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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그 거룩함의 시작 (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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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5대 임금인 철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임금이 되기 전 강화 도령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강화도령으로 살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아버지 영조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아들 셋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자빈에서 태어난 장남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조 임금이 되었고, 다른 아들 둘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들로 은언군, 은산군인데, 은언군은 철종의 할아버지이고, 은신군은 대원군의 할아버지입니다. 이 후궁이었던 분이 남편 사도 세자의 비통한 죽음 후 천주교도인 사실이 발각되고 결국은 사약을 받아 죽게 됩니다. 두 아들도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고 후손들은 모두 강화도에서 왕가와는 관계없는 사람들로 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왕가에서 대가 끊기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왕이 똑똑하면 왕권을 강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가 전주 이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중에 왕을 세워야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소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오래 전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이 집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강화도령 철종은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왕이 되는데 기본적으로 하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과 왕답게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전혀 왕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왕답게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국방을 튼튼히 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할 것인지를 배워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술이나 마시고 궁녀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철종형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여기 '알지 못하느뇨?' 이 말은 어쩌면 그 당시 로마에 사는 많은 성도 가운데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휘둘리고, 마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력한 삶을 사는 자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이기도합니다. 뭐 이 말씀은 오늘 우리도 깊이 들어야할 말씀이 아닙니까?

특별히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과 또 이미 세례를 받은 형제, 자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이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세례요한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3:14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네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말속에는 아주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죄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바울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합하여' '연합한자'라는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고 또한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죽고 이제 새로운 생명,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연합된 것입니다. 이 연합되었다는 말은 무엇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철저히 죽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나 혼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어요. 십자가을 쳐다 볼 때마다 나는 죽어지는 거예요. 혹시라도 꿈틀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집착하려 하다가도 십자가만 보면 나는 죽어요.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핍박과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 자존심이 무너지는 아픔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방해, 핍박,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이 있어야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 우리에게는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듯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었다면 부활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죽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제나 손해만 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남이 나를 못살게 구는데 그에 맞서지 않고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죽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는 않았으면서 잠깐 죽은 것처럼 위장하며 살고 있습니까? 왜 교회에 와서는 죽은 척하고 살고 세상에 나가서는 기고만장하게 살아갑니까? 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듯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롬5:6에 보시면 지난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리스도를 알기 전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바울은 좀 고상한 표현을 썼지만, '경건치 않은 자'란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자, 도무지 변화될 수 없는 죄에 찌들대로 찌든 불신과 음란과 거짓으로 물든 소망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8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자격 없는 자, 이 소망 없는 인생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황혼에 한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지난 시절 얼마나 당신 앞에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까? 믿는 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복음을 방해하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로 살아온 나를 당신의 능하신 손길로 그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충성되이 여겨 하나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신 하나님! 나의 연약함을 허물치 않으시고 오히려 격려하시고 소망을 주신 하나님! 내가 어찌 이 사랑! 이 은혜를 감당하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하나님 사랑을 깨달은 그 날부터 어떤 자리 어떤 환경, 어떤 핍박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쏟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신 자신을 죄에서부터 건져주신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은혜 앞에 살아간다면, 더 이상 지난날에 나의 연약함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여길지어다"는 이 명령형의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본래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나의 통장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을 때 그것은 현금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라'고 할 때 씌여진 것입니다. '여기다'는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카드'가 저에게 있습니다. 저의 통장에 돈이 있을 때 비록 조그마한 카드지만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기다'는 '생기 있게' 살라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통장 안에 돈이 있습니다. 부도나는 통장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찾아 쓰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이나 능력이나 감격적인 삶이 없습니까? 이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 확신이 없어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탐 후 돌아와서 보고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 땅의 사는 사람들의 모습 앞에서 자신들을 볼 때 메뚜기처럼 여길 수밖에 없는 그 두려움 때문에 40여일 동안 가나안을 돌아다닌 10정탐꾼은 완전히 기가 꺽여 있었고, 그들의 절망 어린 보고 앞에 광야 200만이나 되는 백성들은 한 밤에 통곡을 합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일들을 모두 알았고, 하나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로 땅을 정복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이 불 신앙에 속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10정탐꾼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까? 만나와 메추라기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까?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를 맛보지 못했거나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동일하게 누렸고 체험했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해서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기적을 보았다면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확신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눈을 감고서는 감격하면서 찬양을 하다가도 눈을 뜨면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찬송가 가사가 내게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깨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오늘을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이 바로 세례 받고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리서치 회사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인생 최고의 날이 언제인가?"를 물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결혼한 날"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답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많이 나온 대답은 "첫 아이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저도 결혼 생활 후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그 아이들이 태어날 때 마다 가슴 떨리던 감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새 생명을 맞이하는 그 날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쁜 날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슴 떨리며 맞았던 자식들이 모두 부모의 기쁨이 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무자식 상팔자"란 말이 나왔겠습니까? 우리에게 참으로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이 아침! 세례를 받으시는 분은 인생 최고의 날입니다. 그리고 지난 날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세례 받은 날을 인생 최고의 날로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어떤 분이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세례를 다시 받을 수 없나요?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때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억울해서 다시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강요나, 아무 생각 없이 받을 만큼 세례가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 물세례는 이미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가, 이 놀라운 감격을 하나님 앞과 이제 함께 동역해야 할 먼저 믿은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사탄의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는 결코 철종형 그리스인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내 삶을 아낌없이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하는 결의를 담고 감격하며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이 연합된 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어거스틴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죄를 안 지울 수 없는 자였으나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내게 성령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이제 우리는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죄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치지 않고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래 전의 일입니다. 한 부모가 몸이 좋지 않은 아들의 진찰을 위해 미국 해군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담당 의사는 검사를 한 후 그 아이의 간에서 치명적인 종양을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오히려 의사가 더 당황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면서 드디어 공격적인 화학요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공격적인 화학요법은 의사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좀 독한 항생제, 혹은 항암 치료제를 투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의사는 처방을 내리고 약을 투약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더니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의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의사는 자기에게 배우는 의대생들에게 그 아이가 왜 죽었을까하는 문제를 놓고 강의 시간에 연구를 하게 했습니다. 문제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그 아이에게 어떻게 처방을 하고 치료했는지를 역추적해서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아이에게 투여한 약의 양이 정상치의 열 배나 되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실수를 해 버린 것입니다. 그걸 발견하고 나서 그 의사는 죽은 아이 부모에게 자초지경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이야기를 듣던 부모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를 살려 보려고 노력한 선생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죽은 아이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부는 자기 아들을 살려내라고 의사의 멱살을 잡고 아우성치거나 소송을 하겠다고 협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믿음이 아닙니다. 생사의 모든 권한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확신이 아니면, 절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그 부모처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안 당해봐서 모르지만,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그 의사는 큰 감동을 받고 세례를 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후에는 의사 일을 그만 두고 자기 아버지가 경영하던,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자선단체의 재단을 인수 맡아서 운영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재벌이었지만, 그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 재단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재단은 종교계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시상하며 격려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탬플턴 재단이었습니다. 이 재단에서 수여하는 템플턴상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데 테레사 수녀가 이 상을 처음으로 받았고, 빌리 그레함 목사와 우리나라에 한경직 목사님도 이 상을 받았습니다. 이 의사 이름이 '잭 템플턴'입니다. 그가 거듭난 후에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하니까 그 재단을 사용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평범한 의사를 이렇게 놀랍게 변화시킨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주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세워진 거룩함을 따라 살아가는 한 무명의 부모였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순하고 우직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여기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러분! 나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항복하고 바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 나의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주께서 약속하신 빛나고 거룩한 삶의 승리를 오늘 여기서도 체험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는 삶을 사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몸을 드리십시오. 우리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의의병기'로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병기라는 단어는 영어의 'weapon'이 아니라 '도구'라는 뜻의 'insturument'입니다. 이 insturument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한다면 바이엘 10번 정도 그것도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 교회 성가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소리가 달라집니다. 원리는 이와 같습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잡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시면 내 인생은 걸작의 생이 될 것입니다. 다윗의 손에 들려진 작은 물맷 돌 하나도 주님이 붙잡고 쓰시니까 이스라엘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거인 장수 골리앗도 맥없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까? 저 삼손에 드려진 보잘 것 없는 마른 나귀 턱뼈가 주님의 손에 들리니까 불레셋 사람 1000여명이 낙엽 뒹굴 듯 쓰러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탄이 내 인생을 붙잡고 연주하면 내 인생의 소리는 파괴와 분열과 타락의 소리, 그것밖에 안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을 누가 연주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주께 내 드리십시오. 우리 삶의 새로운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주의 뜻대로 행하겠다고 드리는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각오로 세례와 성찬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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