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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과 에서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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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펴볼 본문은‘야곱과 에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삭이 낳은 쌍둥이 아들로서,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입니다. 에서는 온몸에 털이 많고 피부색이 붉고 성격이 활달하였으며 들에 나가서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매끈한 피부에 성격이 조용해서 집안에서 머물면서 집안일을 도와주기를 좋아했습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지만 생김새나 성격이 매우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에서와 같은 사람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활동적인 점에서 좋은 성격이라고 할 수 있고, 야곱과 같이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도 나름대로 좋은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병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어떤 성격은 좋고 어떤 성격은 나쁘다고 단정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와 야곱이 아주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에서와 야곱에 관해서 언급할 때 에서는 정죄하고 야곱은 칭찬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 시간 저는 야곱과 에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잠언 23장 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평소에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마음에 품은 생각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돼지는 항상 먹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배가 부르면 누워서 잠을 잡니다.  이 세상에는 윤리도덕도 망각하고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생활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부른 돼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인륜에 따라서 살고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등 정신적인 생활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에서와 같은 사람과 야곱과 같은 사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에서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일에 몰두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에서가 날마다 들에 나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냥에 몰두하였듯이, 자나 깨나 세상일에 분주하게 쏘다니는 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고, 즐길 일도 많아서 세상사는 재미를 톡톡히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인 일에 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흩어져 이웃에게 전도하고,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상급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보다고 생각합니다.

에서는 사냥하는 일에 지나치게 열중했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뛰어 다녔던지 집에서 돌아올 때는 심히 곤비했습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칭찬받을만한 일이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사냥에만 그토록 열심 낸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에서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찾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한 것은 이만저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당장 배고픔을 면하는 것을 영적인 축복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오로지 자기의 욕망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만약에 에서가 하나님의 복을 귀히 여겼다면 아무리 시장해서 죽을 지경이 되었어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을 계승하는 권리를 말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의 뇌리에는 자나 깨나 장자의 명분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장자가 아니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을 상속받지 못하게 된 것을 두고두고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장자의 명분을 차지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배가 고파 죽겠으니 그 붉은 죽을 좀 먹자구나”라고 했을 때,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와 장자의 명분을 흥정하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 에서의 시장 끼를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려고 한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아주 잘못된 행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행동은 그가 하나님의 복을 얼마나 간절히 소망하였나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복을 이처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간 우리는 과연 나는 에서와 야곱 중에서 어느 편에 더 가까운지 진단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되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먹을 것과 물을 찾듯이 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도 마찬가집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기왕에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미지근한 신앙상태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열과 성과 힘을 다해서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매우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하루 종일 사냥감을 쫓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엌에 들어갔더니 마침 야곱이 에서가 그토록 좋아하는 팥죽을 쑤고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었습니다. 에돔은 붉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의 피부색이 붉을 뿐 아니라 팥죽을 유난히 좋아한 데서 비롯된 별명입니다.

야곱이 팥죽을 쑤는 것을 본 에서는 반가워하면서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내가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죽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까? “배고파 죽겠다” “몸이 아파서 죽겠다” 심지어는 “너무 좋아서 죽겠다”는 말도 합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죽게 되었다고 한 것은 정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배가 몹시 고프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에서가 그렇게 말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정작 에서의 잘못은, 야곱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하였을 때 자기의 불신앙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에서는 말하기를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야곱이 “오늘 내게 맹세하라”고 했을 때, 서슴없이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망령된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농담이든 진담이든 에서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유머가 필요합니다. 한 마디의 유머가 어색한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농담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있고 삼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토록 고심하였건만,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어떤 사람은 야곱이 의도적으로 에서와 장자의 명분을 흥정할 요량으로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올 때에 맞추어서 팥죽을 쑨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는, 그것은 지나친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야곱이 팥죽을 쑤는 동안에도 내내 장자의 명분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야곱은 팥죽을 쑤면서 이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야곱이 그만큼 하나님의 복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였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다윗은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 143:6)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라 자손이 지은 시편 84편에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심령 위에 신령한 복과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런즉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지르기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도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따라오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딱한지라 예수님께 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니,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복음서를 통틀어서 주님께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이처럼 냉정하게 대하신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로 믿고 나왔는데, ‘개 같은 너와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고 하시니 누가 보아도 너무하신 처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여자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예수님은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 여자의 딸이 나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호소를 냉정하게 대하신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셨을까요?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지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습니다. 개와 돼지는 영적인 축복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오직 세상 것만을 열심히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경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에서와 같이 되지 말고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되셔서 언제나 물댄 동산 같이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해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고는 떡과 팥죽을 맛있게 먹고 일어나 갔습니다. 그는 자기의 경솔한 행동에 대하여 후회하는 빛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은 에서의 성격이  낙천적인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데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치 없는 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찮은 일에 시간과 정력과 재물을 낭비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바꾸고 말았으니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사고 나자, 어떻게 하면 장자의 축복을 자기가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 때가 왔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에서는 즉시로 사냥하러 나갔습니다. 그가 비록 믿음이 없는 자이지만, 장자의 축복을 마다할 일이 없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야곱에게 팔아먹었지만 그래도 장자의 축복은 자기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흐뭇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리브가가 엿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서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변장을 하고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이삭에게 들어가서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이삭은 눈이 어두운지라 야곱을 수상히 여기면서도 속아 넘어가서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야곱이 방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에서가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였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야곱에게 빌어 주었으므로 에서에게 빌어 줄 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에서는 방성대곡하면서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으로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삭의 축복은 일개 가장으로서 축복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계승한 선민의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축복한 것을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삭은 비로소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을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속임수로 가로 챌 수도 없습니다. 만약 속임수로 하나님의 복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므로 도저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인간의 속임수를 모르시겠습니까?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복을 계승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기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과 장자의 복을 빼앗긴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복을 하찮게 여긴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형과 부친을 속이는 악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그의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사건을 보십시오. 그가 형 에서의 복수를 피하여 밧단 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여 거기서 20년을 지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종이 와서 전하기를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달려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야곱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형 에서가 20년 동안 원한의 칼을 갈고 있다가 이제 원수를 갚으러 달려온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밤에 야곱은 혼자 얍복강 가에 남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밤중에 웬 사람이 달려들어 붙들고 씨름을 하는데, 야곱은 그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직감했습니다. 밤새도록 씨름하다보니 날이 밝아 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이에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니 환도뼈가 위골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도 야곱은 천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그 사람이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야곱이니이다.”하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축복하기까지 끈덕지게 매어달린 야곱의 신앙 자세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든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사모하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 받기에 합당한 마음 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 29장 13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고, 호세아 6장 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를 사모하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의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신 까닭은 후대에 사는 우리에게 신앙의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날도 에서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곱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에서와 야곱, 둘 가운데서 어느 편에 서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6,17)고 경고하십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 여러분은 망령된 에서를 본받지 마시고, 모두 야곱과 같이,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은혜를 사모하시며,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전력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과 함께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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