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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 (호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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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은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입니다.

이 제목을 보고 ‘아, 암미라는 사람과 루하마라는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기 보구나. 참 낭만적이겠네. 기대되네. 그런데 암미는 누구이고 루하마는 누구일까? 설교 제목에 나오는 이름인 것을 보니 성경의 인물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만일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습니다.
암미와 루하마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잘 모르겠다는 말씀은 맞습니다.
암미라는 이름과 루하마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여기에 꼭 한 번 나옵니다.
성경에 여러 번 나와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한 번만 나오니까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암미라는 사람과 루하마라는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이렇게 말할 때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 로맨틱한 사랑, 에로스의 사랑, 이런 것이겠는데요, 그래서 낭만적일 것이라고 기대도 하게 되는데요, 이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륜이 됩니다.
암미와 루하마는 남매이기 때문입니다.
루하마가 누나입니다. 암미는 남자 동생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의 정확한 뜻은 ‘암미라는 이름과 루하마라는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면 제목이 스무 자가 넘습니다. 그렇게 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줄였습니다.

암미라는 이름과 루하마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성경 본문 밑에 작은 글씨로 그 이름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암미는 무엇이지요?
그렇습니다.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루하마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성서」는 루하마를 “귀염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하마의 원래 이름은 로루하마(Lo-ruhamah)입니다.
6절을 보세요, 선지자 호세아의 부인이 딸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앞에 “로”가 붙으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영어와 비슷합니다. 영어도 앞에 ‘노’가 붙으면 ‘아니다’이지요.
히브리어 ‘로’는 뜻이 더 강합니다. ‘절대 아니다’는 강한 부정입니다.

아까 루하마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면 앞에 ‘로’가 붙었으니 어떻게 됩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가 됩니다.
「공동번역성서」는 “로루하마”를 “천더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암미의 원래 이름은 로암미(Lo-ammi)입니다.
8절을 보세요.  호세아의 부인이 이번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하셨습니다.
아까 암미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내 백성이라”입니다.

그러면 앞에 “로”가 붙었으니 어떻게 됩니까?
“내 백성이 아니라”가 됩니다.
「공동번역성서」는 로암미를 “버린 자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귀한 딸과 아들에게 왜 이렇게 좋지 않은 뜻을 가진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꾸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2절 끝을 보세요.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 7절에서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하셨고, 레위기 26장 12절에서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고 하셨고, 신명기 26장 18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꾸 배반하니까 진노하셔서 ‘이 모두 취소!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2장 1절에서는 다시 암미라고 해라, 루하마라고 해라, 너희는 내 백성이고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취소한 것을 취소한 것입니다. 원상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대단히 불경스러운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호세아서의 하나님은 ‘변덕이 심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잘 뒤집으시는 것일까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왜 이렇게 자꾸 뒤집으시는 것입니까? 초지일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호세아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호세아의 별명은 ‘사랑의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의 이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그러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 암미라는 이름, 루하마라는 이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그러나의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6절에서 ‘네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해라, 나는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바로 이것을 뒤집었습니다.
이 뒤집는 말이 “그러나”로 시작이 됩니다.
7절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9절에서 ‘네 아들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해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이것을 뒤집으십니다.
10절을 보세요. 역시 “그러나”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2장 1절도 ‘그러나’를 넣으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너희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겠다. 너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이렇게 됩니다.

호세아서를 대표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인 6장 1절을 보세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 말씀에 ‘그러나’를 넣으면 뜻이 더 분명해지고 강해집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그러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그러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래서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을 ‘그러나의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이 ‘그러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그러나의 사랑’ 앞에 우리도 ‘그러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한 번 실패했더라도 주저앉지 않고 아니, 두 번 세 번 실패했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우리를 암미라고, ‘너는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우리를 루하마라고, ‘너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다시 일어서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흔히 탕자라고 부르는 이 아들, 집을 나갔습니다.
잘못한 것입니다.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습니다.
더 잘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지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였습니다.
‘나는 로암미이고 로루하마입니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이 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였습니다(눅 15:24).
‘너는 암미이고 루하마이다’ 한 것입니다.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는 ‘그러나의 믿음’과 ‘그러나의 사랑’이 한 쌍을 이룬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수능고사를 쳤습니다.
우리 교회 수험생들, 수능고사 가채점을 해보니까 성적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왔기를 바랍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혹시 성적이 기대했던 만큼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실망하지 마세요.
‘너는 암미이다, 내 백성이다, 너는 루하마이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06년, 지금까지 어렵게 지내왔습니까?
계획했던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그러나  ‘너는 암미이다, 루하마이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남은 시간을 복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보기에는 어려웠고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무엇인가 큰 일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큰 야단을 맞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있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는 용서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의 베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그러나의 사랑에 의지해서 ‘그러나의 믿음’을 가지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인 사랑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은 성경의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로마서 9장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5절과 26절을 여시기 바랍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맥락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보세요.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나는 그릇’ 이것은 이사야서 29장 15절과 16절에도 나오고 예레미야 18장에도 나옵니다.
호세아도 8장에서 그릇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8:8).
‘하나님은 토기장이,’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다.’ 이런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격이 도무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설교를 할 때  조금 점잖지 못한 이야기를 하면 어떤 성도는 ‘아, 참 재미있었습니다. 덕분에 쉽게 알아들었습니다. 자주 그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고, 어떤 성도는 품위가 없다고 해서 어렵습니다.
아까 ‘하나님은 변덕이 심한 분’이라고 한 것도 그런 것에 해당됩니다.
원래는 ‘하나님은 변덕쟁이’라고 하려다가 품위 문제 때문에 말을 풀어 바꿨습니다.
그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니 양해하세요.
‘하나님은 토기장이, 나는 그릇’ 이것을 우리가 알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엿장수, 나는 그 손에 들려 있는 엿 한 가락’ 이렇게 됩니다.
그 엿을 어떻게 자르냐 하는 것은 엿장수 마음입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돈이 없는데 엿장수가 엿을 잘라 주었습니다.
예전에 마을에 엿장수가 큼직한 가위를 쩔걱쩔걱하면서 들어오면 어린애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엿은 먹고 싶은데 돈은 없고, 엿목판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면 마음씨 좋은 엿장수가 엿을 잘라주는 수가 있었습니다.
고맙지요. 그것도 조그맣게 자른 것이 아니라 큼직하게 잘라주면 더 고맙지요.
그럴 때 어린이들에게 그 엿장수는 한없이 고맙고 위대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창조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능동적인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의외(意外)의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창조적 사랑, 일반적 사랑, 능동적 사랑은 성경 주석이나 다른 목사님의 설교집에 나오는 말들이고 의외의 사랑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신학적인 말이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인 사랑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든지 간에 ‘이상하다. 하나님이 어떻게 저런 사람까지 사랑하시나?’ 이런 생각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에서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서 호세아서의 이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구원 받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다. 그 사람들은 지옥의 불쏘시개 깜이다.’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니다. 하나님은 그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긍휼을 베푸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이왕이면 큰 그릇으로 만들어주시지, 왜 이렇게 작은 그릇으로 만드셨나, 불평하지 마세요.
아예 안 만들 수도 있었는데, 중간에 깨뜨려 버릴 수도 있었는데 세상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도예가들을 보니까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깨뜨려 버리는 일이 많더군요.
작은 그릇이 큰 그릇보다 더 귀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여러 해 전, 새벽기도회에서 로마서 9장을 강해하면서 생선회집 이야기를 했습니다.
생선회집에서 큼직한 접시에 생선회들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옵니다.
그런데 상 위에 제일 작은 접시, 이 접시가 없으면 그 생선회, 맛있게 먹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접시이겠습니까?
간장, 초장 접시입니다.
간장, 초장 찍어먹지 않으면 아무리 고급 생선회라도 제 맛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작은 그릇으로 만드셨습니까?’ 하지 말고, ‘하나님, 나를 만드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아, 나를 간장, 초장 접시로 만드셨군요. 교회를 맛나게 하는 사람, 세상을 맛나게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인 사랑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합니다.

‘암미와 루하마’라는 말을 합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정체성을 상실해서 문제이다.’라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성도들도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통치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호세아서 2장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호세아서 2장 23절은 이렇게 오늘 본문, 나가서는 호세아서 전체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아까 바울 사도가 인용한 것도 사실은 호세아서 2장 23절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그러니까 로루하마입니다,)
긍휼히 여기며(무엇입니까? 루하마입니다.)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로암미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암미입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는 내 하나님이십니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하셔야 합니다.

주보 14면에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에 오는 부흥한국 팀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물신주의(物神主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1. 부흥한국의 비전과 사역’ 넷째 줄을 보면 ‘부흥한국은 물신주의와 개인주의로 황폐해진 남한과 무신론 공산주의에 메여 살고 있는 북한이 다 함께 주의 긍휼과 자비로 회복되어 주님의 영광이 거하는 나라로 통일되고 변화되는 것을 기대합니다.’고 하였지요.
물신주의는 물질을 신으로, 주인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남한이 물신주의로 황폐해졌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부흥한국 팀은 물신주의 대신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는 귀한 찬양사역 팀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습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아까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호세아서의 이 말씀을 인용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베드로 사도도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2장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로암미)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암미)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로루하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루하마)니라
베드로 사도는 이 말을 그 앞의 9절에 연결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국민이 되면 여러 가지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행해야 할 의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선 앞의 베드로전서 2장 9절 뒷부분을 보세요.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의 의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경건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경건은 성도로서 해야 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배 참석, 기도, 전도, 성경 읽기, 봉헌, 섬김과 나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의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자주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너는 로루하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다. 너는 로암미다. 내 백성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한 번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나라에는 열 번쯤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을 자주 배반했습니까?
지금도 배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그러나 너는 암미다, 내 백성이다, 너는 루하마이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이다.’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마찬가지의 사랑을, 아니 더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1장 11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이 날이 클 것임이로다

우리는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11절의 이 말씀을 우리나라에 꼭 이뤄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통일과 번영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자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남왕국은 유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북왕국은 이스라엘,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언자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자가 남왕국 출신인데 호세아는 북왕국 출신이었습니다.
11절 앞부분,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르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삼고”는 그렇게 갈라진  나라가 통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지금 분단의 비극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국군포로로 43년간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가 12년 전에 탈북한 조창호 중위가 오늘 새벽 0시 30분, 직장암으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분은 대단한 애국자였고 인격자였으며 무엇보다도 신앙인이었습니다.
지난 10일, 병원에 다시 입원하기 전, 의식이 살아있을 때 마지막 예배를 그분의 수지 신봉동 자택에서 저희 교회 주관으로 드렸습니다.
그 감사헌금을 건축헌금으로 해서 주보 7면에 올렸습니다.
그 분이 사실 북한에 2남1녀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쌍둥이 아들 선일, 선이와 딸 선옥이 있습니다. 지금 마흔 살 안팎입니다.
개인적인 교분이 있어 저에게 가끔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나 때문에 아이들이 도마 위에 있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그 자녀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여기 이스르엘은 이스라엘에 있는 평지 이름도 되고, 호세아의 큰 아들 이름도 됩니다.
1장 3절 뒷부분과 4절 앞부분을 읽으면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스르엘 이야기까지 하면 너무 복잡해서 오늘 설교에서는 뺐습니다.
이스르엘은 여기에서 그저 이스라엘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번영을 말합니다.

여러분, ‘암미와 루하마의 사랑으로 우리나라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 성경에 약속하신 것과 같이 통일과 번영도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맺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우리를,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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