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왕의 심판 : 양과 염소 (마 25:31-46)

  • 잡초 잡초
  • 525
  • 0

첨부 1


본문은 ‘비유’라고 말해집니다만, 실제로는 32-33절만 비유고 나머지는 심판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최후 심판 전체가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심판만 다루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지난주에 이어서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와 관련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재림의 때는 성도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는 때입니다. 홀연히 다 변화되어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을 입을 것입니다(고전 15:51-55). 그래서 모든 성도가 그 날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기쁨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한 것은, 재림의 때에 인자의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신앙인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지심을 나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모든 생각을 ‘나 중심’으로 하다보니까 무심코 삼위의 하나님까지도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생각해버립니다. 물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행복을 위하십니다. 그러나 ‘나 중심의 관점’이 깨어지지 않으면, 예배를 비롯한 모든 신앙이 심지어 주님까지도 자기 행복의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행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도, 죄인들에게 한량없으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도, 만유를 회복하시는 목적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원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고 용납하십니다. 출애굽 광야 길에서도 하나님은 당신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참으셨습니다.

‘내 행복 중심의 신앙’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내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내가 좀 더 편할 수 있다면, 주신 달란트를 몽땅 땅에 묻어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영광 중심의 신앙’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깨어 있고, 주님을 위해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내 행복 중심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영광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구분하는 일입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2-33) 주님의 재림 전에는 양과 염소가 구별되지 않고 섞여서 삽니다.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는 분류되지 않고 함께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때에는 복 받을 양과 저주 받을 염소로 분명하게 나눠집니다. 양도 염소도 아닌 제3의 부류는 없습니다. 양은 “예비된 나라를 상속”(34)받고 염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41)에 들어갑니다. 영원 복락 아니면 영원 형벌이며 천국과 지옥 중간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양과 염소의 행동은 서로 정확하게 대조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2-43) 

그런데 단지 이러한 행위의 차이가 영원한 복과 영원한 형벌로 구별할 만한 조건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도덕 기준으로 보면 이 행위들 간에는 심각한 차이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심각한 차이가 있다고 인정할지라도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요? ‘은혜와 행위’ 혹은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해두지 않으면, 진리의 길을 떠나서 좌로든 우로든 치우치는 신앙인의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할까 합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민 중에 하나는 계속해서 악으로 치우치는 자신의 의지를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혹은 성도라고 불리지만, 하나님 백성답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지만, 하나님의 영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힘겨워합니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두 가지 상반된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는  이미 구원 받았으니까 더 이상 행위에 신경 쓰지 않고 살려는 유혹입니다. 심각한 악만 피하면서 대충 죄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안일함에 빠져든다는 것이죠. 그러나 허물을 범치 않으려는 소극적인 자세로 모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이 참 성도의 자세가 아님을 지난 비유에서 배웠습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확보된 ‘안전’을 유지하며 살기보다 ‘위험부담’을 각오하고서라도 주인을 기쁘시게 하고 주인께 영광 돌리려는 자세를 가집니다. 또 다른 유혹은 신비한 능력을 받거나 그런 능력을 가진 자의 도움을 받아서 좀 더 신령한 존재로 변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나려는 열망 때문에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신비적인 도움을 받으려는 경향에 유혹되기 쉽다는 것이죠.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는 것은 인간이 행한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양과 염소는 섞여 살고 있어도 처음부터 다른 종류의 존재입니다. 사람이 구별할 수 없었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분명하게 구별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한 복을 받을 사람들을 양으로 예정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영벌에 처해질 염소로 유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날에 영원한 복을 주기로 예정되었던 자들에게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상속됩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영원한 복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믿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구원을 얻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에게는 그런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 간과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그 결과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인간의 감정으로는 거리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예정되었습니다. 복음에는 이처럼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는 그토록 분명하게 양과 염소로 구별되지만,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 우리가 양과 염소를 분명하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한 가정 안에서도 예정하신 자와 유기된 자가 섞여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누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자인지 누가 유기된 자인지 분명하게 분리해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원한 복을 받도록 예정된 존재는 그 행위가 영벌을 받을 자와 분명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양은 양이기 때문에 양처럼 행동합니다. 반면 염소는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구제하고 섬기는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37-38절을 보면 의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이러 이러한 일들을 “하였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44절을 보면 저주받을 자들도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이러 이러한 것을 “아니하더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일들 속에서 양과 염소로서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살았습니다. 

염소도 의식적하고 행하는 일에서는 양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의식 없이 행하는 일들 속에서 진정으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염소일 뿐임을 말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영원한 복을 받기로 예정된 자는 진정으로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섬김과 구제와 봉사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고도 무의식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행했다’하는 자기 의를 가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행을 나팔 불며 떠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구원받을 존재의 ‘믿음’과 그의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갈 5:6).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 사람이 방탕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것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의 삶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혜와 믿음을 바르게 알았기에 그는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의 칼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구원 받을 믿음을 가진 사람, 복 받을 양으로 분류될 사람은 무의식중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양이라면 무의식중에라도 양처럼 살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