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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자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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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학자 <베커>는
1964년에 출판된 대표적 저서인 〈인간자본 Human Capital〉에서
국가의 경쟁력은 인간자본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인간을 자본으로 규정하고 인간자본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정과 국가가 교육·훈련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인간자본의 질을 결정하는 데는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메리히> 라는 교수는
인간 자본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회에 있어서 인간자본이 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은 돈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 학력 있는 사람,
        경력 있는 사람이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는 첫째는 의욕이 있는 사람,
      둘째는 책임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바른 판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첨부시킨다면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에 의해서 교회와 사회가  세워져 나갑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숲속에 사는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걸을 때마다 돌부리에 차여 발이 성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여우는 토끼를 잡아 그 가죽을 도로에 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토끼 한 마리를 잡아 자신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사정을 들은 토끼는 놀란 표정을 감추고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우님, 저희 토끼들을 잡아 언제 도로를 다 포장하려고 하십니까.
    그냥 제 꼬리를 잘라 가죽신을 만들어 신고 다니면 될 텐데요.”
보통 이쯤 되면 자기 살 궁리부터 합니다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토끼의 지혜로운 마음이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성공의 길에 서게 만듭니다.
자기 꼬리라도 자르고자 하는 결단 없이는 남을 배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를 말해줍니다.
특히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시하지만
    인간관계는 대수롭잖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7장 특히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
특히 인간관계에서 저지르기 쉬운 잘못에 대하여 경고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신앙생활에 자기원칙을 삼을 수 있는
  생활의 지혜를 얻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 왜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1절)
왜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
여기서 이 비판이라는 말은 `크리노`라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랑 없는 심판이나 정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1)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롬2:1절 [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여기에 보면 아주 마음에 곱 새겨야 할 말씀이 나옵니다.
[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그러니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를 비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워서 침 뱉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한 가지 더 추가합니다.
눅6:37절에서는
[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   
산을 향하여 사랑한다 ! 라고 외치면 me too! 할거고
        병신아 라고 외치면 와 병신아 할 겁니다.
              말 하는대로 돌아온다는 뜻이지요.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를 비판하고자 할 때, 정면으로 비판하지 말라.
그것은 남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다.
비판받는 사람은 비판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의 낮아짐을 인정해야하는데 ,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더 없이 아프게 한다.
      그런고로 정면으로 비판하는 일은 좋지 않다.
또 안 보는데서, 뒤에서 비판하는 것은 더 나쁘다. 이것은 불성실한 일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자 톨스토이는 이런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모른 척해라. 더 중요한 것은 아예 허물이 될 이야기는 듣지도 말고,
  비판해야 될 이야기는 기억하지도 말아라. 그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2) 우리가 그 사람의 전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은
`네가 그 사람의 환경이나 그 사람의 입장이 되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자식만큼은 막말 못한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삶을 바라보기 전에는         
  우리의 판단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좋은 가정과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빈민굴이나 죄악의 소굴에서 성장한 사람이 당하는 시험에 대하여 알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로부터 양육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환경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알기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지나온 삶의 과정들을 이해한다면
    비판과 저주는커녕 그들이 현재만큼 되어진 것에 대하여도
    칭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페르시아에 네 아들을 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한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첫째는 겨울, 둘째는 봄, 셋째는 여름, 넷째는 가을에
    정원 뒤편의 망고나무를 관찰하라.
다른 계절에 망고나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
네 아들은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년 후 왕은 네 아들을 불러 놓고 물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너희가 본 망고나무를 내게 설명해다오`
네 아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불에 타고 남은 폐허 같습니다. 잎이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꽃은 장미처럼 아름답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가 탐스럽습니다.”
왕은 네 아들의 손을 잡고 교훈을 주었습니다.
`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망고나무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더랍니다.
            그러니 사람의 한 면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 구절을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끔직한 죄악으로 인해 비판을 받을 때조차도
그들은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고 근엄하게 찬물을 끼얹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구절을 악에 대한 일체의 정죄를 금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삶 가운데는 판단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는가하면 
    판단하라고 지시된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에 일치하는지 여부를 분별하기 위해
    모든 가르침을 판단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들이 참 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그 죄를 판단하고 범죄한 자를 정죄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때로는
    누가 장로와 집사의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판단 기능을 제거해 버리거나
    모든 도덕적, 영적 표준을 포기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판단이 금지된 영역은 판단을 피하고,
        판단이 지시된 영역은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럼 진정한 비판이란 어떤 것인가?
문제를 수면위로 끄집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비판입니다.
인도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의 ` 틈 ` 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것을 비판해야 할 때는,
    반드시 긍정적인 대안을 먼저 생각한 뒤 비판하라 !
    긍정적인 대안이 떠오르지 않으면 일단 가만히 있어라.
          비판은 긍정적일 때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긍정적인 대안을 생각한 다음,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비판하라.
그럴 때 비판은 가치 있어지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비판의 대상으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다.
아무도 그런 비판에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비판은 쉽지만 꿰매기가 어렵습니다.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수습이 힘든 것입니다.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책임지는 사람,
          비판하는 편보다는 꿰매는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비판하는 자에게 따르는 보응은 무엇입니까?
2. 비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응은 무엇입니까?(2절)
2절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 ]
갈6:7절에도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일찍이 비판에 대한 좋은 경험해 본적이 있어요.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김 선생 시절에 우리 목사님,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때 제 기도제목이 우리 목사님 보다 5분더 기도하는 것,
그런데 기도하는 것만큼 설교는 못하는 것 있지요.
그래서 설교에 대해 늘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하루는 새벽기도 마치고 목사님이 그날은 일찍 일어나 나가요.
나는 기도를 다 마치고 나가니 글쎄, 목사님이 장군을 지고 밖으로 나가요. 
아니 목사가 저럴 수 있나? 서재에서 성경을 읽든지 말씀 연구를 해야지
그래놓으니 설교를 그렇게 못하지 .........  그리고 잊어버렸지요. 
그런데 그 후 신학교에 들어가 전도사로서 농촌 개척교회를 섬기는데
농번기가 되니 교인들이 다 자기 밭에 나가버리고
소위 재래식 정낭이 흘러넘치는데 눈으로 두고 볼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큰 맘 먹고 작업을 하는데
    역시 장군을 지고 일어서는데 내 속에서 [ 지는~! ] 그래요.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지요.
특히 신앙생활 속에서 남을 비판하는 것
    오늘 성경은 비판 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탈무드는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자신,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화제가 되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그럼 비판하는 사람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3. 남을 비판하는 사람의 약점이 무엇입니까?(3-4절)
오늘 본문말씀을 인용한다면 3-4절에
[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보고 자신의 눈 속에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약점은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알고 나면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세요?
자신의 인격이 삐뚤어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격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축복의 그릇입니다.
아무리 그릇이 커도 - 그 그릇이 삐뚤어져 있으면 더 많이 솟아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6>
    자신의 그릇이 삐뚤어 진 줄 모르고
    자신의 기준에서는 바른 말인 것 같지만
        남에게는 상처 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가만히 보면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
“ 내가 틀린 말 했나 바른 말 했지 ” 맞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
이태리에 유명한 피사의 사탑이 있습니다.
      조금 기울어져 있는 탑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삐뚤어 져 있는 피사의 사탑 자신이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세상은 온통 삐뚤어져 있을 것입니다.
사실 삐뚤어져 있는 것은 피사의 사탑이지,
      나머지 건물들은 다 바로 서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유의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4.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유의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5절)
5절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향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
원뜻은 네 눈 속에 통나무를 두고 남의 눈에 톱밥을 빼려고 하느냐? 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통나무와 톱밥`의 은유는
    예수님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예를 들어 사용하는 
    이것은 예수님의 교수 방법의 독특한 면이기도 합니다.
목수였던 예수님은 통나무를 톱으로 자를 때,
      톱밥이 날려 종종 눈으로 들어간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연히 그 눈에서 티를 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손으로 눈을 벌리고 후후 불어야 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도와줘야 할 사람 눈에 통나무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통나무를 눈에 넣고 있는 사람,
      상상이나 됩니까?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지요.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다니며,
                      더구나 남을 무슨 수로 도와줍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의 상상력은 놀라울 뿐 아니라,
    그 유머 감각이 대단합니다.
아마 목수 일을 하시면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이런 꼴이란 것입니다.
대개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투사(projection)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남의 눈의 티는 자신의 통나무에서 나온 톱밥입니다.
이 투사는 무의식적인 심리적 방어기제로서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일종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를 먼저 인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외부에 대한 관심에서 내면에 대한 관심으로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
    `보는 눈이 열리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주기 위해서는 선행해야 할 작업이 있습니다.
어떤 대학의 미생물학 실험실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실시하였습니다.
미생물배양 배지를 만들어 놓고 예쁜 여학생의 고운 손으로
배지 위에 손도장을 찍게 한 다음
그것을 인큐베이터에 넣고 배양을 시도하였습니다.
배양한 결과 어김없이 손 모양을 따라 미생물의 집락이 형성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단순히 깨끗해 보였던 예쁜 여학생의 손에도
각종 잡균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실험의 실증인 셈입니다.
외관상으로는 예쁜 손인 줄 모르지만
        눈을 뜨고 보면 더러운 손이라는 것을 알아야
        남의 눈의 티를 빼려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내 눈의 들보를 발견하고
        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5절을 보세요.
`외식하는 자여,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에 대해 온몸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외식`입니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고상하고 흠 없는 자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온갖 근엄을 가장하여 자신을 치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해 결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 속에 `흠 없음` 이란 들보를 지니고 있기에
  절대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나를 향해
    옳다 그르다는 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자위적 확신 속에는,
    진리에 대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는 교만이 뿌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비판과 가르침을 베풀기를 즐기고,
혹 상대방이 비판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태도를 보이면,
`양약은 쓰다` 는 말로써 친절한 권면까지 덧붙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일컬어 회칠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던 예수님께서           
6절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
는 이 말씀은 전혀 의외의 말씀 같습니다.
5. 6절에서 왜 주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할까요?
분명히 그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빗대어 `개`와 `돼지`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아무리 비유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남을 비판할 때에는 매우 신중할 것을 요구한 예수님이
이처럼 과감한 말을 쓰다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는 세상의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하였지만,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에게까지 그렇게 부드럽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용감하게, 아니 도발적으로 말하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헤롯(안티파스)을 `여우`라고 불렀으며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회칠한 무덤`과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험한 욕설(!)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온유해야 하지만, 
우리는 6절 말씀 속에서 악한 자들을 방관하고 그들과 타협할 정도로
    비겁하거나 유약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 는 문맥을 보아서 
비판과 관계있는 말씀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서두에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는 말씀 속에는
비판을 하려거든 비판을 받아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당시에 경청하면서 마음으로 비판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결코 받아드릴 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방인들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개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개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역설인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방인들을 향해 개라고 하는데
    개는 바로 너희들이다 라는 말입니다.
저희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던 짐승이 돼지인데 너희들이 바로 돼지라는 것입니다.
어찌 바리새인뿐이겠습니까?
복음의 감격이 빠져나가버리고 은혜가 떨어지면
    남는 것은 형식과 외식뿐인 바리새적인 신앙만 남습니다.
혹 예수님께서 오늘 나보고 하신 말씀이 아닌지 자신을 조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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