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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이 머무는 곳에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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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이르는 학술적 용어로<호모사피엔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혹은<호모에렉투스>라고도 합니다. 그것은<직립 보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두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호모파베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 학술적 용어 가운데 사람의 사람 된 높은 가치는 어디 있느냐 하면<호모사피엔스>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가장 가치 높은 정의입니다. 생각이 없는 인간은 다만 동물일 뿐입니다. 이 생각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포기해 버릴 때‘인간됨을 저버렸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저마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생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의심으로 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이 자꾸 의심하는 쪽으로 추리하게 됩니다. 가령 남편이 저녁에 늦게 들어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우리 식구를 위해서 이렇게 밤늦도록 수고하는구나. 지금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배고플까?’이런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요것이 어디로 샜나. 오늘 아침에 수상한 전화가 오는 거 같던데 이거 어디로 빠졌나’생각이 의심 쪽으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묘하게도 하다보면 계속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되는 불행한 일입니다. 이렇게 의심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유형을<아담타입>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생각하면서 믿어집니다.‘그래서 이랬구나.’‘이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생각하면서 믿음이 점점 깊어집니다. 이러한 것을<아브라함 타입>이라고 그럽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고향을 떠나라 그리고 약속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자손을 주마”이 약속을 믿고 갑니다. 믿고 가면서 사실은 여러 번 휘청거렸습니다.

그래서 땅을 주신다고 했는데도 흉년이 드니까 애굽으로 피난도 갔고,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10년 20년 기다려 보다가 이게 도무지 영 안 되니깐 이스마엘이라는 서자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휘청거렸지만 하나님은“아니다! 내가 네게 말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은 그게 아니다.”그럴 때마다 그는 생각을 고쳤습니다. 믿음을 더했습니다. 그리고‘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수 있다. 과연 그 능력과 지혜는 놀라운 것이고 나를 선택하신 경륜은 위대한 것이다.’라는 믿음을 계속 확증해 나갑니다. 그리고 생각이 점점 믿음을 발전시킨 클라이막스가 모리아산의 사건이지 않습니까?

[리차드 칼슨]이라는 사람이<생각의 집착을 버리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책에서‘관점의 선택은 아주 중요한 것’임을 말합니다. 꼭 같은 일을 놓고 어느 쪽을 생각하느냐에 행불행이 달렸다는 것이죠. 행복은 소유의 문제도 아닙니다. 행복은 지위의 문제도 아닙니다. 행복은 지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결국 인간적인 행복이란 생각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낙천주의자가 됩니다. 좋은 방향으로 좋게 좋게 생각하고 밝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의 성향을 가지게 되면 그는 범사에 행복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교회 임직식에 갔는데 권면하는 목사님이 요즘 교회 안에 원불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답니다. 안 그래도 교인은 줄고 다른 종교인들은 늘어난다는데 교회는 다니면서 원불교인인 사람들이 많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말씀이<원망하고 불평만 하는 교인>을 원불교인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생각이 올바른데 머무르지 못하고 부정적인데 머무르는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어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고 그 보다 더 강한 사람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풍족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처지에서 만족하는 사람이다.”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결국 생각입니다. ‘나는 만족하다. 아~나는 넘친다. 나는 넘치도록 행복하다’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큰 부자입니다.
여러분, 생각이라는 것이 뭡니까? 생각에 대해서 몇 가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먼저는<무엇을 생각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또 멀리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 마지막 궁극적 종말은 어디 있느냐 그걸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어떤 방향에서 생각하느냐>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과거 지향적이냐 미래지향적이냐 하는 문제지요. 세 번째는<집중하여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생각이 건성으로 되어선 안 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얼마나 지속적으로 생각하느냐>입니다. 한두 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평생 계속 생각합니다. 이 집중 그리고 지속적 생각이 마지막에 구멍을 뚫는 것입니다. 생각에 대한 다섯 번째는 <우선적인 것을 생각하느냐>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 알 필요도 없고 다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됩니다. 최우선, 절대우선적인 것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유치한 생각들은 버려야 됩니다. 고전1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합니다.“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행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유치한 생각 그만하고 이제는 성숙한 인격,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생각을 해야 되겠다 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에 대해서 정리하면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의 기능인 이성입니다. 그 이성이 건강 하냐 병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이고 이성이 정상적이지 못하여 늘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내 생각이, 내 이성이 근본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어떻게 따라가 보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밝은 미래를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가장 핵심적인 말씀은 이성이 중생하여야합니다. 이성이 거듭나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만 합리적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열심히 공부해서 유명해지고 정치인들 되고 소위 성공했다는 하는 사람들이 왜 문제를 일으킵니까? 왜 나라를 망치고 있냐 말입니다. 그 짓 하자고 공부 많이 해서 똑똑해진 것은 아닐 겁니까? 그럼 왜 그렇습니까?  이성이 병들었습니다. 병든 이성을 고쳐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우리의 이성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이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생케 하기 위해서는<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요, 하나는<예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생각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춥니다. 나를 보고 세상을 보아서는 세상을 모릅니다. 나를 보고 예수를 보아도 예수를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보고 나를 보아야 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옵니다. 나를 보고 아버지를 보면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고 나를 보니까 세상이 달라집니다. 정신없이 기뻐하는 그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나를 보니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십자가를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는 능력이 많습니다. 지혜도 있습니다. 기회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안 질 수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왜 십자가를 져야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우리는 자주 그럽니다.‘억울하고 분하고 뭐 어쩌고...’십자가를 보면 참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3절에 다시 말합니다.“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사랑하셨다”고....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동안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얼마나 자주 양심을 거역했습니까? 불의의 길로 행했습니까마는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무던히도 참아주셔서 오늘 내가 있는 거 아닙니까?

나를 참아주신 그 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까짓 것을 위하여 참아주신 분이 계신데 나는 왜 못 참는 것입니까? 이성이 중생해야합니다. 늘‘나는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나는 신앙인이다.’라는데 생각이 머물러 있으면 거기에 곧 행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케리어의 법칙>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윌리스 H. 케리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성공을 하고 그가 성공한 비결을 요약해서 많은 사람에게 가르친 것이 캐리어의 법칙이 된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법칙 첫째는<무엇을 위하여 내가 걱정을 하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목적의식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침착하게 현실에서 열린 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현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생각할 줄 아는 여유 속에 문제의 해결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합니다. [존 템플턴]의 말에 의하면“마음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그 속성상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하였습니다. <80-20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20%의 생각이 80%의 삶을 좌우한다는 법칙입니다. 그만큼 생각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당연히 그리스도인다운 생각이어야 하고 아울러 그래야만 행동도 따라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생각이 머무는 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라건대 언제나 여러분의 생각이 머무는 그곳에는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있기를 바라고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 생각의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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