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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화과와 화류계 (마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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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추수감사절에’라는 시가 있습니다. 김원식이라고 하는 시인의 ‘명동의 그리스도’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씨앗이 되고
삼십 배 육십 배 열매를 맺고
살아 있어도 그렇게 죽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나는 이렇게 어설프게
살고 있다.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채무가 늘어 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빈 잔이 늘어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빈 잔을 놓고 드리는 기도
기도 속에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버지와 함께 가꾸던 과원에서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성구

한해만 참아 주시면
정년 한 해마 참아 주시면 ....

기억에 의존하여 옮기다 보니 정확하게 옮겼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시를 좋아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다 잘 옮긴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무화과(無花果) 비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무화과란 나무 이름 그대로 꽃이 없이 열매 맺는 나무라는 말입니다. 꽃이 없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어떻게 꽃이 없는데 열매가 맺겠습니까? 사전을 찾아보니 ‘자잘한 꽃들이 피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무화과를 심는 것은 꽃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열매를 얻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무화과라는 나무의 이름을 보며 우리도 마치 무화과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은 저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심으신 뜻은 꽃을 보자심이 아니요 열매를 보자 하심이다’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하여 사는 사람과 인생을 열매 맺기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십니까?

벌써 2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청량리에 있는 어느 일식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교인 몇 분과 함께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식당 입구에서 주인이 묻습니다. ‘식사 하시면서 술도 한잔 하실 건가요?’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라 술은 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자 돌아도 보지 않으면서 ‘저녁에 밥만은 팔지 않는다.’ 대답을 하였습니다. 보기 좋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경험을 통하여 일식집 중에는 저녁에 요정처럼 장사를 하는 집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락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 친구 목사가 찾아 온 적이 있었습니다. 오후 한 서 너 시 쯤 되었는데 마침 점심 식사를 하지 않고 있어서 친구에게 점심을 했는가 물었더니 마침 자기도 하지 않았다하여 교회 근처에 있는 어느 일식집으로 갔습니다. 식당에 들어갔더니 점심 장사를 다 마치고 저녁 장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청소 중이었습니다. 장사를 안 하는 줄 알고 나오려고 하였더니 이층에 방이 있으니 이층으로 올라가라 하였습니다. 몇 년 전 경험이 생각나서 우리 밥만 먹으려고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여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계단을 통하여 올라갔는데 이층 복도에는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한복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즉시 이곳도 저녁에는 요정처럼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와 함께 방에 들어가니 벽에 커다랗고 빨간 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는 동양화 한점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꽃이 있어서 인생은 즐겁다.” 저는 즉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밖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화장품 냄새가 짙은 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술집에서 남자들에게 웃음을 파는 여인들을 화류계(花柳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씌여지는 ‘꽃’의 의미는 여성을 아니 인간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조용필씨의 노래 중에 ‘꽃이 아니야, 꽃이 아니야’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노래의 제목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 노래 가사를 들을 때마다 마음으로 동의하곤 하였습니다. 사람은 꽃이 아닙니다. 어느 가수의 노래 중에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가사가 있는데, 제 생각에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은 아예 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사람에는 두 종류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하여 사는 사람과 인생을 열매 맺기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생을 열매 맺기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하여 사는 사람을 우리는 화류계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에 오천만권 이상이 넘게 팔린 것으로 알고 있는 베스트셀러 중에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그것은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반대되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욕심이 이끄는 삶’이 될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과 ‘욕심이 이끄는 삶’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표현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마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하여 살아가는 화류계 인생’과 ‘인생을 열매 맺기 위하여 살아가는 무화과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하였습니다. 그 시험 중 두 번째 시험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발을 붙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가 발을 붙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 구름 떼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사탄이 노리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이 영광 받게 하는 것을 통하여 노리는 함정은 십자가입니다. 사탄이 정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싫지만 그것을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와서 발을 붙들므로 얻는 영광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헛된 영광에 눈 어두워 성전에서 뛰어 내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절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은 그와 같은 시험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여 예수님을 화류계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교인들이 한 오십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인데 교회에서 생활비로 받는 22만 엔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돈으로 일본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사택을 주고 관리까지 해 주기 때문에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 돈으로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느냐를 물었을 때 그 목사님은 일본에는 사교육비가 거의 전혀 들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사교육비가 많이 드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학원 몇 개씩을 보내야만 하고, 입시를 위하여, 어학연수를 위하여, 유학을 위하여 쏟아 붓는 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말 허리가 휘어지도록 엄청난 돈을 쏟아 부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남보다 뛰어나서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부자가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유명해 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좋은 학교엘 가고, 좋은 직장엘 들어가고, 성공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려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와 목적은 ‘열매’일까요 아니면 ‘꽃’일까요? 혹시 우리들은 우리들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저녁이면 요정이 되는 일식집의 잠자리 날개 같은 한복을 입고 짙은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술 취한 남성들의 노리개처럼 취급받고 대우받는 화류계로 만들기 위하여 그렇게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이 사는 목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무화과로 심으셨건만 우리는 화류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하여 죽자고 공부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유치한 일이며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유명해 지는 것이 다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 목적이 ‘꽃’에 있느냐 아니면 ‘열매’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이 열매라면 그 모든 것이 다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간 교역자들과 함께 강원도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하루라도 함께 일하는 교역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놀고 이야기하려고 떠났던 여행이었습니다. 아주 유익했습니다. 강원도 내설악에 저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아주 아름다운 팬션을 지으셔서 그곳에서 먹고 자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강원도 내설악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에 돈과 시간과 정성을 아끼지 않고 다 쏟으시면서 공사를 하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공사를 하시면서 장로님은 저에게 ‘잘 살려고 짓는 것이 아니라 잘 죽으려고 짓는 겁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50살 까지는 정말 죽기 살기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죽기 살기로 그 돈 잘 쓰다가 죽고 싶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인 권사님에게 그 팬션을 맡기시면서 그것을 운영하여 생기는 모든 돈을 교회와 희년프로잭트를 위하여 쓰자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팬션을 교회가 일년 내내 쓰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팬션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좋은 소프트웨어를 교회가 개발하고 전문 사역자를 파송하고 주말마다 아이들을 위한, 청년들을 위한, 부부들을 위한, 가족들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일년 내내 그 시설을 돌리는 것입니다.

버스를 한 대 사서 매일 마다 교회와 그 팬션을 왕복하게 하여 셔틀로 돌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이 순별로, 사역회별로, 가족끼리 별장처럼 주중에도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을 그 시설을 통하여 생활을 하시려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어 투자된 돈을 회수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아주 저렴한 회비만 받아도 충분히 잘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교역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장로님과 권사님이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름다운 팬션은 일년 내내 사람들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냥 단순히 와서 쉬는 정도가 아니라 가정이 회복되고, 부부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아이들과 청년들이 훈련받고 교회의 사역이 활성화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면 장로님과 권사님은 무엇을 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오는 사람들 밥해 주는 일을 하시겠다하였습니다. 김치와 된장을 만들어 그것을 오는 사람들에게 판매하여 운영비를 조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장로님은 그 팬션의 사찰일을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모두는 다 흥분했었습니다. 너무나 근사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장로님과 권사님 가정이 그 일에 쓰시려고 하는 돈이 물론 적은 돈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돈을 쓸 수 있으리만큼 돈을 가진 분이 그 장로님과 권사님 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생각입니다.

그 팬션을 잘 운영하면 돈을 좀 더 버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리 인생을 부요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보람 있게 하겠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나머지 돈과 능력과 기회를 가능한 한 장로님과 같이 조금 더 잘 살려고 하는 일에 쓰지 말고 조금 더 잘 죽으려고 하는 일에 쓰시는 것이 옳습니다. 조금 더 잘 죽으려고 할 때 오히려 삶이 더 풍성해 지고 건강해 지고 아름다워 질 겁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요즘 희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고 살라고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땅을 주셨습니다. 50년 동안 열심히 그 땅을 가지고 농사하고 장사하다가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남보다 더 많은 땅과 재산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은 땅과 남보다 더 많은 재산으로 얼마든지 자기 인생을 화려하게 꽃 피우며 살 수 있지만, 그 땅과 돈을 풀어 보다 가치 있는 일에,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와 희망을 주는 일에 쓰자는 것이 희년의 정신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과 권사님 가정이 실천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희년 정신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먹고 살 것 까지 다 남을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먹고 살 것이 해결이 되고, 그것을 잘 운영하여 남보다 더 많은 땅과 재산을 갖게 되었으면 그것을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가 남을 더 잘 먹이고 자신은 더 잘 죽기 위하여 그것을 쓰자는 것이 희년의 정신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여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셨으나 열매가 없자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왜 이 나무가 죽게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하지 않고 ‘어떻게 (how) 이 나무가 죽게 되었습니까?’를 질문하였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어찌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 뜻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이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어떻게 말라 죽게 되었는가도 중요하지만, 무화과 나무가 왜 말라 죽게 되었는가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묻지 않아도 그 답을 다 압니다. 제자들도 그것은 다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왜’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무화과로 심으시고 시장하셔서 열매를 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꽃 피우느라 바빠서 하나님께 드릴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준비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핑계하며 살아갑니다. 죽을 때까지 돈만 법니다. 번 돈을 한번 의미 있게 써 보지도 못하고 그냥 돈만 벌다가 죽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화과(無花果)로 사시렵니까 아니면 화류계(花柳界)로 사시렵니까?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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