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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의 복 (계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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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입니다. 이 승리는 병행해서 교회의 승리와 성도들의 최후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의 가치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 한 것에 대한 만족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택자 구원 완성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은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용을 잡았습니다. 그 용을 가리켜 옛뱀, 마귀,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탄을 잡아서 일천년 동안 결박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일 것이라고 했습니다(계 20: 3).

용이 천년동안 무저갱에 결박되어 있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천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천년 동안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 기간은 예수 초림부터 시작하여 재림의 날까지를 말합니다. 즉 심판과 함께 용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버리는 신약 시대 전 기간을 말합니다.

여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계 20: 3)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시록 20장 7절에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무저갱에서 잠간 풀려나게 되는 것은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사탄이 최악의 발악을 하도록 허용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 사탄이 그리스도에게 도전하는 기간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안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뱀의 머리는 이미 예수 십자가에 관통되어 꼼짝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머리는 상하여 이미 죽게 되었으나 그 몸통이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도전을 허용하는 것은 도리어 사탄운동의 종지부를 찍기 위함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가 왜 복되고 거룩한가?

Ⅰ.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 입니다.

본문 20장 6절에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20장 5절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첫째 부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육체까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일어나는 둘째 부활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생명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둘째 부활의 기쁨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고통의 불 못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둘째 사망이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했습니다. 둘째 사망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맞이하게 되는 첫째 사망과 대조가 됩니다. 따라서 둘째 부활에 참예하는 불신자들의 부활은 둘째 사망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불 못에 던지우는 영원한 심판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는 둘째 사망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입니다.
첫째 부활(20:4)이 있다는 것은 둘째 부활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①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라고 했습니다(20:4). ②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20:4). ③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 666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20:4).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가 왜 복되고 거룩한가?

Ⅱ.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장 6절에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 입니다. 저들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면서 성전 봉사를 하는 것이 주 임무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가 부여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은 둘째 사망이 저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가 왜 복되고 거룩한가?

Ⅲ. 천년 동안 왕 노릇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장 4절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크게 무천년설, 천년기전설, 천년기후설로 갈라집니다.
천년기전설(Premillennialism)은 예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전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성도들과 더불어 천년간 이 세상을 다스리며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설입니다. 또 천년기전설은 재림후 천년왕국 전에 공중휴거와 7년 환난이 선행한다고 믿는 세대주의(Disrensationalism)의 공중휴거와 7년 환난을 부정하는 역사적(Historical) 천년기전설로 나뉘어 집니다.
천년기후설(Postmillennialism 후천년설)은 예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인류의 대부분이 복음을 믿는 천년왕국 시대가 도래한다는 설입니다.
무천년설(Amillennialism)은 세대주의의 공중휴거도 천년기전설의 지상의 천년왕국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의 재림은 일회적이며 동시에 심판이 있으며 천년왕국은 영적인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무천년설을 성경적 종말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는 천년기전설을 수용하는 입장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교 초기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부분 천년기전설에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년 왕국에 대해서 집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기전설이나 세대주의에 기울어진 종말론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신학적 풍토가 한국에 시한부종말론이 팽배하는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1)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장소입니다.
(1)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0장 4절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2) 순교자들의 영혼이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0장 4절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라고 했습니다.
(3) 거룩한 성도들의 영혼들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0장 4절에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라고 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본문 20장 4절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에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에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에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했습니다.

2) 천년동안 왕 노릇 한다는 의미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심판을 집행하는 일에 동참하여 그 의로운 심판을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에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에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는 자들입니다. 저들에게는 행한 대로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의 왕 되신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제 땅에 있는 교회를 수종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수종드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당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영적 부활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4-2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거듭나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3장 5-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과 사망의 부활로 나뉘어 집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부활은 믿는 자들의 영생을 위한 부활입니다. 심판의 부활은 믿지 않는 자들의 영벌을 위한 심판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단 한번 뿐입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이란 중생하여 영혼이 부활한 상태입니다. 둘째 부활은 육체적 부활, 즉 그리스도 재림 시에 영육이 결합된 신비의 부활체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부활은 둘째 부활의 인(因)이요 둘째 부활은 첫째 부활의 과(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일어나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은 오직 단회적입니다. 부활은 반드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사야 26장 19절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소망의 싹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몸의 부활을 믿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5절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왕노릇 하심은 그가 부활하신 후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왕이 되심과 같이 성도들이 부활할 때에 그런 영광을 얻습니다. 우리가 부활하기 전에는 만물이 우리에게 복종치 않습니다.

고 박윤선 박사는 말하기를 "벼룩 같은 작은 벌레도 우리에게 복종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한 뒤에는 만물이 우리에게 복종한다. 마귀도 우리 앞에서 떨고 천사들도 우리에게 수종든다. 인생이 이 세상에서는 만물의 노예가 되며 그것들 때문에 심령이 흔들린다. 그것들을 소유한 때엔 그들이 그 소유로 인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며 그것들이 없을 때에는 그 없음을 인하여 곤란을 당한다. 그들이 그 타락한 자리에 즐겨 머물면 마귀의 차석이 될 정도로 더럽고 괴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만물이 굴복할 만한 신앙 인격을 가져야 한다. 고린도전서 6장 2-3절에 말하기를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위대한 특권과 지위를 가질 수 있음을 가히 알 수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서 우리 성도들의 본분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약속받은 성도의 몸은 귀한 것입니다. 그 몸은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 몸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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