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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구이기에 (행 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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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생각하는 잣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잣대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하면 잘한 것이고 남이 하면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내 주관이나 관습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베드로조차도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에는 언제든지 비난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좋은 일이라고 해도 내 일이 아닐 때는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라고 할까요? 왜 네게는 저런 일이 안 생기고 다른 사람에게만 생기는가 하는 속상한 마음이 들더란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때는 더욱 기뻐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반대의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왜 일까요?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모두가 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손을 잡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할례 받은 신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할레 받지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들은 것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해야 할 텐데 오히려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명령을 주셨고 또한 성령 안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방인 중에서도 버림받은 자로 여겨지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청을 받아들여 그 아들을 고쳐 주었고 백부장의 하인까지도 고쳐주셨습니다. 아니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그녀와 그 마음 사람 전부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셨던 것을 저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대인들만이 아닌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정말 수고하였다고 칭찬과 더불어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도록 함께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오히려 베드로를 비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저들 스스로 비난의 구실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지 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할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표식입니다. 유대인들은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이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저들은 선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할례로가 아닌 성령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고 이를 세례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증거로 삼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들은 하례라고 하는 유대인의 풍습만을 따지고 있고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지도 말고 그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한 규례만을 여전히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이방인과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례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수고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에 대해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만 하고 속상해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함께 기뻐하고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오히려 나타나는 결과보다는 그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과 더불어서 그 모든 수고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드러나는 결과만을 따지고 있거나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가지고 따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간구하셨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 됨 즉 일치라고 하는 것은 둘이 똑같아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모양이 다르고 기능이 다르다고 해도 서로 연합해서 같은 목적으로 화합하는 것을 일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에 대해 서로 격려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칭찬과 격려보다는 비난하고 흠집만 잡으려고 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저들은 한 마디 칭찬도 없이 베드로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난하기에 앞서서 먼저 칭찬해주면 안 되었을까요? 그리고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 차근차근 물어보았으면 어땠을까요? “우리네 법에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지도 말고 그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도 베드로님께서 그렇게 한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라면 얼마나 듣기에도 좋았을까요?

우리네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해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 비난을 앞세우기보다는 그 이유를 먼저 알아보려고 하는 자세와 그 수고한 부분에 대해서는 결과를 따지기에 앞서서 먼저 수고하였노라고 격려하고 칭찬해 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게 아니라고 하기에 앞서서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더 좋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묻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서로 불편함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난보다는 칭찬으로 그리고 서로 의견을 함께 나눔으로 최선을 찾아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비난에 대해 베드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만나자 마자 비난을 퍼붓는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 대해서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설명함으로 저들을 설득해 나갑니다. 먼저 욥바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보았던 환상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보고 난 직후에 가이사랴에서 심부름 온 세 사람이 그 묵고 있던 집으로 찾아왔는데 성령께서 자기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셔서 그들을 따라 형제들 여섯 사람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더니 고넬료는 우리에게 천사를 본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천사가 그에게 와서 서더니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너라.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전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이 입을 열어 말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는데 그 때,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노라고 쭉 설명을 해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저들의 비난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하기에 앞서서 아니 알지도 못하면서 왜 비난부터 하냐고 하면서 성질을 부렸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큰 싸움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더라면 나중에 베드로가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도 그 말은 건성으로 흘려버리면서 그냥 할 말 없으니까 변명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들이 참 좋은 소식 들었노라고 정말 수고했노라고 하면서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면 분위기는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난이 먼저 앞서다 보니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주 불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베드로가 그 불같은 성질에 같이 신경질을 부르기 보다는 자기 성질을 죽이고 차분히 설명을 했기에 망정이지 평소의 성질대로 했더라면 아마도 좋은 일 해 놓고 큰 싸움 날 뻔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그리고 그 결과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힘을 다해 수고한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먼저 칭찬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자기 생각에 이건 아니지 싶었던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되 그것도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아니면 우리네는 지금까지 이렇게 저렇게 해 왔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일을 처리한데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좀 알려줄 수 있느냐고 차분히 묻는다면 상대방도 기꺼이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하 그랬겠구나 아니면 아하 내 생각이 좀 짧았네 하면서 더 좋은 해결책을 찾아나가게 되는 것이요 바로 그곳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정과 사랑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칭찬과 격려는 제쳐놓고 비난의 화살이 퍼부어진다면 거기에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비난부터 해 놓고서는 나중에 그것을 수습하느라고 쩔쩔매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 비난을 받은 입장에서도 속상한 마음에 같이 큰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서 내 다시는 이런 일 하는가 보라고 응 기껏 일을 했더니 좋은 소리는 한 마디도 없이 욕만 먹었다고 하면서 돌아서버리거나 뛰쳐나갈 때도 있지를 않습니까? 그래 나중에 서로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서로를 대하기가 어색해서 서로 피해 다닐 때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의 인내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점에서 누가 나를 비난하고 욕할 때 좀 더 신중하게 그리고 한 번 더 내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히 상대방을 대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 있을 때 우리는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거기에 더하여 내가 어떤 말을 함으로 인해서 기쁨과 평화를 깨뜨리게 될 수 있다면 그 말은 안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를 보고 문제를 지적하기 보다는 잘하는 것을 보며 격려와 칭찬을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누가 나를 비난한다고 해도 속상해하기보다는 차분하게 대하고 변명하기보다는 오래 참음으로 침묵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아름답게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비난하던 자들을 오히려 품어줄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처음 비난하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며 자기의 말을 마칩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은 베드로의 말을 다 듣더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찬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오늘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누가 감히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누구라서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예하고 아멘할 것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가운데 주시는 말씀대로 우리가 따르기보다는 내 주장 내 생각을 내세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 안에,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된 본성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바람은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라며 로마서 7장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 사도의 탄식과 같이 우리 역시 탄식하고 있습니다. 아니 좌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암만 해도 나는 안 돼 하면서 주저앉으려고만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요? 요나가 그렇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께 다시 붙잡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안달하면서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안 하겠다고 아니 못하겠다고 하면서 고갯짓할 때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바울 사도는 다시 자신의 깨달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노예로 만드는 영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을 의지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공동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그분이 겪으신 고난에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여 주셨으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성령 안에서 우리를 사로잡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길 위를 걸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부족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약할 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못하겠노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안 되겠다고 하시겠습니까? 베드로의 말처럼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우리는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길로 나를 이끄셔도 그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쁨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만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든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능력이 되십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예와 아멘으로 주님을 따라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비난도 찬양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를 비난한다고 해도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다 나를 외면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가 나를 욕하고 비난하거든 감사하십시오. 그 비난이 바뀌어 칭찬이 되고 오늘의 고통이 바뀌어 기쁨이 될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하늘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힘이나, 가장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한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시고 상속자 삼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한 것으로 나에게 더하여 주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고 두려워할 것이 있겠으며 무엇 때문에 속상해 하고 좌절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처럼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수고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지도하는 분들을 존경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그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대해 주십시오.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 바랍니다. 게으른 자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힘이 없는 자들을 도우며, 모든 사람을 인내로 대하십시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서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막지 말고, 예언의 말씀을 하찮게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1절로 20절의 바울의 권면처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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