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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와 함께 좁은 길을 걸어가자! (마 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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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돕고 있으면 가는 길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사람을 붙여주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사람을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도와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남다른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평생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려는 소원을 품으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날들을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을 시위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한 생애를 살아갈 때에 내가 정직하게 살아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원하지 않는 환경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입니다.  아무리 험난한 고난과 고통이 와도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 살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이어도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사람들이 붙들었던 믿음의 공통점은 시간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끝까지 성령을 의지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 거룩한 것에 취한 사람, 하나님의 예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철저하게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겠다는 이 마음이 변하면 안됩니다.  변치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변치 말고 성령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아십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교회와 교인들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은전을 잃어버린 여인이 그것을 찾기 위해 불을 켜들고 밤새도록 방을 쓸고 쓸 듯이 오늘 우리의 잃어버린 신앙을 찾으려고 깊은 곳으로 우리의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의 몸에도 거룩한 흔적인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자고로 새 생명이 태어날 때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격심한 이 고통이 이 땅 위에 한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의 씨앗을 가지고 옵니다

영적인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얻은 생명, 이것이 믿는 사람의 탄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이 새 생명의 고통의 흔적이 있는 것을 크게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픔의 상처 속에서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신앙의 절정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픔의 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과 아픔처럼 사람을 성화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인류를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몸부림과 탄식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깊은 심연에서 내뱉으시는 절규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아픔이 있는 신앙, 아픔이 있는 예배, 아픔이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참된 구도자는 아픔의 상처가 클수록 영적 성장도 큽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상처는 기적의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신앙의 돛입니다.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의 상처는 불행이 아니요 손실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무엇보다도 주님 안에서 삶의 행복을 찾아야 됩니다.  행복 찾기는 인간 삶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이 행복을 찾기 위해서 인간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행복해지려면 우리의 생명을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합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돈이나 떡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더 훌륭하게 조직화하고 위대한 일을 계획하십시오.  위대한 일을 저지르십시오.  믿음은 기대와 포부를 줍니다.  계속 더 큰 기대와 포부를 가져야 됩니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고 모든 염려와 근심을 그쳐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의식을 개발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염려한다고 해서 키를 한자나 더 크게 할 수 없습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염려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는 또 다른 염려를 만들뿐입니다.  또 다른 염려는 결국 실망과 좌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염려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에 더 넘치게 채워주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인생의 교차로를 만납니다.  교차로에서는 어느 길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 하고, 그 길로 발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인생의 교차로와 거기에 따른 중요한 결단을 해야 되는 또, 선택을 해야만 되는 기로에 자주 섭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세상의 모든 인생들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앞에 생명과 사망의 길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복과 저주의 길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두 길이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는 좁은 길이요, 다른 하나는 넓은 길입니다.  그 길을 들어가는 문이 두 개가 있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요, 넓은 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하십니다.  영생이 있는가 하면, 멸망이 있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이 좁은 길과 넓은 길이 교차되는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넓은 문을 선택하여 그리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가다가 멸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을 가다가 영생을 얻는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를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좁은 문이란, 어디까지나 좁다는 것이지 그곳으로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좁다는 것은 그래도 들어갈 수는 있는 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힘들고 매력이 없습니다.  이 길은 험난하기 때문에 택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고독합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적은 수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길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고 실패할 확률이 크다는 것을 경고하십니다.

솔직히 우리 주변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받아서 누릴만한 것들을 다 받은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건강에서부터 시작해서 장수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자녀의 복, 재물의 복, 명예, 권세 등등 이것저것 다 누리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 믿는 것 하나만은 실패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좁은 문을 들어가려고 해도 못 들어가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좁은 문은 점점 기피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는 세태는 앞으로 아마 더 증가할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요즘 세태를 일컬어서 개성이 강한 시대, 개성화 시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와 같이 개성이 다양하고 강한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골라잡고, 싫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태가 되자 이것이 우리의 의식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고, 획일적이고, 무언가 하나만을 주장하는 그런 태도를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 놀라운 복음은 2000여년 동안 끊임없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들을 때는 그것은 너무나도 고지식한 주장으로 보입니다.  독선으로 보입니다.  '오직 예수'라고 하는 말 자체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획일화 된 진리를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종교에는 다 진리가 있다.  어떤 종교를 믿던지 간에 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다원주의적인 사상이나 가르침을 선호합니다.  골라잡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구미에 맞게 종교도 선택하고 또, 그렇게 선택했다고 해도 절대로 밑지지 않는 구원이 있다고 하니 기분 좋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을 자꾸 바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넓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넓은 길은 더 확장이 되어서 20차선 하이웨이가 되어도 모자랄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좁은 문에는 발길이 뜸해지고, 나중에는 그 길이 점점 좁아져서 두 사람이 함께 걷기도 어려운 험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온다고 봅니다.  어쩌면 살아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죽어서 순교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고독한 시대가 올 것입니다.

"좁은 길로 걸어가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미 너희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었으니, 이제는 험하고 고되고 외로운 이 좁은 길, 신앙생활 하는 길을 끝까지 잘 가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움이 많을지라도, 고통이 따를지라도, 고독할지라도, 이 길을 끝까지 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좁은 문 들어서기'와 '좁은 길 걸어가기'는 원칙상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걸어가야 할 길이 워낙 험하고 좁아 보이기 때문에 그 길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좁은 문 들어서기'와 '좁은 길 걸어가기'가 별개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별개의 것인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기'와 '예수 좇아가기'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고백은 신앙생활로 제대로 이어져야 하는데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이 이어지지 아니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왔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들어와 놓고는 겁이 나서 걸어가기를 싫어합니다.  부담이 되어서 주저합니다.  좁은 문으로는 들어왔지만 넓은 세상 길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넓은 길을 기웃기웃 거리면서 그저 적당히 교회만 드나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 반드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아무도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21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흔히들 신앙생활을 일컬어서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유합니다.  바다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연어가 산란기가 되면 과거에 자기가 떠났던 강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떼를 지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큰 물을 거슬러서 강 상류로 올라갑니다.  아무도 그 기세를 못 막습니다.  웬만한 절벽이 있어도 그냥 뛰어 오르면서 계속 올라갑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곰들이 위에서 기다리면서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도 연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잡아먹히는 놈은 잡아 먹혀도 계속 전진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죽은 연어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은 세상 물결 따라서 마음대로 떠다닙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신앙생활이 좁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가기를 각오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이 신앙생활이 좁은 길을 걸어가고, 좁은 길을 오르는 것처럼 힘든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16장 24절을 잘 기억하십시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것이 바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몰랐을 때 가졌던 욕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나 자신을 위해서 내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꿈과 야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부패한 옛 본성이 아직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갓 낚은 갈치가 무섭게 날뛰는 것처럼 우리 안에 옛 자아의 소욕이 그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죽이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부인을 하려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다 수용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이 속하지 아니한 자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다운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끔은 혼자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많습니다.  고독한 길을 선택해야 할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는 신앙생활이 바르고 이와 같은 자기부인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또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자기부인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이 왕왕 눈에 보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기보다는 자기 긍정하기에 바쁘고, 자기를 포기하기보다는 자기의 어떤 생각을 성취하는 데 신앙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마디로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들어 왔을지는 모르지만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상당히 위기에 몰려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큰 위험이 지금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불안을 우리가 가끔 느낍니다.

지난 주에 신문에 난 기사 가운데 최근에 천주교 신자가 늘고, 개신교 교인이 감소한다는 통계청의 발표와 함께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심층 면접한 연구결과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천주교는 75%가 성장했다고 하고, 개신교는 정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회에서는 헌금과 전도를 강조하고, 부담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천주교는 제사와 술, 담배에 대해서도 융통성을 가지고 있고, 헌금과 전도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부담 없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담 없이 자유롭기를 원하는 것은 죄성을 가진 인간의 바람입니다.  더구나 사회가 발전하고 풍요로울수록 사람들은 더 자유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어디에 소속되거나 구애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부담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행하게도 지금 교회 안에는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면류관만 있는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로 주일마다 가득합니다.  헌신과 섬김을 외면한 채 편안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로 주일마다 차고 넘칩니다.  지금 이 땅에는 진정한 구도의 길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 편안한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편안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교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섬김과 헌신이 없는 교인은 종교꾼에 불과합니다.  종교꾼으로는 결코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종교꾼으로는 아무 것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따라서 좁은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무슨 값이든지 기쁘게 치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주일을 지켰다가 빼먹었다가, 산으로 들로 갔다가 교회 갔다가 제 맘대로 하는 사람이 정말로 값을 치르는 신앙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수입이나 생활환경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헌금을 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희생을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알지 못해서 조금 지나면 그 넓은 길이 끝나는 자리에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년이 가도 그들을 붙들고 모욕을 당하고 욕을 먹어가면서 전도 한번 못하면서 주와 함께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와 함께 좁은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희생과 대가를 치를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 걸고 구슬땀을 흘리며 배를 곯아가면서 높은 암벽을 기어올라가는 사람들만이 그 암벽 꼭대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천하를 내려다보는 황홀감을 압니다.  기쁨을 압니다.  거기에 올라가지 아니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 기쁨을 모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자기부인을 하는 자만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부지런히 땀 흘리고 올라가는 자만이 자기 앞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황홀한 감정이 듭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는 이 기쁨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험한 길, 좁은 길을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우리는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올라가는 자, 좁은 길을 가는 자는 그 영광을 바라볼 때마다 즐거워합니다.

찬송가 544장을 4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한숨 가시고 죽음 없는 날 사모하며 기다리니
내가 그리던 주를 뵈올 때 나의 기쁨 넘치리라.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놀라운 황홀감 같은 기쁨이 있다면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좁은 길을 가는 성도입니다

이 시간 제가 드리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면서 힘들지만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분명히 좁은 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록 무겁지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기를 기뻐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광스런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이 좁은 길을 주와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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