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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심 (롬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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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교회 여러분은 참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목사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해서 주일 설교 강단을 선뜻 내 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여러분이 그 가치를 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제가 딱딱한 제목을 가지고 여러분 앞에 나선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제가 전도 집회나 강의를 할 때 질문을 많이 받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도 알고, 성경 말씀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범죄하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정죄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아니하느냐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입니다. 본문에 2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송사'하고 '변명'입니다(15절). '송사'란 어떤 사람이 잘못하면 그 사람에게 "당신 잘못하고 있지 않느냐"하고 말하는 것이고 '변명'은 "너 잘못했지 않느냐"하고 말하면 "사실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변명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런 일을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 문필가도 지적하고 있고, 인류의 경험,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죽이고 나서 손을 씻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이지요. 성경이 가르치는 그런 양심과는 꼭 같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모두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양심은 참 중요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행24:16에서 바울은 “나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라고 했고 베드로도 벧전3:16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딤전1:19에서는 사도 바울이“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항상 깨끗한 양심을 가지려고 애를 쓴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양심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똑 같이 주어지는 것이나 어떤 의미에서 가능적으로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바위 속에 있는 철광석을 빼내서 시계나 못 따위를 만드는데 그런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가능성이 그 철광석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콩 속에는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가능성을 주셨는데 그 양심이 어떤 식으로 발휘되느냐에 따라서 양심이 더러워 질수도 있고 약해 질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사람은 양심이 없는 놈" 이라고 말할 때 그가 양심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양심이 더러워 졌고, 양심이 약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전8:7에 보면 고린도 지방은 우상을 많이 섬겼는데 아마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성도들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을 바울에게 한 것 같아요. 바울의 원론적인 답은 이렇습니다. “먹어도 괜찮다”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우상이 있다고 믿습니다. 가령 나무토막 속에 우상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 토막에 제사한 음식을 먹으면 양심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괜찮겠구나라고 생각할 때 우상을 섬겨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에 대해 확고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양심을 약하게 만들거나 더럽게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서 자기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양심이 약해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양심은 때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되는데 그만 끝에 가서 양보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양심이 약해집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교육을 잘못 받으면 양심이 약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 부모님들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양심을 바로 세워 주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때 부모가 일관성 있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양심이 건전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제가 어느 교육학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청소년 교도소에 있는 아이들을 조사해보니 그 부모들의 공통된 특징 2가지가 뚜렷이 나타나더랍니다. 그 한 가지가  그 부모들이 자식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부모들이 자녀들을 벌주고 훈계하는데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걷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약해지고 유혹이 오면 빠지게 되고, 결국은 교도소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은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부모들에게 특히 경고합니다. 나쁘다고 하면 끝까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벌을 주었다가 어떤 때는 가만 내버려 둡니다. 자녀를 키울 때 상당히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교회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복신앙은 나쁘다고 말해 놓고 기도는 기복적으로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도 일관성 있게 해야 합니다.

  양심이 약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옳은 것은 나쁘다고 하고 나쁜 것은 옳다고 하는 그런 양심입니다. 왜곡한다는 뜻입니다. 부모 교육이 잘못되었거나, 학교 교육이 잘못되었거나, 아예 교육자체가 잘못 되어 버리면 완전히 왜곡된 가치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얼마 전 교황 베네딕트16세가 '주관적 양심'이라는 말을 사용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곧 양심이라는 뜻이지요. 주관적 양심이 객관적 양심과 일치한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양심을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합니다(딤전4:2). 왜 양심이 화인 맞을까요? 교육이 잘 못되어서 그럴 수도 있고 문화가 잘못되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요즈음 처한 상황을 좀 아시리라 봅니다. 사람이 이해 관계가 얽히면 얼마나 악해 지는지요. 공부 많이 하고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계일 수도 있습니다.

  나와 관계가 되어있는 문제에 대해서 내가 정말로 양심적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우리가 두려워해야합니다. 바울이 비판한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고 교회에 출석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적인 확신을 가지고 못된 짓을 합니다. 이런 것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밤낮 기도가 하자 보수가 끝날 때까지 아무 일 없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끝나면 감사 헌금도 많이 했답니다. 만일 그 하자 보수 기간이 끝 난 그 다음 날 수도가 터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많은 축복을 해 주었노라고 간증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개인이 다 신앙체험이 있습니다. 중요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에 입각해서 말이 되는 체험이냐를 판단해 보아야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옳고 그른 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어야합니다. 성경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무엇이냐를 알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변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는 것은 양심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은 율법을 지켜야합니다. 적어도 십계명 같은 도덕적인 율법은 지켜야합니다. 히9:14에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양심도 깨끗해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는 사람은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화된다는 말은 우리 인격 자체가 조금 씩 조금 씩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아예 인격 자체가 그렇게 되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되어야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다는 것은 참 힘듭니다. 거룩하게 되면 될 수록 우리는 양심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개하고, 고치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분량대로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문 9-10절에 양심을 속이거나 버리면 그에 상응하는  벌이 있다고 하는 무서운 경고가 있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연일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분위기가 냉랭했다고 합니다. 그 날 저녁 길선주 장로가 교인들 앞에서 양심 선언을 했습니다. 내용인즉 임종을 앞둔 자기 친구가 길 장로를 불러 자기 사후 재산 관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는데 자기가 그만 100달라 치의  재산을 훔치고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교인들 앞에서 고백하고 자기 때문에 이 평양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내일 아침 그 100불에 이자까지 더해서 돌려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부터 부흥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내가 비양심적인 일을 했을 때 나만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주위의 다른 사람, 교회까지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의 양심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올바르면 한국 사회의 양심이 제대로 잡힐 것입니다. 깅변교회 성도님들이라도 주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인정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도 효과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조금씩은 맑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비양심적인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수완이 좋아도 이제는 달라집니다. 세상 적으로도 양심적으로 살면 결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약속했습니다. 물론 그 상을 바라보고만 양심을 지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성도 여러분 자신과 자녀들이 깨끗한 양심을 가진 그런 분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손봉호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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