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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성한 잔치에 초대합니다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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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가 크게 다툰 후 남편이 화가 나서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크게 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한참 만에 의식이 돌아왔는데 마침 간호사 두 명이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간호사를 보자 남편이 말을 합니다. “여기가 천국인가요? 당신들은 미래의 나의 부인인가요?” 그러자 간호사 뒤에 서 있던 아내가 “정신 차리세요.” 합니다. 이 사람은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 실망스러운 말투로 “당신이 있는 것을 보니 천국은 아니구먼.”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천국은 좋은 곳이라고 막연히 생각을 합니다. 각 종교에도 종교 나름대로 좋은 곳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슬람의 코란경에는 천국에도 등급이 있다고 합니다. 충성을 가장 많이 해서 1등급 천국에 가면 1000명의 미인들과 살고 2등급을 받으면 900명 미인들과 함께 산다고 합니다. 여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욕심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데 극락은 욕심이 없는 곳 미르바나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념무상의 땅입니다. 생각해 보면 허무한 것입니다. 도교의 무릉도원은 한가함입니다. 신선도에 의하면 바둑을 두는 노인과 낮잠을 자는 아이, 차를 끓이는 소년이 있습니다.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천국은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치하는 집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 절에 가면 계속 향불을 피우기 때문에 초상집에 온 기분이 납니다. 그래서 불교는 깊이 믿으면 믿을수록 허무해집니다. 향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제사 지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유교는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이 완고해 집니다. 그런데 교회는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믿을수록 기쁨이 충만하고 즐거움이 넘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잔치하는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첫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자신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결혼잔치와 같은 잔치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잔칫집에는 우선 먹을 것이 많습니다. 먹을 것이 있기에 만족스럽습니다. 먹을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이 있으면 흥겹습니다. 배부르고 노래가 나오면 즐겁습니다.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거기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함께 있습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먹는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것이 잔칫집입니다. 잔칫집은 바로 천국이요, 믿는 자의 삶입니다. 이 잔치는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에 이 땅에서 경험합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 완벽한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 날 바리새인 중 한 두령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식사의 교제를 위해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트집 잡아서 고소하고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니 식사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때 바리새인으로 생각되는데 어떤 한 사람이 분위기를 조금 좋게 만들기 위해서 15절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잔치에 그들이 참석할 수 있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혈통과 철저한 율법 준수 때문에 이 잔치에 자신들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 예수님은 그 말을 받아서 하나님나라의 잔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리십니다. 실제로 ‘복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잔치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잔치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1.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이기에 그 잔치는 최고의 잔치요 풍성한 잔치입니다(15-17절).

1)기독교잔치

하나님은 큰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16절에 어떤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을 마22장 2절 어떤 임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잔치는 누가 준비했는가에 따라서 성격과 은혜가 달라집니다. 왕이 배설한 큰 잔치입니다. 왕이 준비했기에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입니다(17절). 영광스러운 잔치요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잔치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준비한 잔치는 조금 엉성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잔치에는 엉성하거나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하여 부족한 것 없이 완벽하게 다 준비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오는 자를 기꺼이 영접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보혈은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립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믿게 하시고 또한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온갖 최고의 것들로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배설하는 잔치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그 잔치에 나올 때에 쉼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나님이 배설하는 잔치에 나올 때 영혼의 갈함이 해갈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하나님이 배설하는 잔치에 나올 때 배부르게 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나님이 배설하는 잔치에 때 겸손하게 나아오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쫓아 내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2) 두 종류의 잔치.

성경은 성도에게 있어서 두 종류의 잔치가 있다고 합니다. 종말론적인 잔치와 현재적인 잔치입니다.

(1)종말론적인 잔치 -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새들의 잔치

*어린양의 혼인잔치

계시록19장에는 종말론적인 잔치로서 하나님의 두 종류의 큰 잔치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19:9)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는 누가 참석합니까? 하나님의 초청장을 받고서 수락한 사람들이 참석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위에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초청장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어 준 초청장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갈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기에 우리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는 남녀 사이에 결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하고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남녀 관계없이 모두 예수님의 신부로 예수님과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혼인하고 사는 사람 전부가 다 하늘 혼인 잔치에 참석하게 됩니다.

*새들의 잔치

또 하나의 큰 잔치는 계19:17-21절에서 새들의 잔치라고 하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새들이 모든 자들의 살을 먹는다고 합니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계1:17~18)

끔찍한 잔치입니다. 어린양의 잔치와 대조되는 잔치입니다. 새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거부하고 저주한 사람들의 살을 먹는다고 것입니다.

여러분, 종말에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잔치뿐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든가 아니면 새들의 잔치에 재물이 되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선택은 이 땅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가족, 친척, 친구, 동료들 중에서 아직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새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2) 이 땅에서의 잔치 참여 - 예배

어떤 분은 천국잔치는 죽어서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천국 잔치를 지금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교회,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가정,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직장이 바로 그 잔치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이 예배가 바로 천국 잔치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예배시간에 풍성한 음식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를 초청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배 시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없는 몇 가지 중요한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죄의 은총

먼저 사죄의 은총입니다. 죄 용서를 통해서 모든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행실로 살았는가?’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건강한 자나 건강하지 못한 자나 상관없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오면 됩니다. 예수님께만 오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씻어진 세마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미장원이나 목욕탕 갈 때 화장도 하고 머리도 감고 그렇게 갑니까? 아닙니다. 대충 갑니다. 그렇게 대충 해서 가지만 미장원에서 나오고 목욕탕에서 나올 때는 단정하고 깨끗하게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러 갈 때 내 모습이 진흙탕에서 놀다가 온 모습처럼 보이고 도무지 내 힘으로 예복을 준비하지 못하지만 그냥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고 죄 용서함을 받고 예복을 입게 되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마귀에게 도적맞았던 자기의 인생을 도로 찾는 것입니다. 지갑을 도적맞았는데 그 지갑을 찾았을 때 모든 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인생, 우리의 젊음, 우리의 영혼을 도적맞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찾아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

예배시간을 통해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은 수십억짜리 빌딩보다 하버드 대학에서 수십 개 박사학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복을 모두 받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죄를 이기게 합니다. 거짓을 이기게 합니다. 음란을 이기게 합니다. 혈기를 이기게 하고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북 핵 실험으로 전쟁으로 인한 불안해하는 이 나라의 전쟁도 막게 합니다.

*기쁨 

또한 기쁨을 주십니다. 여러분, 기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라인데 바로 은혜라는 헬라어 카리스에서 나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사죄의 은혜, 성령의 은혜 받으면 그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도 교회에 오면 엄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웃지도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거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 거북한 것입니다. 교회오시는 분들의 얼굴을 보면 아직도 지옥에서 출장을 나오신 분같이 하고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은 얼굴에 웃음이 넘칩니다.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얼굴 표정만 봐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울산교회 성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성도인 우리 모두가 종말에 하나님의 어린양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배 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축제를 베풀고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만찬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길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우습게 알고 거절하지 맙시다.

2. 잔치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17-20절)

둘째로 이 잔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1)하나님의 마음은?(17절)

자녀들을 결혼시켜 보신 부모님들은 결혼식 날 하객이 많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한 번 쯤은 고민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청첩장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것으로도 혼주의 마음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손님이 많이 와야 잔치가 풍성해지고 혼주는 신바람이 나게 됩니다. 생사나 축제 때에도 이 자리가 성도들과 처음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로 꽉 차면 얼마나 좋을까요?

2)1차로 초청받은 사람들의 거절(18-20절)

*유대 인들 잔치 초청의 배경

당시에 잔치 초대는 두 번에 걸쳐서 초대를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한 번은 단순히 잔치가 언제 있으니 참석해 달라고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초대 받은 사람들은 다 그 잔치에 참석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초대에 거절 의사를 밝힌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모든 사람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두 번째 초대를 합니다. 집 주인은 1차 초대에 응했던 사람들에게 종들을 개인적으로 찾아가도록 해서 2차 초대를 합니다. “이제 오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초청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올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주인의 초청을 모두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4:18~20)

감옥이나 일하는 곳으로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에게 오라고 하는데 마치 사전 모의를 서로 한 듯이 모두 똘똘 뭉쳐서 잔치에 못 가겠다고 거절합니다. 초청한 주인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핑계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미리 살펴보지도 않고 밭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미리 시험해 보지 않고 소 다섯 겨리(열 마리)를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가? 그리고 첫 번째 초청과 두 번째 초청 사이에 갑자기 결혼 계획을 잡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결혼식을 했더라도 잔치에 오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물질관계 인간관계로 핑계를 대면서 잔치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3)오늘날 사람들이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 몇 가지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주님의 잔치에 오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핑계를 됩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기에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반대로 나는 죄가 너무 많아 예수를 믿을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젊은 분들은 아직 예수 믿기에는 너무 젊고 시간이 많이 있으니 차차 믿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시계를 뒤로 돌려놓고는 예수 믿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핑계거리를 준 것이지요. 또 연세가 많은 분들은 다 늙어서 이 나이에 무슨 예수를 믿겠느냐고 합니다. 마귀가 와서 시간이 다 지났으니 은혜의 날이 끝났다, 긍휼의 문이 닫혀져서 너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지내오던 가정과 가문의 관습 때문에 가족과 친척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결단하지 못합니다. 시모님이 돌아가시면 교회에 가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제사 문제만 해결 된다면 교회에 온다고 합니다. 너무 바빠서 좀 한가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를 더 알아 본 후 믿겠다고 합니다. 교회에 위선자가 많아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단은 항상 핑계 대는 일에 사람들을 도우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핑계라는 총을 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면 사단은 계속해서 핑계 거리인 총알을 공급해 줍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할 때 처음에 그들이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 말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계속 권해야 합니다.

*거절의 결과

여기에 첫 번째 초청받은 사람은 유대인들입니다. 특별히 유대인 중에서도 바리새인과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영적인 소경이 되었습니다.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인 돈과 명예와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잔치의 주 메뉴가 죄 용서요, 구원인데 거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주 메뉴인 오직 돈, 명예, 쾌락과 같은 육체적이고 인간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30년 뒤에 로마와의 전쟁에서 죽습니다. 110만명이 죽습니다. 밭도 소도 빼앗기고 자녀도 죽고 그들도 죽습니다. 다 죽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고 육신의 복만을 기대하고 살았던 사람들은 불과 30년 안에 전멸을 당합니다. 유대인만 아니라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국가 집단, 개인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면 바벨론도 앗수르도 로마도 망했습니다. 러시아 북한도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으로 개인이든 가정이든 민족이나 국가든 하나님의 초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3. 하나님의 마음(21-24절)

마지막으로 초청에 거절한 사람들과 잔치에 대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분노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분노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의 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21절)

*빌하이벨스 목사의 고백

미국의 윌로크릭 교회의 담임 목회자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깨달은 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예배, 교육, 선교, 봉사, 친교가 균형 잡힌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줄 알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니 아버지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바라볼 때에 이 균형감각을 잃어버리더라. 99마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볼 때에 하나님은 균형감각을 잃어버리더라.”고 합니다. 교회의 5대 사명인 예배와 교육과 봉사와 친교와 선교(전도)가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 마음은 잃어버린 영혼에 더 큰 관심이 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애타게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 한 것입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2~23절)

여러분,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전도는 종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똑똑히 보십시오. 주인이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냈다고 합니다. 두 번째도 주인이 노하기까지 하면서 그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도 주인이 종들에게 길과 산울가로 가라고 명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명할 때 “강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성경의 기록을 볼 때 죄인을 구원하는 전도는 하나님 자신의 열심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본심이었습니다.

눅15장에 한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는 죄인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진리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뜨거운 용서를 보십시오. 상거가 먼데 아버지 편에서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 편에서 먼저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편에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발에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바로 죄인 구원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다”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소리,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자신께서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도를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있습니까?

*애완견 장보고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서 애완견 장보고를 애타게 찾는 아줌마가 나왔습니다. 두 달 동안 뿌린 전단지는 15만장, 현상금은 100만원이었습니다. 함께 키우던 또 다른 애완견인 소망이의 오줌을 헝겊에 묻혀 가위로 잘라 길목 길목에 끼워 넣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한 마리의 애완견을 위해서도 시간과 물질을 들여 수고하는데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타게 찾아다녔습니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종   

주인의 초청을 사람들이 거절했을 때 주인이 노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인의 심정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분노한 사람은 주인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음성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종들입니다. 거절한 사람들 때문에 분을 냈는데 막상 초청을 거절했던 사람은 그곳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종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주인의 간절한 심정을 자신의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일치가 됩니다. ‘내가 지금 안 가면 주인을 만나러 갈 면목이 없다. 내가 주인을 향해서 얼굴을 들 수 없다. 주인의 분노가 나의 아픔이요 주인의 분노가 곧 나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강권하라고 하는 주인의 명령에 일체감을 이루어 순종하면서 나아갑니다. 종들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길과 산울 가로 바쁘게 갑니다. 길이란 다른 도시로 이어지는 길이요, 버림받은 자들이 오두막을 짓고 사는 곳이 산이기 때문에 산울 가로 가라고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사람들은 쉽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날 수 있는 약속 장소도 없는 곳으로 종들은 지금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서 강권해야 합니다. 강권해서 종들은 반드시 예스라는 대답을 기지고 그들을 데리고 와서 그 잔치자리를 채워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노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고 합니다. 주인의 초청에 거절한 자는 지옥의 심판으로 가겠지만 나에게도 진노의 심판이 내리 것 같이 두려운 생각을 갖고, 저들을 데려 오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강권하여’라고 해서 무력으로 데려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도록 설득해서 데리고 오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강권하는 모습이 창19:12-16절에 잘 나타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시 롯의 가족을 구원하는 모습입니다.  천사는 머뭇거리면 죽게 될 롯의 가족을 강권해서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창19:16) 긴박한 경우에는 팔을 비틀어서라도 죽음의 길에서 돌이키게 해라는 말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번영교에서 태화강으로 뛰어내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팔을 비틀어서라도 멈추게 해야 합니다. 옆구리를 발로 차서라도 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만일 누군가가 복음 초청을 천 번 거절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천한 번째 찾아가서 강권해야 합니다. 한 번 더 찾아가서 강권할 때에 성령께서 한 번도 녹아지지 않았던 그 사람의 마음을 녹아지게 할 것입니다. 말씀과 눈물과 기도로 무기삼아 또 찾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열쇠를 가지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사람의 닫혀진 마음이 활짝 열리도록 열심히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만약 지옥에 간 내 가족, 친척, 이웃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심판대 앞에 선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왜 저 사람을 저렇게 내 버려두었냐고 질문하실 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를 했는데 안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한마디를 물을 것입니다. “네가 강권해서 데려온 일이 있느냐?” “하나님, 나는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지나가면서도 했고 밥을 사 먹이면서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묻습니다. “네가 강권해서 손을 붙들고 데리고 온 일이 있느냐? 아침에 네 남편의 손을 붙들고 “여보, 교회에 갑시다.” 하고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간절히 호소해서 데려온 일이 있느냐? 네 부모를 그렇게 데려온 일이 있느냐?”

지금 우리는 주님의 노하신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가족을 붙잡고 강권해 본 경험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클 것입니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 친구야, 아들아, 너의 영혼이 멸망 받는 것을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아니 버려두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부흥사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사람들에게 헌금을 작정하도록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부흥사가 성도들에게 “여러분, 제가 100만원하고 말을 하면 감동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반주자에게 가서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를 때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자리에 일어 설 수 있도록 멋지게 연주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반주자가 그 요청을 받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부흥사가 크게 100만원하고 소리를 외치니까 반주자가 얼떨결에 반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이 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애국가를 반주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애국가를 연주해서라도 우리가 일어나야할 때입니다. 일어나서 나가서 찾고 찾으러 가야합니다. 강권해서 복음을 전하여 주님의 집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쉰들러리스트 

여러분, 수년 전에 책으로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스필버그를 통해서 영화로 제작되어서 세계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아마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2차 세계 당시 독일군 점령지였던 폴란드 어느 마을에서 독일군은 유태인을 무참히 죽이기 시작합니다. 독일군은 유대인의 사체를 태우기 위해 큰 공장을 몇 개씩 지어 놓고 그 공장을 24시간 가동하였습니다.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는 이런 기회를 틈타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됩니다. 그래야 인건비를 안들이고 유대인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쉰들러는 유대인 회계사를 고용하는데 결국 그 회계사를 통해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쉰들러는 자기가 구해낼 유대인이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그들을 구하기 시작하여 브릿니치 수용소에서 1,100명의 유대인을 구해냅니다.

그리고 독일이 폐망하게 되자 쉰들러를 통해서 목숨을 구했던 사람들이 혹시 쉰들러가 독일 나치 당원이라는 이력 때문에 연합군에게 잡혀서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쉰들러가 구해준 유대인 사람들이 쉰들러에 대한 편지를 쓰고 자신들이 서명을 한 종이를 넘겨줍니다. 그리고 반지를 건네줍니다. 그 때 쉰드러는 자신의 회계사였던 유대인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더 애쓰지 못했노라고, 자신이 가진 차, 넥타이핀들을 팔았더라면 더 많은 유대인을, 아니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었을 것인데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고 통곡합니다.

이스라엘 텔아이브 영웅의 공원에는 오스카 쉰들러를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가스실보다 더 무서운 유황불이 치솟고 있는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내 주변의 관련된 사람에 대한 나만의 구원리스트가 있습니까? 이번 생사나 잔치에 누구를 초대해야 할까요? 정답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한 사람이라도 더, 더 많은 사람을 이 잔치로 초대해야 할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잔치가 벌여 질 때에 성삼위 하나님께서도 천국에서 잔치가 배설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냉랭한 심령이 있다면 성령의 불, 아버지의 마음이 부어지기 바랍니다. 이번 주 한 주간 기도하고 격려하고 찾아 나서서 강권하십시다.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고 복음을 전해서 열매를 맺을 때 면류관을 쓰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아멘. (박수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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