습니다. 그 소년이 전해주는 전도지를 받는 순간, 제 눈에 한 문장이 들어왔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저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에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주일학교에 다닐 때 우리 교회 앞에 써 있던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다 내어드렸습니다. 제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이제 죽지 않고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교회에 나와서 처음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도하고 싶어 전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기 싫어도 부득불,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내 죄를 다 담당해주셨습니다. 내가 매달려야 할 십자가의 자리에 주님이 매달렸습니다.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그 분이 맞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수치와 모욕을 그 분이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 분이 내 대신 그 모든 고난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내 무거운 짐을 지신 것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나도 이제 그 분이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고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주 전에 C.T스터드 선교사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 출신의 지식인이었고 장래가 촉망되는 스포츠 스타였습니다. 그는 보장된 출세의 길을 버리고 오지에 선교사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이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모든 출세가 보장된 일들을 던져 버리고 선교사로 가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어떤 일도 결코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다면 내가 그 분을 위해 하는 이 정도의 일이 무슨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희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에 보니,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종이 되셨다면 우리도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종의 모습으로 서야 하지 않을까요?

  사도바울은 바로 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아멘.

  그렇습니다. 그는 자유한 사람.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문하 출신이고 명망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자유를 던져 버리고 오히려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왜 입니까?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던 그가 스스로 종의 자리에 섰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의 축복을 함께 나누고자 함이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자유인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과 자유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예속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복음의 종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전도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종종 교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집사인데... 권사인데... 하며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집사로, 권사로 해야 되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우리는 권리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까짓 권리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 전하는 선교사님들을 보면 자기 나라인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영국에서 얼마든지 넉넉하게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공부도 많이 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한국 땅에 100년 전에 들어와서 병으로 죽고, 자식을 잃고, 아내를 잃으며 선교의 가시밭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종 된 모습으로 섰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 외국인 선교사가 100년 전에 원산에 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아주 시골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시골에서 농민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한국어를 배우고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합니다. 자기 나라의 개량된 농사법을 전달해주고 같이 생활합니다. 그 분이 얼마나 한국말에 능통했는지 한국말로 농담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 분이 장날에 시장엘 가면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한답니다. 시장에서 잣을 내어 놓고 파는데 그 분이 “이게 뭐요?”하고 물으니, 주인이 “자시오!”하니, 맛있게 자셨답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갓을 보고 “이게 뭐요?” 하고 물었다가 주인이 “가시오!”라고 대답하면 갈 길을 총총히 갔답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했던 선교사의 모습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와 같이 되어 섬김의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황희 정승의 이야기입니다. 황희 정승 집에 어느 날 귀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종들이 상 준비를 하는데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종은 손님이 멀리서 오셔서 배가 고플테니까 음식부터 준비했다가 바로 드리자고 하고, 다른 종은 손님이 오시면 집안을 깨끗하게 해야 하니 청소부터 하자고 하며 싸우다가 황희 정승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손님이 오면 음식을 따뜻하게 준비해서 손님에게 대접하는게 옳죠?”
  “자네 말이 옳네.”
  “아니 주인님, 그게 아니구요. 손님이 오시면 청소를 깨끗하게 하는게 옳지 않습니까?”
  “그러게. 자네 말도 옳네.”
  옆에서 부인이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으면 도대체 옳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당신 말도 옳구만”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꿀 줄 아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 이왕복 목사님이 오셔서 생활 전도에 대해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초청 잔치가 1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많은 분들이 못 들으셨을테니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생활전도는 1단계부터 6단계까지 있습니다. 이제 하루에 한 단계씩 실천을 하시면 다음 주일 에는 한 분 이상씩 책임지고 모시고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말하는 생활 전도의 첫 단계는 먼저 만나는 것입니다.

  일단 만나야 무언가가 됩니다. 접촉해야 합니다. 일단 사람을 만나야 전도가 가능합니다. 만나지 않으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일단 사람을 만나십시오.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말입니다. 대만에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가씨가 떨어진 거리에 있어서 늘 편지를 보냈습니다. 매일 편지를 한 통씩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무려 700통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청년과 그 아가씨가 결혼했을까요? 못했습니다. 그 아가씨는 엉뚱한 사람, 우편배달부하고 결혼을 했답니다. 700통의 편지를 전달하느라 700번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춥든, 덥든 700번을 만나면서 익숙해지고, 마음이 열리고, 대화도 하게 되면서 서로 눈이 맞아서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일단 태신자, 전도대상자를 꼭 만나서 접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선물하는 것입니다.

  갈 때 빈손으로 가지 말고 과일이든 빵이든 케익이든 선물을 꼭 가지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비싼 거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6층 식당에 가니까 바자회 때 팔던 만원 짜리 김이 있던데 그것도 괜찮습니다. 가서 전달하십시오. 선물을 받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빚진 심정이 생기고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부담도 있지만 말입니다. 또 김치를 담궈서 갖다 줘도 좋고, 부침개를 맛있게 나눠 먹어도 좋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 분의 고민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분도 무슨 고민이 있을텐데 그 고민이 뭔가 물어보는 것입니다. 대개 고민은 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내 고민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 집 애들은 이렇게 속을 썩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면, 그 분도 맞장구를 치며 공감대가 형성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이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을 때 그 문제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다 있습니다. 저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문제가 있습니다. 성가대 앉은 분들 찬양만 하니까 천사 같지요? 집에 가면 다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들을 때 서로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그럴려면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자리에서 내 부끄러움을 먼저 들추어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아들이 군대에 갔다 오더니 갑자기 이상해 졌습니다. 그 이유는 군대 가기 전에 여자친구랑 서로 커플 반지도 주고 받고, 커플 티도 입고, 제대하면 결혼하자고 했는데 이 아가씨가 그만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 버렸습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습니다.
  첫사랑이었던지라 상처가 너무 커서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고, 학교도 가지 못합니다. 방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죽을 것 같답니다. 엄마가 가서 설득을 해보고, 빌어도, 밥을 안 먹고, 학교도 안갑니다.

  남자끼리 해결해 보라고 남편을 들여보냈습니다. 남편이 들어가서 설득을 해 봅니다.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여자 때문에 걱정을 하느냐고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때 아빠한테 불현듯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한 가지 고백할게 있는데 말이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아빠도 엄마 만나기 전에 첫사랑이 있었단다. 근데 첫사랑이 이루어 지지 않고 그 여자가 다른 남자하고 결혼해 버려서 아빠도 마음 고생 많이 했단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별 것도 아니더라. 그런 거 다 겪는 거야.”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빠도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그리곤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학교를 가더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하도 이상해서 “너 어떻게 해서 갑자기 변했냐?” 했더니, “아빠가 고백을 했어요.” “무슨 고백?” “아빠가 첫사랑이 있었다는 거에요...”

  그날 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부부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어찌 되었든 아이는 마음의 병을 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털어 놓을 때 상대방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문제가 뭔지 알았으니까 교회 나오면 해결됩니다, 예수 믿으면 해결됩니다, 자식의 문제든 건강의 문제든 직장의 문제든 사업의 문제든 예수 믿으면 해결됩니다라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고구마 전도법의 김기동 집사님 잘 아시지요? 그 분이 전도하러 길을 가는데 점집이 하나 있었답니다. 점집 이름이 ‘작두 도사 집’입니다. 무작정 들어가서 점쟁이를 만나자 마자 “선생님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믿는 점쟁이가 어디 있어요? 별 미친 놈을 다 보겠네...” “난 예수 믿으니 너무 좋아요. 선생님 위해서 제가 기도하고 있습니다.”하고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또 가고, 그 다음날 또 가고... 몇 번을 또 갔습니다. 사정을 했습니다. 제정신이면 점쟁이한테 와서 예수 믿으라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제발 오지 말라고 해도 또 갔습니다. “예수 믿어야 좋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답니다.

  어느 날 갔더니 점쟁이가 풀이 죽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아들이 3년 동안 병원에 누워있는데 우리 아들만 고칠 수 있다면 교회 나가겠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예수를 믿어야 되고,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면 아들 문제 해결되니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고 그 분을 모시고 교회에 왔습니다. 점쟁이라고 소문내면 안되니 익명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에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이 점쟁이 형님이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이 그 동생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결국 김기동 집사님에 의해서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렇듯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간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은 예수가 얼마나 좋은지, 예수 믿고 우리 가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간증하십시오. 우리 이웃의 간증도 괜찮습니다. 간증을 통해서 그 분에게 확신을 심어 줍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새로 건물도 짓고, 추수감사절 처음으로 하는데 오셔서 떡도 드시고, 음식도 드시고, 함께 예배도 드리세요!”하고 잔치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정식으로 초청장을 전달하고 그 분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예배에 참석해서 성령의 감동 가운데 말씀 으로 마음의 문이 열리도록 그 분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 전도의 6단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결심을 하십시오. 이번 한주간은 주님을 위해서 전도하는 일에 시간을 드리겠다, 물질도 드리고, 정성도 드리겠다고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는 꼭 함께 오십시오. 꼭 한분씩 모시고 오십시오. 등록 안하셔도 괜찮습니다. 예배 한번 참석만 해도 좋습니다. 주님 말씀 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위한 주님의 관심이 여러분의 관심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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