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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는 기적을 여는 열쇠입니다 (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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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이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수 백 통을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제 목회 경험에 의하면, 신앙인들이 가장 보내기 곤란해하는 날이 바로 감사주일입니다. 부활절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되고 성탄절은 주님 탄생하신 줄을 알면 되지만, 감사주일에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감사할 것은 없고 원망할 것밖에 없는데 거기다 감사헌금까지 하라고 하니 감사주일일 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더합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는데 어떻게 감사가 나오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려고 하니 제 마음도 몹시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의문으로 시작했던 기도를 감사로 마무리 한 것을 보면 이분에게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특별한 비밀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였습니다. 여호야김은 대단히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6:20-26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성경을 읽어주면 두루마리 성경을 칼로 잘라 불에 던져 버리며 하나님을 모욕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패역한 시대에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 구석구석이 부패로 만연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변합니다. 자기 의만 주장하니 서로 다투기 바쁩니다. 정치적인 강포, 경제적인 무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 속에 살게 되고 악인들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 마음의 울분이 터졌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세상을 보시고도 하나님께서는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라고 하박국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2장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키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럴 때 하박국은 깊은 묵상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왜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유다를 멸망시키시려는 겁니까?" 뭐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러나 깊은 묵상 끝에, 3장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박국의 질문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왜 그렇게 섭리하십니까?" "하나님 하필이면 악인을 사용하십니까?" 당시 하박국이 처한 현실은 외적인 조건으로 볼 때 전혀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감사의 이유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 감사할 수가 도저히 없는 이 현실에서 그 어떤 사람의 감사보다 더 풍성한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박국이 마음의 의문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감사로 모든 것을 올려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발견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보세요. 지금 하박국은 자신이 처한 이 답답하고 힘든 환경에서, 그가 진정으로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습니다. 힘의 근원이 되어 주리라 기대했던 나라마저 소망이 없어졌습니다. 외양간에 소도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지만 그래도 힘이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물질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돈이 손에 들어오면 힘이 생깁니다. 또 꿈꾸던 일이 소원대로 이루어질 때 용기가 생깁니다. 남보다 더 좋은 위치나 권력, 명예를 얻게 되면 인생 살아갈 의미를 발견합니다.

오늘 우리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없다든지, 목표를 잃었든지, 건강을 잃었든지 말입니다. 남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잃을 때 힘도 잃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돈과 명예, 지식의 풍성함이 내가 존경받도록 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시편100:3-5에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세상에서 알아야 될 것이 너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 되는 줄을 알라는 말씀이며,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주님은 우리를 기르시고 양육해 가신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경험해 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수능시험을 보지 않았습니까? 저도 두 아이를 둔 수험생 부모가 아닙니까? 둘째 아이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수시에 합격을 해서 짐은 덜었지만, 첫째는 재수를 하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그 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고 아침에 교회에서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8:30분부터 시작하니까, 아침 예배를 드리고, 부모로서 저녁까지 예배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도하는 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자식이 뭔데!" 이렇게 꼼짝없이 자녀를 위해 매달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더라구요? 그런데 저 뿐만 아닙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은 제가 목회하면서 그렇게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기도하더라구요. 오후 5:06까지 기도하고 또 수험장으로 달려갔는데 아이가 그 부모의 수고를 알기나 하겠어요. 좀 늦게 왔다고, 투정을 부리더라구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그 사랑을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우리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원망이나 하고, 불평과 불만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낳았다고 하십니다. 지금 이 모습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고통을 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는 해산의 고통이 없었다면 오늘의 모습이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이제 깨달았다면 감사해야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고통 중에 있든지 행복한 중에 있든지, 있는 자든지 없는 자든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라 합니다. 왜 입니까? 주님과의 관계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 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때 진정한 감사가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깨우쳐주고 가르쳐 주시기 원했던 것이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테스트하신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선한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포도나무가 없으면 가지는 붙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닫고 그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살아갈 때에 진정한 자기 가치 뿐 아니라 삶의 이유를 알고 진정한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뭐 주님은 내가 무엇을 엄청나게 하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머물고 그 안에 있기만 해도 주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시는 그런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하나님께 잘해드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해드려서 사랑 받고 도움 얻고 그래서 다시 우리가 기뻐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좋은 배우자 주시고, 사업도 잘 되게 해주시고, 좋은 직업 주셔서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나 강할 때, 가난할 때나 부할 때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모든 것이 축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움 되는 것 하나 없어도 우리를 싫어 버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자꾸 오면 귀찮은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번도 귀찮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바로 관계의 축복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축복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하박국은 발견했던 것입니다.

둘째, 하박국은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의 말씀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정신병자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뒤가 안 맞잖습니까? 상식적으로 기뻐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감사하다니요.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와 같은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다보면 자기라는 테두리 안에 환경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기에 환경이 좋을 때는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상황이 어렵고 힘들 때는 그 상황 앞에 얼마든지 자신의 삶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하여 "꼭 이렇게 살아야하나?"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지?"하는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볼 때는 다릅니다. 여기 하박국을 보십시오. 지금 그가 어떤 상태에서 감사합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모든 게 다 없습니다! 부정어가 6번(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등입니다. 과수원마다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박국은 그런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17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은 많지만 그 중에 여호와라는 명칭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라는 것,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장 3-15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말씀은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입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출애굽을 하게 된 것이지요. 광야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었음에도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지낼 수 있었고 가나안 땅에서도 잘 정착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거를 노래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정말 잘못했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백성들은 끝까지 인도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 그들의 여정 자체가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만 가능했음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회상 속에서 하박국은 이런 확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힘들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지만. 또 이 땅에 환란의 소식이 덮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 이 믿음을 갖고 그는 하박국은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오히려 감사의 찬양을 부릅니다. 본문 맨 끝 부분을 보십시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그랬습니다. 여기서 '영장'이란 말은 성가대 지휘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수금'은 현악기(string)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지어서 현악기 연주에 맞추어 감사 찬양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 감사 찬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간 조건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지만 여전히 자기에게 남아 있는 소중한 게 있음을 찬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구원이 되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 세상 모든 게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해도 하나님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심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도저히 가망 없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살아가면서도 현실의 문제 앞에 너무나 무기력한지도 모릅니다. 지난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무찌른 큰 승리를 맛보고도 가나안을 보며 목놓아 슬피 우는 모습이 기억나십니까?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되도록 하신 기적을 체험하고, 지금까지 그 은혜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장애물 앞에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낙심하고 절망하며 우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닙니까? 믿음은 실용주의가 아닙니다. 현실에 적응하는 숙명론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선포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은 몹시 어려운 세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기침체로 제조업이 무너지고 신용불량자가 4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정치판도 회복 불능의 자리에 빠져있고, 정말 우리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이혼율이라든지, 자살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수능시험을 치루었지만, 그들이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가서도 막상 졸업을 눈앞에 두게 되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발을 구르는 젊은이가 한 둘이 아닙니다. 더욱 우리에게 이 현실이 더욱 어둡게 여겨지는 것은 지금의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보다 불신하고 비판하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답답한 오늘의 현실이지만, 여러분 속에 이 현실너머 약속에 있어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이 상황, 이 환경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이 폭풍우와 비바람 건너편에 있는 내일 새벽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안목이 있다면, 오늘의 이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 있다면, 우리는 모두가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납고, 메마르고, 거칠어진 모습 속에서, 낙심하고 좌절하는 모습 속에서, 원망과 불평의 모습 속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자가 되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것입니다. 감사는 기적의 씨앗입니다. 감사는 기적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한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더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제게 주십시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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