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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족장들의 간증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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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약속의 책이다. 구약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약속이고, 신약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의 약속이다. 신념이나 미신은 약속이 없지만, 신앙에는 반드시 약속이 있다. 약속이 없는 신앙은 없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본문은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의 간증이다. 천국에서 이들은 무엇을 간증할까요?

1. 약속한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환영하였다(13上).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이 사람들은 족장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뜻이다.

  신약시대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나요? 어떤 분은 제사를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아니다.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구약은 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분명히 오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심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예수님께서 오심을 보지 못했지만, 오신다는 사실을 환영하고 죽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서 실현됨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물론 어떤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에서 분명히 실현되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되었음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약속은 먼 훗날,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이루어지게 된다. 아브라함은 다 이루어졌음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장차 이루어질 약속을 믿으면서,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신앙을 버린다면, 신앙생활이 아니라 투기에 불과하다.

  믿음의 족장들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이미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이런 믿음을 가지려면, 나그네의 삶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 나그네다. (13下)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고백)하였으니”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된다. 천국 백성이 되는 순간, 이 땅에서 외국인으로,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 나그네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떠나간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런 푯대가 없이 방황하는, 방랑자는 결코 아니다.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다. 나그네 인생은, 세상에 미련이 없기에 행복하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귀하게 쓰임 받을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 옛날 어떤 나라에, 왕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었다. 그는 가난하지만 늘 행복했다.

  하루는 왕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가 늘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발사의 답변은 간단했다. “예, 저는 늘 제 삶에 대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그 이발사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이발사가 어떻게, 자기 삶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지, 비결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때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그 이발사는 99의 함정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금화 99냥을 하사하시면, 그도 달라집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그 신하의 말을 듣고, 그 이발사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왕은 이발사를 불러,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금화 99냥을 담은 주머니를 하사했다. 이발사는 집으로 기뻐하며 돌아와, 주머니 속에 든 금화를 책상 위에 쏟았다. 그리고 금화를 세어 보았더니, 아무리 세어도, 99냥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한 냥을 더해서, 100냥을 꼭 채우고 싶었다. 그때부터 매사에 욕심이 생기고, 인색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행복한 마음이 사라지지 시작했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얼굴도 수척해졌다. 어깨도 축 처져서, 힘이 없어 보였다. 결국엔 그도 99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따라서 행복하려면,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이 땅에서,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없다. “나는 나그네다. 어차피 빈손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셨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값있게 다 쓰고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무엇인가 움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난다. 그러나 죽을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다 펴고 죽는다. 빈손으로 가야 한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여관이다. 그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집에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나그네다. 우리의 연수는, 그 집의 전세 기한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나그네로서 살아야 한다. 나그네는 머무르지 않는다. 떠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잠깐 가지고 있다가 놓고 가야 할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믿음을 따라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2.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다(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본문에는 두 종류의 본향이 등장하고 있다.

(1) 나온 바 본향, 땅에 있는 본향이다(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이는 과거적인 본향이다. 우리 육신이 태어난 곳이다.


(2)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본향이다(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는 미래적인 본향이다. 우리 영혼이 가서 영원히 살 곳이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과거 지향적이다. 땅엣 것에만 집착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걸어갈 때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의 몸은 출애굽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출애굽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온 바, 애굽 땅을 그리워했다.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를 그리워했다. 애굽에서 누워 자던 푹신한 잠자리를 그리워했다. 결국 그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만 일삼았다.

  롯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멸하실 때, 자기의 나온 바 자신의 집을 뒤돌아보았다. 그래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믿음 없는 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르다. 과거 지향적인 삶을 살지 않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산다. 

  가나안 땅에 흉년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가 나온, 고향 갈대아 우르를 생각했으면 얼마든지 그곳으로 갈 수 있었지만,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기에, 아브라함은 그곳에 미련 두지 않았다.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15).

  그는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잠시 애굽 땅에 내려가서 피난했다. 그러나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왔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많은 교육을 받았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육신적인 자랑거리들을 모두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는 두번 다시 버린 것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면서, 날마다 줄달음질 치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과거 지향적인 삶이 아니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 바란다. 어떤 장로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일생토록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은퇴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50평 짜리 아파트 한 채와, 퇴직금을 넣어 둔 은행 통장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큰아들이 장가갈 때, 50평 짜리에서 35평 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는 그 차액으로 아들 부부에게, 자그마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몇 년 후 그는 딸을 시집 보내면서, 다시금 20평 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그러고 난 뒤에 그는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이렇게 유언을 했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과, 통장을 상속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내가 죽는 그 날, 이 집은 하나님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리고 통장에 있는 돈도, 내가 천국 갈 때 노자돈으로 다 써야겠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아라.”

  그리고 그 장로님은 자기 전 재산을, 교회가 건축할 때 하나님께 헌금으로 바쳤다. 물론 자녀들도 장로님의 뜻에 기꺼이 따랐다. 장로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6:20)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다.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지 말기 바란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기 바란다.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때로는 험하고 고달플 때도 있다. 그러나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늘 밝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자.

3. 하나님의 축복(16下).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을 따라 살려면, 2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1) 나그네로서 살아야 한다.

(2)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도, 역시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1)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하였나?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 삶을 책임지시고 지켜주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출3:6)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가리켜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날마다 동행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고,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신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격스럽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해 주셨다.

가끔 손님이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남편들은 덜 당황스러워 하지만, 아내들은 굉장히 당황한다.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을, 젊은이들은 ‘귀빈’이라고 부른다.

  “귀찮은 빈대”라는 뜻이다. 말로는 어더 들어오라고 하지만, 준비가 안 되어서, 속으로는 내키지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성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그곳은 이미 창세 전부터 예비된 곳이다(마25:34). 하나님은 그 성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 성은 히11:10 말씀과 같이, 사람이 경영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성이다. 정말 영화로운 성이다. 이런 훌륭한 성을 예배해 놓고 기다리신다.

  어떤 권사님께서 일찍이 홀로 되셨다. 그는 콩나물장사를 하시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웠다. 자녀들이 잘 자라서, 사회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자녀들이 판검사와 큰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자녀들은 어머니에게, 용돈도 후하게 드렸다.

그런데도 권사님께서는 예전 오두막집에서, 홀로 구차하게 살고 계셨다. 그래서 자녀들이 권사님을 찾아와서 애원했다. “어머니, 이제는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으니, 혼자 이렇게 구차하게 살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사십시다.” 계속 찾아와 말했다.

  권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들이 그토록 애원하니,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너희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날 위해서 이런 집을 한 채 지어다오. 바닥은 온통 금으로 깔아라. 집의 기둥은 12개를 세우고, 기둥에는 각기 다른 보석을 박도록 하여라. 문도 열 두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문은 진주로 장식을 하도록 해라.”

  자녀들은 픽 웃으면서, “어머니, 농담마세요?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어요?” 그러자 그 권사님의 말씀은 걸작이었다. “왜 그런 집이 없어,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 그런 집을 분양 받아 놓았다. 그곳에 가서 살게 될 테니, 나더러 그보다 못한 집으로 이사 가서, 살라고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새 예루살렘성은, 너무 영광스러운 곳이다. 찬란한 성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되는 순간, 우리는 그곳에 올라가서 세세 무궁토록,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다.

  믿음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신다.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 따라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란다. 새 예루살렘 성, 천성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20세기 초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헨리 모리슨 선교사는 40년 간,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가 탄 배에는, 마침 약간의 정치적 임무와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가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배가 뉴욕 항구에 도착하자, 커다란 팡파레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마중 나온 환영 인파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루즈벨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붉은 카펫을 밟고, 항구를 빠져나갔다. 대통령이 사라지자, 팡파레 소리도 그쳤다. 카펫도 치워지워, 군중들도 다 흩어졌다. 그 항구를 혼자 쓸쓸히 빠져 나오면서, 모리슨 선교사는 눈물 흘렸다. “하나님, 이것이 저의 40년 간의 헌신의 결과란 말인가요?”

  바로 그 순간에, 아름다운 저녁노을 너머로,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이 있었다.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에는, 팡파레가 아닌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로, 붉은 카펫이 아니라, 황금길을 깔아 놓고, 내가 친히 마중하마!”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 나그네 된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마감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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