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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아홉은 어디에 ....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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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12월 첫 주일이면서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고 도시화된 생활환경과 문명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이라는 것이 조금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라고 하는 것은 꼭 농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고하여 얻는 모든 것이 다 추수하는 의미에서 폭넓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 감사라는 말 보다 그냥 감사주일이라고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희미해졌습니다.
  받은 은혜나 사랑과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고 삽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원망 불평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있습니다. 주어진 것 있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 없는 것에 대한 불평의 소리가 더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짐승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면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거나 배은 망덕하는 사람을 두고 짐승만도 못한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잘 믿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다니니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한 번은 거리에 나가서 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고기를 손에서 놓쳐 버렸읍니다. 때 마침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다가 이게 웬 떡이냐는 듯이 그 고깃덩이를 물고 달아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개가 멀리 사라지고 난후 할아버지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때 마침 한 젊은이가 옆을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젊은이는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고기를 개가 물고 갔는데 무엇이 감사하느냐” 고 말입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의 입맛은 그냥 있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고기가 아무리 많으면 무얼 합니까? 입맛이 없으면 먹어도 맛이 없을 것이고 입맛이 있어도 병들어 소화시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캄캄한 밤에도 별을 보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검은 구름 위의 무지개를 보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보고 감사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한없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추수 감사절만 되면 우리는 햇빛 주시고 비 내려 주셔서 곡식이 여물게 하시고 우리에게 먹을 식량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경제 수준의 발전으로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는 것 가지고 감격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식량난이 심했을 때 어디 가서 목구멍 풀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저 하루 세끼 밥만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열심히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하루 밥 세끼 먹을 수 있는 것은 별로 감사할 조건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자신에게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루 세끼 밥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어느 부분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 구석구석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배어 있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여전히 살건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어리석음과 인색함 때문일 것입니다.
 
  읽은 본문에 감사하는 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는 아홉 사람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이라 불리는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나병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견과 오해를 받은 병입니다. 그것은 저주 받은 병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은 나병만이 아니고 모든 병이 저주를 받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여 저주받은 결과로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나병만이 저주받은 병이라고 하는 것은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질병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그 저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사람들의 교만과 죄악을 다스릴 때 가끔 이병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런 오해와 편견이 생겨난 것뿐입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오해로 인해 이 병에 걸리면 마을 또는 성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자들끼리 모여 마을 밖 지정된 장소에서 지냈습니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양식을 가져다가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심지어 돌 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한 촌에 들어가시니 그곳에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마을로 통하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있다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긍휼을 입어야 하는 인생
  이 나병은 환자들은 긍휼을 원했습니다. “긍휼”이란 말의 헬라어 엘레오스(ἔλεος) 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인간으로서는 가장 비참한 현실 최악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체도 고통이 크지만 병이 그 병이 갖는 이미지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이 요즘의 에이즈 병입니다. 에이즈가 발견되었을 초기에 이병은 성관계에서 오는 병이라고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에이즈의 원인이 꼭 그렇지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아는 사실입니다. 수혈에 의해서 에이즈에 걸렸거나, 어머지가 에이즈보균자로 아이를 가져서 태어날 때부터 에이즈에 감염된 상태로 태어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병에 걸릴 확률도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이즈 환자라고 하면 무조건 부도덕한 하고 소행이 방정하지 못한 문란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봅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병도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병이라는 것입니다. 나병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래서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병 자체의 고통도 컷지만 주변 사람들의 바라보는 시선과 질시 때문에 더욱 괴롭고 비참한 병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와 편견으로 나병 환자를 외면했습니다. 간혹 어떤 자비로운 사람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지만 간혹 던져 주는 돈 몇 푼이나 약간의 식품이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병자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동전 몇 개를 원하지 않았고, 그리고 당장 나병의 육신적 고통만을 고쳐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긍휼을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황을 즉각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제사장을 찾아가서 자기 몸을 보이는 것은 그 병이 치유된 후에나 하는 절차로 나병이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검증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기14: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병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이런 절차 후에야 완전히 깨긋하다는 것을 공증 받아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할 때는 그들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어떤 확증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전히 썩어 문들어진 상처와 흘러나는 피고름만 보이는 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 뛰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확고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들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열 명 모두 주님의 긍휼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긍휼히 여기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함을 얻어야 삽니다. 육신적인 한센씨 병은 현대의학에서 완전히 치료가 가능한 병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나병은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나병에 걸려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기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시 86:15-16절에서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감사하러온 사마리아인 한 사람
  주님의 긍휼하심은 열 명의 나병환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열 명이 다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15-16절에 보면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나은 것을 느낀 이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켜 먼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본문은 그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사례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에 앗스루에 의해 함락된 이후 이방인들과 혼혈되었습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성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과 같이 취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홉은 어디에...?
  예수님은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냐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사람을 일컬어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홉은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로 추정되는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께로 와서 최소한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감사하지 않는 다른 아홉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운 심경을 표현하셨습니다. 은혜는 다 같이 받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⓵ 감사는 신속히 해야 합니다. 
  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해야지 사이다를 김이 다 빠진 후에 마시는 것처럼 지난 다음에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119:60절에 보면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감사나 인사를 해야 할때 하지 못하고 욕을 다 먹고 난 다음에 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마도 열사람 중 신속히 와서 감사한 한 사람 빼 놓고는 모두 나중에 해야지 ... 하며 제사장에게 갔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 중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나았다는 진단을 받고 다시 와서 예수님께 사례를 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이들은 너무 기뻐서 가족에게로 달려갔을 지도 모릅니다. 우선 가족에게 기쁨소식을 알리고 나중에 예수님을 찾아뵈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주님이 그들의 그런 마음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것도 중요하고 가족에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 들입니다. 우선 주님을 찾아 감사해야 신선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선 다른 일보고 나중에 와서 감사하는 것은 그 감사의 의미가 절반 내지는 완전히 감소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감사를 받기를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⓶ 겸손히 감사해야 합니다.
  한 사람 만이 와서 겸손히 엎드려 사례하였습니다. 죽을 죄인이 구원받았으니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해지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감사도 잊어버립니다. 신명기 8:12-14절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 8:17절에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릴때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많이 바칠수 있게 되었다면 적게 바치는 사람보다 은혜를 더 많이 받았음으로 더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드리면 드리고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제 한 사람의 사마리아 인처럼 우선의 감사를 드리는 믿음이 됩시다.
  골 3: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지고 감사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이 사마리아 인이 돌아와 주님께 사례한 것은 그의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 바라보는 마음이 되게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오늘 나의 현실이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하 20:12절에서 여호사밧 왕이 적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 위기 처했을 때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대하 20:21절에 보면 여호사밧은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라고 말했습니다.

  즉 주만 바라본 그에게는 감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세” 라고 찬양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조건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찬양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적군을 다 물리쳐 주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십자가에 지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 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아서 생명을 주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로 돌이켜 그에게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돌아와 사례한 사마리아 인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인정 즉 칭찬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병 고침의 완전한 보장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유형에 속합니까? 긍휼을 받고도 감사치 않는 열사람의 속에 속합니까? 아니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로 사례한 이 사마리아인의 유형에 속합니까?
  우리를 향해 베푸신 주님의 크신 긍휼과 은총에 대해 깊이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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