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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의 복에 대한 감사 (마 5:4, 요 11: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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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간판이 땅에 세상을 떠난 이야기, 우울증에 걸린 남자가 자기 가족을 다 죽이고 자신도 죽을려다가 붙잡힌 애통한 이야기, 소방관이 집더미에 압사한 이야기. 매스컴을 통해서 접하는 이런저런 슬픈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어쩜 저럴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런데 성경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였으니 어찌 가당키나 할 것인가? 애통이 어떻게 복이란 말인가?

애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마5:4에 기록된 “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라고 했을 때 애통의 의미는「펜데오」란 말이다. 이「펜데오」란 헬라어는 사람의 위로로 위로가 안되는 슬픔, 즉 극도의 슬픔을 뜻한다. 아무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슬픔이란 이 애통의 단어는 구약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적용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망도 사망 나름이지 어떻게 애통이 복이 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단 말인가? 더 나아가 애통을 복으로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겠는가? 그 이유는 극도의 슬픔이 사람의 위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그때부터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애통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이면서도 역설적인 은혜이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위로란 말은「팔라칼레오」이다. 이 단어는 “곁으로 부른다”는 뜻이다. 즉 애통을 알고 애통을 느낄 때 그 슬픔에 흐느껴 우는 자는 하나님 곁으로 부르는 기회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 곁으로 나아가는 자는 슬픔과 애통이 아무리 엄청나도 하나님 때문에 위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통은 새로운 삶의 길이요, 감사를 넘치도록 해야 할 이유가 된다.

첫째, 죄의 애통은 믿음을 갖게 한다. (시51:17)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해서 운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우는 애통은 죄를 낳고 사망을 낳는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울기는 울되 죄를 애통해 하지 않는다. 교만과 부요 의식이 심령의 눈을 가리우기 때문이다. 죄를 가지고 있어도 죄를 모르고 무감각하게 산다. 죄와 더불어 일생을 같이 하기에 그 영혼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겸손히 죄를 아파하고 죄를 애통해 해야 형벌을 피할 방법이라도 찾는데 죄를 느끼지 못한다. 이는 마치 문둥병자와 같아서 손발이 뭉개져도 모르는 절망과도 같다. 문둥병의 절망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아파하고 자신이 죄 속에 있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은 살 길이 열린다. 하나님은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고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애통해 하는 자를 하나님 곁으로 부르신다. 그래서 애통해 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 믿음을 지니게 되는 복을 받은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는가?

요5:24의 말씀대로 형벌에서 상급으로, 사망의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얻었으니 복 중의 복이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죄 때문에 애통하면 멸시가 아니라 위로가 있다. 구원이 보장되는 마음을 주신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내가 나를 생각해 본다. 정녕 죄를 애통해 하지 않았다면 속죄의 은총을 믿고 구원의 위로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죄를 애통해 함이 너무도 감사하다.

둘째, 죽음에 대한 애통은 새 삶의 소망을 갖게 한다. (롬8;24)

인생을 살면서 최고의 안타까운 슬픔은 죽음에 대한 직면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별, 죽음이란 손님은 모든 희망을 다 꺽어버리는 애통을 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통곡이 새 삶의 부활을 안겨준다. 소망을 새롭게 갖게 한다.

보라.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는 마리아를 보셨다. 그리고 유대인의 우는 것을 보셨다. 그 애통은 모든 것이 끝났고 절망이라는 눈물이었다. 그렇다. 인생이란 안개요, 사라지는 연기같은 것이다.(약4:14) 인생이란 수에 칠 가치 조차 없는 흙덩어리이다.(사2:22) 실로 아침에 핀 바 되어 마르고 저녁에 시드는 들의 꽃과도 같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애통의 눈물은 허무와 절망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새 인생을 배운다. 변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았던 삶이 어리석은 것이고 영원한 소망의 삶으로 눈을 들게 한다. 예수님도 마리아의 눈물을 보시며 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시신을 찾으시며 우셨다. 주님의 눈물을 오히려 영원한 산 소망, 죽은 자를 일으키는 생명의 부활의 소망, 그 참된 소망을 모르는 인생을 향해 우신 것이다.

주님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다. 새 생명으로 걸어나오는 참 소망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죽음의 애통이 부활의 소망, 영원한 것에 대한 새 삶의 소망, 변하지 않는 소망을 얻게 하셨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바로 애통을 하다가 산 소망을 얻게 되었다.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하게 하시는 참소망의 주인이시다. 보이는 죽음은 애통해 하면 그 절망 속에서 다시 산 소망을 갖도록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이 어찌 위로하지 못하며 기쁨과 평강으로 바꾸어 놓지 못하시겠는가?

윤주홍 장로님은 서울 봉천동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운다. 봉천동이 빈민촌이었던 시절부터 그의 도움과 신세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기에 그를 친부모, 형제로 따르며 슈바이쳐라 부른다. 모든 사람을 내 형제처럼 돌보는 그 삶의 동기는 1973년 사랑하는 자식을 교통 사로로 잃고 나서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고 택시 기사가 병원으로 뛰어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병원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윤 장로님의 병원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사망 진단을 내린 셈이 되었고 애통해 하는 밤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그 고통 속에서 울다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 자기 자신은 울고만 있으라고 함이 아니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치료하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식 한 명을 잃은 대신 봉천동의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생명을 돌보며 살고 있다. 결국 그의 애통은 하나님의 위로 속에서 더 놀라운 삶으로 성숙하게 되었다. 오직 나만의 삶에서 모두를 사랑하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 다시 사는 부활의 삶을 살며 영원한 소망으로 달리고 있다. 애통해 하는 극도의 슬픔,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고독에 대한 애통은 사랑을 갖게 된다. (사41:9)

이 땅은 죄악의 세상이다. 죄악 가운데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단절되어 고독하게 살아간다. 고독하지 않은 것처럼 군중 속에서 산다. 삶의 분주함에 밀려 아무 일 없는 척 웃으면 살아간다.

우리 주변의 술집이 늘어나는 것을 보라. 지나친 도박과 쾌락 산업을 보라. 스포츠와 광기 어린 오락 산업을 보라. 약물 중독과 수면제가 팔리는 것을 보라.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을 가지고 있으되 애통해야 할 눈물을 감추어두고 위장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고독하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믿음과 소망도 헛된 것이다. 죄와 죽음이 가져다 주는 인간의 현 주소는 고독이요, 무능이요, 영적으로 파산 당한 인생이다. 이 고독한 영혼을 애통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사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함께 하는 사랑으로 다가온다.

나는 청년 시절 땅만 쳐다보고 살았다. 죄와 죽음에 대한 무능한 나! 아무도 의지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외로워서 교회에 나가 울었다. 사람에게 가서 울면 미친 놈이라 했을 것이다. 그때 나를 안아 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아! 형편없는 나를, 가문, 출신, 배경도 없는 나를, 죽음에 이르는 존재인 나를 하나님은 곁으로 부르시고 내가 너를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해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위로를 받았다.

예수님도 우셨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분히 여기시고 우셨지만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고 눈물 흘려 우셨다. (눅19:41) 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애통을 느낄 때 믿음을 얻었고 참된 소망과 사랑을 얻었다. 사실 애통해 하므로 얻은 것이 어찌 한 두 개만 되랴! 영혼을 위해 울 때 열정을 주시고 교회를 위해 울 때 희생의 섬김을 주시고 책임을 위해 울 때 능력을 주셨다. 울어야 할 이유가 없고 모든 것이 다 잘되는 것같이 안일에 취하여 있을 때 얻은 것이 무엇인가? 교만 밖에 없다. 불신앙 밖에 없다. 오직 울 때, 애통해 할 때 복을 누리게 되었다.

나는 회복과 부흥을 위해 엎드린다. 100일 기도를 시작하고 선포했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보며 애통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으로 된다고 하신다. 울었더니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하는 응답을 주신다. 여러분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지쳐있는 자가 있는가? 누구에게도 해결 받을 수 없는 영적 슬픔이 있는가?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곁으로 부르는 복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는지를 감사하게 될 것이다.

다음주는 추수감사절로 지킨다. 우리의 감사가 기쁨과 만족, 행복과 소원 성취, 열매의 소득에 있어서 감사하는 것은 불신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눈물과 아픔을 감사하는 절기가 되게 하자. 심령의 가난으로 인해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슬픔 때문에 감사하고 빼앗긴 건강과 행복 때문에 감사하는 절기를 만들자. 진짜 신앙은 애통해 할 일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삼천 만원의 십일조가 드려졌다. 그것을 드린 권사님은 인사 사고를 당해서 발목이 부러져서 가을철에 병원에 누워있었다. 애통해 하고도 속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픔 속에서도 예물을 드렸다. 그 속에서 흔들릴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 무엇인가 감사해야 되는 손길,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애통을 무서워하지 말자. 하나님의 곁으로 불리우는 복으로 받아드리고 감사하자. 죄에 대한 애통이 욕심을 깨고 죽음에 대한 애통이 허무를 깨버리고 고독에 대한 애통이 방탕을 깨고 오히려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도록 하자. 범사에 감사하는 전천후 감사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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