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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우리가 힘써야 할 일 (롬 14: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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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가 힘써야 할 일
본문- 로마서 14: 19- 23

오늘은 일반적으로는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11월 셋째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621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을 해서 그들이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 감자를 심고, 옥수수를 심어서 얻은 첫 수확을 인근에 있는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함께 감사의 기쁨을 나누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사님들의 선교 이후에 1914년에 감리교회,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각교단에 회의를 거쳐서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왔습니다. 1914년 이후에 지금까지 생각을 해 보면 그 역사가 대단히 큰 역사,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늘 감사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추수감사절은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감사를 되새겨보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명절을 말씀하셨는데,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이 세 절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바로의 강팍함을 열 번째 재앙, 장자를 치는 재앙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가정들은 그 심판의 사자가 지나간다고 하는 유월이라고 하는 것은 넘어간다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그 때 그 말씀에 순종한 유대인 가정들은 장자를 치는 열 번째 재앙에서 면한 줄로 믿습니다.

그 유월의 감격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끊임없이 즐기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칠칠절, 수장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가을에 가장 큰 추수의 수확기를 맞이할 때 맏물, 우리로 말하면 햇곡식을 먼저 추수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수장절, 칠칠절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이라고 하는 것은 장막절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사는 동안 주로 텐트를 치고 살았는데, 그 광야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샘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태양을 가려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를 이기게 해 주시면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세 절기를 이스라엘에서는 명절이라고 해서 신앙적인 명절로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도록 하고,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분주하다보면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은총의 감격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 이런 절기들이 감사를 회복하도록 깨우쳐주는 역할을 한 줄로 믿습니다.

추수 감사절의 가장 큰 의미는 진정한 감사, 곧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는 것인줄 믿습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의 표현으로써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물질 그 모습보다는 마음의 감사가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감사의 모습은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목사관의 화제의 텔레비전이 어제 그제는 우리 식구들이 모여서 뭐라고 그런 줄 아십니까? ‘별로 안 크네. 딱 맞네.’ 벌써 열흘 밖에 이사한게 안 되었는데 우리 시각에 벌써 적응이 되기 시작을 해요.

처음에는 너무 커서 부담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는데 한 열흘쯤 지나니까 우리 눈에 익숙해 지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딱 맞다고. 아마 한 달쯤 지나면 ‘좀 작네.’ 이렇게 이야기가 될 거예요.

사람의 이 시각으로 느껴지는 생각은 이렇게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찾을 때 환경에서 찾으면 그 감사는 진정한 감사일 수 없습니다. 뭐, 집을 샀다던지, 남편이 승진을 했다던지, 우리가 자기들의 지난 수능시험을 잘 보았다던지, 이런 환경에서 오는 감사들은 사실 얕은 감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하게도 우리 얕은 감사들조차도 우리는 잘 못할 때가 많지요. 어린아이의 수준의 감사도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아요. 그러니 진정한 감사를 우리가 하나님한테 드리며 산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얕은 감사에서 넘어서서 진정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 환경에서 오는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뒤돌아 보면 우리 성도들은 환경을 떠나서 본질적인 감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지난 24년동안 성경적 의미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은 제가 그 전에 교육전도사로 7년을 근무한, 혹은 그 전에 청년으로써, 그 전에 중고등부로 신앙생활 하면서 제가 마음에 느꼈던 부분, 우리는 추수감사가 되면 늘 추수감사 찬송을 부릅니다.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물결 뒤치며, 그런데 추수감사절에 그 들을 쳐다보면 들판은 벼를 다 베어서 벼는 온데간데 없고, 들에 밭에 모든 부분의 곡식과 채소는 간데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뒷북을 치면서 항상 11월 3째주에 넓은 들에 익은 곡식하면서 이것은 환경적으로, 시기적으로 이건 아닌데 그런 마음에 어떤 의문과 어떤 숙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어요.

그러다가 제가 24년전에 담임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좀 더 성경적인 의미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그래서 우리가 고민하면서 결단을 내린 것이 성경에서 수장절 혹은 칠칠절, 추수감사의 의미를 우리에게 주신 의미는 우리가 가장 큰 추수의 절기의 첫 맏물, 우리로 말하자면 햇곡식을 추수했을 때, 한국사람들은 그것을 먼저 조상에게 바친다고 하는 그런 것이 있지만 우리는 조상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는 그것을 먼저 드리는 것이 추수감사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에서의 추수감사의 시기는 추석이 있는 전 주일이 되어야 되겠다.

전과 후가 뭐가 차이가 있느냐 할 때 추석이 있는 그 주간이 시기적으로 추수를 하는 기간인데, 이왕이면 우리가 추수해서 흥청망청 이런 저런 일로 쓰고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사람을 위해서 쓰기 이전에, 먼저 추수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성도의 자세와 맞겠다고 판단을 해서 우리는 지난 24년동안 추석이 있는 전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고 그러한 정신은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많은 이해와 설득과 감동을 주어서 이제는 추수감사절주일을 추석 전 주에 드리는 교회가 많아지기 시작을 했고, 거기까지는 못 가더라도 11월 첫째주 혹은 10월 셋째주, 혹은 10월 첫주까지로 많은 교회들이 움직여졌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부 교회들은 이런 좋은 제도를 가지고 교회에서 의논하고, 안건으로 의논했을 때 지금 목사님 무슨 소리하고 계시냐고, 전통적으로 11월 3째주에 추수감사인데, 지금 무슨소리하고 계신거냐고, 그냥 한마디에 확인사살을 당해가지고 말도 못 꺼내고 끙끙 앓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 평안의교회는 장로님들이나 성도님들이 열린 마음을 가져서 바르고 올바른 성경적인 것들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바뀌어 질 수 있는 그런 오픈된 모습의 교회가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복인 줄로 믿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평안의교회가 한국교회에서 앞서가는 일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88년도에 스포츠선교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목회에 접목을 시키려고 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던 스포츠 선교회. 그 때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습니까?

목사가 기도나 하지 무슨 축구야? 성도가 주일날 기도나 하지 무슨 축구야? 같은 동역자, 같은 성도들에게서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 88년, 20여년이 다 되었습니다. 한국이 사회가 급변하는지 아십니까? 2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제 대한민국은 10명 모이는 개척교회도 축구선교회 없으면 대한민국 교회가 아니예요. 우스개말로 간첩입니다.

지금은 그 작은 교회조차도 축구선교회 있는 것을 당연하게, 보수적인 교회이던, 진보적인 교회이던 모든 교회를 막론하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바로 20년 전에는 그 일을 시작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그것뿐인가요? 장로님들이 취임식을 할 때에 한국교회는 집사가 취임하고, 권사가 취임하고, 장로가 취임할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습니까? 집사가 취임하면 50만원, 권사가 취임하면 100만원, 장로가 취임하면 300만원, 500만원, 어느 교회는 1억원씩 취임할 때 비용을 내어놓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요즘 장로님들 취임하면 거의 1억원 정도씩은 취임비용을 내어놓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 장로가 취임할 때부터 벌써 우리 이기무장로님은 은퇴를 하셨는데, 제 마음 속에 장로가 취임할 때 왜 돈을 받아야 되나?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고, 내가 담임이 되어지고, 우리교회 장로가 취임할 때 나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겠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이미 한국교회 전통에 익숙해져 있던 성도들이 그러면 교회 생돈이 들어가는데, 다 받는데 우리는 왜 받습니까? 그러한 반론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설득시켜 가면서, 아닙니다. 평생을 헌신한 분들이 취임을 하는데 왜 그들에게 돈을 받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유치부부터 남녀선교회까지 속옷부터 양복, 반지까지 모든 것들을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준비해서 장로님 취임에 기쁨을 드리고, 정말 한국교회에 새로운 이정표를 이어갈 아예 집사, 권사들은 취임식도 하지 않잖아요.

이러한 일들이 이제는 의식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많이 확산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장로님들이 취임을 했을 때 교회가 그들을 성지순례의 선물을 드려서 장로가 취임되었을 때에 성지를 먼저 보고 돌아와서 성경적인 안목을 가지고 성도들 앞에서 기도자의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일도 그 때는 정말 생소한 일이었고, 엉뚱한 일을 한다고 그런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는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그런 좋은 전통을 따라하는지 모릅니다.

일일이 열거한다면 우리 평안의교회가 한국 기독교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예요. 광고가 되어지지 않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저희들은 우리 평안의교회가 해 온 이 귀중한 발자취가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귀하게 인정받고,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신앙과 교회의 행정에 귀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의미를 우리가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러한 감사의 정신을 시기가 언제냐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감사의 주체인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감사는 정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로마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라고 하는 이 바울사도의 표현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헬라어의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 주변적인 것들, 지금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성도가 시험에 들고, 성도가 상처를 받고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의 삶의 태도를 버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디아포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는 것들, 성경이 직접 금하거나 언급하지 않은 것들 이런 것들을 붙잡고, 그것이 마냥 신앙의 중심인 것처럼 그것 때문에 끙끙 앓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이런 아디아포라, 이런 주변적인 것들, 대수롭지 않은 것들 때문에 오늘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거나 본질적인 신앙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선택할 때 어떤 마음으로 선택을 하십니까? 아, 이 교회는 비전이 있구나. 이 교회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선포되는구나. 이 교회는 정말 이웃을 위해서, 불신자가 좋아하고, 젊은이가 좋아하고, 스포츠가 살아있는 교회구나. 그런 비전에 감격해서 막 흥분이 되어서 ‘그래, 이 교회야. 내가 찾던 교회가 이 교회야.’

그렇게 해서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교인이 떠날 때 보면 왜 떠나요? 왜 안 나와요? 아휴, 아무개 집사 보기 싫어서 못 가겠어. 누가 뭐라고 그랬는데, 기분 나빠서 못 가겠어.

정말 교회를 나오고, 안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이유들이예요. 정말 아디아포라, 대수롭지 않은 정말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정말 중요한 삶의 태도를 포기해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요. 정말 여러분들은 아디아포라 대수롭지 않은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신앙의 본질을 놓쳐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가 지난 주에 저는 로마교회가 두 그룹의 공동체가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하나는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고, 하나는 로마인과 이방인들, 넓은 의미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의식습관, 그들의 모든 삶의 습관들은 달라요.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도 먹지 않고, 피도 마시지 않고, 절기 지키는 것도 많고, 그런가 하면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은 돼지고기도 잘 먹고, 이런 저런 생활에 있어서 아주 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서로가 서로 너희는 왜 이걸 먹느냐? 너희는 왜 못 먹는냐? 너는 왜 이걸 하느냐? 너는 왜 이걸 안 하느냐?

서로 정죄하고, 서로 비판하고, 서로 상처를 주다 보니까 나는 이 사람 때문에 교회 나가기가 싫고, 나는 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기분 나쁘고, 나는 이래서 어떻고, 그러면서 성도 간에 서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주 안에서 자유하다. 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방이 되었다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그 자유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지 말고, 너희의 그 자유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유의 책임이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자유의 책임이 따른다고 하는 것은 법률적인 의미에서보다는 희망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 자유를 제한하는데 무엇으로 제한하느냐? 법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제한을 스스로 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형제를 사랑한다면 이 형제가 상처받을 만한 일을 나는 거리낌이 없지만, 그가 거리낌이 된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절제하겠다는 것입니다. 법으로 절제를 시키면 부담이 되지요. 피곤하지요. 그러나 사랑으로 스스로 절제하는 것은 기쁨이요,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오늘 저녁에 골든벨 성경퀴즈대회가 교구별로 있습니다. 40문제가 나오는데, 39문제까지 우리 정전도사님이 진행을 하고, 39번째 문제는 맞추면 마지막 골든벨을 울리는 40번째 문제는 제가 출제하게 되어 있어요.

자, 여러분 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오늘 골든벨 문제가 어떤 것일까 금방 알 거예요. 제가 그랬어요. 만약에 로마서 14잘 17절을 암송하십시오. 희락이라 인데 희락이니라 그랬다고 틀렸다고 하지 마라. 제가 사회보는 분한테 그랬어요. 이니라, 니라나 같은 소리니까 융통성 있게 재미있게 하라고 그랬어요.

어느 때 보면 그런 거 때문에 지엽적인 것 때문에 땡 하면 속상하고 기분나쁘잖아요. 공부한 보람이 없잖아요. 그런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모두가 골든벨 문제를 맞추실 줄로 믿습니다. 참 이렇게 좋은 목사가 어디 있어요? 우리 출전하는 분들 뿐만 아니라 이런 성경퀴즈대회를 통해서 성경을 읽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자는 거지요.

여러분, 제가 어제 참 좋은 책을 하나 보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책인데, 1884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오다가 대동강이 서해에서 물이 빠지잖아요. 그런데 밀물일 때는 대동강 물이 많이 불어서 배가 대동강, 평양 가까이까지 들어오는데, 이 물이 빠지면 물의 깊이가 낮아지면서 배가 모래톱에 걸려 버린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그 배가 들어왔다가 썰물 때 걸려서 못 나갔어요. 그 때에 강가에서 화살에 불을 붙여 가지고, 확 쏴서 불에 태우고, 불에 타서 죽고, 불 피하다가 강에 뛰어들어서 다 죽었거든요.

그 때 토마스 선교사님이 성경책을 들고, 원래 영국 웨일즈 출신 목사님 가정인데, 그도 목회자가 되고, 그도 선교사로써 부름을 받고 젊은 나이에 중국 선교를 왔다가, 조선의 선교를 위해서 따라 왔다가 이제 배가 불타니까 성경책을 그 강변에 있는 조선 군인들에게 뿌렸다는 말이예요. 그 자리에서 그는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사를 배울 때 그 정도만 알게 되었는데, 이 번에 한국 웨일즈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는 한 선교사님이 그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그 당시의 많은 사진들과 영국에 있는 많은 자료들을 중심해서 책을 한 권 펴냈어요.

그 대동강변에 뿌려진 복음의 밀알이라는 작은 타이틀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책이 나왔는데 제가 어제 그 책을 봤거든요. 그 책을 어디서 본 줄 아십니까? 화장실에서 봤어요. 화장실에서 이렇게 앉아있는데 화장실이 저희는 둘이거든요. 부럽지요? 원래 저도 하나였어요. 최근에 둘이 되었는데, 가운데 있는 화장실을 공용화장실이라고 그러더라구요.

저도 주로 거기를 가는데, 거기에 책을 이렇게 꽂아 놓게 되어 있더라구요. 근데 책을 꽂아 놓은 것을 보니까 토마스선교사 책이예요. 그래서 제가 우리 아내가 거기다 꽂아 놓았나 했더니 아침에 물어보니까 아내가 꽂아 놓은 게 아니더라구요. 우리 아들이 꽂아 놓았어요.

제가 우리 아들을 다시 봤잖아요. 화장실에 가서 힘주러 갔다가, 힘 주는 것을 잃어버리고 책을 한 권 다 봤어요. 이런 이야기 하면 건지는 또 다 잃어버리고, 목사님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변비 걸려요. 이 딴 소리 하면서 또 빠져 나갈 사람 있을 거 같아요.

제가 1부 때로 말 했지만 제가 변비 걸려도 괜찮으니까 책 좀 읽으세요. 어떤 책, 신앙적인 책, 은혜가 될 만한 책들, 우리가 화장을 하는 화장대에도 책을 좀 가져다 놓고, 화장실에도 책을 좀 가져다 놓고, 자동차에도 책을 가져다 놓고, 틈만 나면 은혜받을 만한 책들을 가져다 놓고 일부러 오늘 책 좀 봐야지, 책이 어디 있나 하면서 서재에서 꺼내는 것보다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 늘 있는 그 부분에 작은 책들 하나씩 꽂아 놓으면 책을 읽게 되요.

그러다가 심취하면 한 시간씩 책을 다 보고 나오는 거예요. 참 어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은혜를 받았어요. 오래된 120년이 지난 그 분의 선교의 열정이지만 지금에야 비로소 빛을 바라게 되고, 오늘 한국인들에게 그 토마스 선교사의 열정이 오늘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필리핀에, 혹은 태국에, 혹은 토고에 교회를 짓고,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앞으로 그런 나라에 백년이 지나서 한국의 이런 이런 교회가 헌신을 해서 교회를 지었고, 우리가 이런 헌신을 했을 때 우리 동네에 복음이 들어왔노라고 그렇게 책이 나오고, 기독교 역사가 그들에게 전해질 때에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우리가 이런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신앙을 낭비하지 말라는 거예요.

진정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입니다. 희락입니다. 이 희락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총체적인 기쁨을 성경은 희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이 우리의 삶에 중심이 되어야지, 먹는 것 마시는 것 이런 주변적인 것들, 아이라포라, 이런 대수롭지 않은 것들 때문에 시간낭비하고, 서로 상처주고, 서로 시험되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오늘 19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은총을 입을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영혼의 기쁨을 희락을 소유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마음에 주어진 평안을 소유한 우리가 이제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화평케 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화평의 일은 서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같은 것입니다. 30, 40, 50, 큰 오케스트라 일수록 수많은 악기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악기들을 보면 여러분 보통 중고등학교 밴드부라고 해서 그 작은 관현악단 보면 맨 뒤에 큰 나팔을 양 쪽에 메고 다니지요. 고등학생이지만 좀 힘겨워 보이는 큰 악기가 있어요. 흔히 스자폰이라고 그럽니다. 그런가 하면 그 오케스트라의 아주 조그마한 피리가 있어요. 피콜로라고 하는 것, 아주 작은 악기입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에는 그 작은 피콜로도 중요하고, 큰 나팔도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모두가 중요해요. 그 모든 악기들이 연합해서 하모니를 이룰 때에 그 오케스트라는 훌륭한 음악을 이루어 갈 줄로 믿습니다. 조화입니다. 화평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삶에 조화를 이루어 가게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시대에 요구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인물을 한 사람 배출했습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정식임기는 내년 3월부터 시작을 하지만 이미 유엔에 가서 업무인수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에이브라함 링컨이나 케네디나 이런 세계적인 위인처럼 반기문이라고 하는 위인전도 나올 거예요.

이제는 한국도 새로운 인물을 배출해서 자랑스러운데, 제가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유엔사무총장이 되고, 그리고 러시아를 비롯해서 전세계의 지도자들이 한 나라도 거부하지 않고 다 찬성을 할 수 있는가?

제가 느낄 때에 그 분의 강점, 온유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강한 지도자들이 많지요? 국회의원들끼리 싸우고, 오히려 막 윽박지르고, 당당함이 지나쳐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세다고 생각되고, 강하다고 생각되지만 대통령, 국무총리, 몇 달 못 하고 물러납니다. 여러분 온유한 자가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온유함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으로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전형적인 인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온유한 모습, 우리 성도들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정말 온유한 모습인가? 정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 온유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길수 있는가를 그대로 우리는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속회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부담스러운 존재는 아니십니까? 내가 이 공동체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 피스메이커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 성도로써 힘써야 할 이 소중한 부분들을 바울은 우리에게 결론처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대에 도전되어지는 많은 삶의 상황 속에서도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우리가 정말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 모양의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 스스로 다짐하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 우리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화평케 하는 자요, 평화를 만드는 자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소유하였다면 이것을 세상을 향해 나누며 선포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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