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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울이 오기전에 (딤후 4: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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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며칠 사이로 날씨가 추워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리는 비도 낙엽을 지게 하는 비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비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이제 그야말로 겨울로 들어서는 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아마 이때쯤 되면 특별히 추위를 느끼기도 하고 높은 산간지역에서 들려오는 눈에 관한 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또 본격적으로 겨울 용품이 팔리기도 합니다. 아마 저도 이러저러한 생각을 해서 얼마 전에 교회 난방시스템이 잘되는지 한 번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겨울의 정서라고 하면 ‘낭만’ 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금방이라도 흰 눈을 토해낼 것 같은 잿빛하늘의 음습함속에 약간은 구겨진 코트에 싸여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의 정서, 혹은 손가락처럼 남아있어 그 중 부유해보아야 나뭇잎 몇 개 달고 있고 빈한한 것은 그것조차 없이 뼈대만 남아있는 앙상한 가지들의 모습, 그리고 그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하늘 면을 가르고 있는 겨울의 분할된 하늘의 구도, 아마 겨울은 이와 같은 정서들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또는 매서운 추위 때문에 온 대지가 얼어붙고 있을 때 따뜻한 실내에서 물방울이 서리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그 서린 물기를 쓸어내려 내어다 본 바깥의 풍경, 아마 잠수함 속에서 느끼는 고립속의 통로를 느끼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겨울은 이와 같은 낭만적인 정서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 용품이나 레저 용품들을 파는 사람들은 혹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추위조차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겨울은 너무나 가혹한 계절입니다. 겨울의 상처가 추억인 사람에게는 그 추위가 파고드는 에임이 너무 아프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겨울은 매우 쓸쓸하고 외로울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약시대를 일구어 간 대 사도로서 역할을 감당했던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여 주의 종으로써 그의 모든 일을 감당했지만 역시 누구나 겪게 되는 말년의 겨울과 같은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해가 서산에 걸린 것처럼 삶의 태양이 뉘엿이 지고 있는 것을 보며 사도바울은 한점 혈육조차 없는 이 세상에서 그의 제자이며 동시에 아들과 같이 여기고 있는 디모데에게 그의 속사정을 내어 보이며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앞서 있는 <4장 9절>부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디모데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제 나의 생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아는 이 시점에서 나는 내 행동조차도 부자연스러운 이 감옥 속에 슬픔과 외로움 속에 잠겨있다. 이전에는 네게 이웃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내 생명이 거의 다해갈 즈음에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났고 나는 더욱더 마음이 메이는구나. 나를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서 목숨까지라도 바칠 것 같은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내 주변에서 모두 사라져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오직 누가만 혼자 남아서 촛불처럼 나를 지켜주고 있구나. 디모데야 네가 어서 오기를 원한다. 네가 올 때는 나를 위하여 유익한 마가라는 사람을 데려오라.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인사를 차려주기 원한다. 그리고 내가 추워하니 겨울 외투를 하나 가져다 다오.” 이러한 사람에게 인사를 해라 하고 사도바울은 장황한 그의 마음을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애틋한 내용 중에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라는 내용을 살펴봄으로 우리 삶의 적용을 이루어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왜 겨울 이전에 오라고 했을까? - 이것은 몹시 재촉하고 있는 듯한 문필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오늘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고,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디모데가 이제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해서 와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겨울에 항구가 얼어붙어 시간이 지나 오지 못하게 되면 마침내 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분명히 알고 있기는 스스로 느끼기에 자신은 봄까지 생명을 유지할 만한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내 생명을 봄까지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으니 디모데 너는 어서 속히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떠날 것 같은 마음이 들고 뿐만 아니라 내가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예수의 꿈이 있으니 너는 어서 속히 와서 이를 전수받기 원하노라. 특별히 나와 함께 이 일을 의논하자” 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첫 번째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나 마음에 원치 않아도 그에게 겨울은 온다’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렇게 원치 않아도 겨울은 옵니다. 대자연의 원리는 <순환>입니다. 낮이 되면 밤이 되고 밤이 되면 또 낮이 됩니다. 봄이 오면 여름 되고, 여름 되면 가을 오고, 가을 오면 겨울이 됩니다. 아무리 더운 지방 추운 지방이라도 그 나름대로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있게 마련입니다. 잎이 파릇하더니 여름 되어 무성하고, 가을 되면 낙엽지고, 그 낙엽위에 눈이 덮이고 습기가 다 축축해져 썩어져 이듬해 또 다시 피어나는 새싹에 도움이 되는 생명으로의 부활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순환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입니다. 추위만 계속되거나 더위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유쾌함일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계속되거나 밝음이 계속 된다면 그것도 역시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만약에 이렇게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겨울 싫어하는데요, 겨울 오지 않게 해 주세요. 여름 싫어하는데 여름 없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우리에게는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마음에 원하건 원치 않건 여름도 있고 겨울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계절이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바가 이루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 마음에 간절히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내 마음을 바꾸어서 내게 주어진 삶을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게 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을 가장 선명히 보여줍니다. 순응하는 것, 믿음의 그릇을 키워가는 것, 그것 역시 우리 삶에 주어진 여러 가지 아픔들을 헤어나갈 수 있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대자연의 법칙은 자연 속에 순응하며 그들의 길을 찾아 하나님 앞에 그들의 삶을 이뤄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이뤄가야 합니다. 내가 언제나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의지대로 다 형통하다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 우리 삶의 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내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게 주어진 삶의 모든 여건들을 수용할 수 있을 때, 어떤 경우라도 내가 그것 가운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순응하고 수용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역사의 방법은 순환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수용해도 그 슬픔이 기쁨으로 순환되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수용해도 그 아픔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화려함으로 우리들에게 순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고통이 있어도 그 고통을 접어두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 사랑이 있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아마 집에서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그때까지 칭찬도하고 때로는 꾸짖음도 하며 그 아이들을 바로 세워갈 겁니다. 성경에도 초달을 못하는 자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칭찬도 해가며 아이를 바르게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그렇게 꾸짖는다면 그 아이는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수도 있으나, 부모와 자식 간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으니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거리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당하지만 고통의 기억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또 다시 뛰어가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사랑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마음에 원해도 원치 않아도 우리 삶의 다양한 국면을 맞이합니다. 마치 내가 원치 않아도 겨울이 오는 것처럼 삶의 다양한 국면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추위가 싫어도 추위는 오고, 더위가 싫어도 더위는 옵니다. 소망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우리들에게 더위가 왔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눈이 왔다고 해서 우리 삶이 다 얼음으로 덥히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녹아져 흘러내리게 되고 비처럼 우리를 씻겨주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원치 않는 국면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장면 하나하나를 내가 보고 있는 화면과 같은 장면으로 맞이하여 수용할 수 있는 의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남들을 용서해주고 어려운 가운데도 배려해 줄 수 있으며, 후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텔레비전 한 대 정도는 다 가지고 계시죠? 아마 채널이 여러 개인 것 같습니다.

한 채널을 틀면 웃는 소식이 깔깔거리고 나오는 데, 또 다른 채널을 틀면 거기서 슬피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죠? ‘이것은 방송의 한 장면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도 여러 채널이 있잖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여러 장면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슬픔의 장면, 기쁨의 장면, 평탄한 장면, 고통스러운 장면, 여러 가지의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우리는 기쁨의 장면을 틀고 그것으로 기뻐하면 기쁘게 사는 것이고, 슬픔의 장면을 틀고 슬퍼하면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삶인 것을 봅니다. 이런 삶 속의 장면이 있을 때마다 이것은 ‘내 삶의 한 장면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순환시켜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에 합당합니다. 인생의 겨울이 온다고 해서 우리는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겨울은 곧 지나갑니다. 겨울은 그 꼬리에 봄을 달고 옵니다.

여러분, 어둠 속에 모든 사물들이 정지된 것처럼 느끼지요.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아요. 사람도, 벌레들의 꿈틀거림도, 나뭇잎의 흔들림도, 심지어는 커다란 물체의 움직임도 우리들에게 잘 파악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운데 모든 운동이 정지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정말 괴롭고, 눈물나고, 슬픈 일이 내 주변에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마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와 같이 정지된 화면처럼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무엇인가 우리의 기쁨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모든 것들이 정지되고 있는 것 같지만 아침에 햇살이 밝아오게 되면 그 가운데 모든 것이 화려하게 움직이는, 이와 같은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어둠 속에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데 어둠 때문에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빛이 있어지면 그동안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여러분 연극, 뮤지컬, 혹은 오페라 이와 같은 것을 보면 한 막이 열려서 활발히 이루어지다가 이제 한 막이 내려지게 되면 바퀴 굴리는 소리 같은 거 나죠. 있었던 세트 다 치우고 또 다른 세트를 장만하게 되죠. 아마 그렇게 되면 또 막이 열려지고 불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우르릉거리는 바퀴 굴리는 소리, 여러 가지 세트 다시 만드는 소리, 우리는 잠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그와 같은 소리를 앞에 있는 사람들은 들으실 겁니다.

뒤에 있는 분은 그것도 들리지 않을 수 있겠죠. 그러나 분명한 것을 압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저 가려진 휘장 뒤에는 또 다른 세계가 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단막극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단막극이 아니에요. 얼마든지 많은 삶의 장면이 전환되고 바뀌고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여러 번의 막이 있는 삶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의 겨울이 온다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말 것은 바로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빛이 비춰지게 되면 얼마든지 삶의 장면은 전환되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무능한 시간 같지만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나가는 은총의 시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더 큰 기운’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삶의 더 큰 기운’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삶의 더 큰 기운'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멀리 전등불이 하나 깜빡 깜빡 까만데 보여요. 깜깜한 밤중에 전등불이 하나 보이면 우리는 그 빛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밝고 좋구나!' 하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해가 환희 드러났어요. 그러면 그 전등불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삶 가운데 이러저러한 많은 집착되던 것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집착되던 슬픔, 아픔, 눈물, 기쁨, 그렇게 좋아하던 모든 일들, 마치 그것이 우리들의 전부인 것 같고, 슬픔이 전부인 것 같고, 그 기쁨이 내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그것보다 더 큰 기운의 힘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은총의 빛이 내려질 때 이전의 것은 별것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내가 이전에 누렸던 그 모든 것을 나는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그 자랑스러웠던 모든 배경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능력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상한 지식에 비하면 그것은 배설물과 같이 비교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이라는 것은 정말 내가 겪는 고생,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겪는 기쁨이 전부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갑자기 길가다 걸려서 넘어졌어요. 무릎이 까지고 피도 좀 비치는 것 같아요. 팔꿈치도 좀 까진 것 같아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죠. 그런데 ‘내가 왜 넘어져?’ 하고 기분 나빠하는데 눈앞에 번쩍거리는 보석반지가 하나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물론. 여러분 나름대로 ‘아, 감사하다 누가 떨어뜨리고 간 것을 주인 찾아줄 테니까 감사하다.’이런 마음으로 여러분 마음이 흐뭇할 겁니다. 그런 수준이 안 되는 분들도 있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 도와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구나. 그런데 우리 살아가다 보면 정말 실수하고 넘어지고 어려울 때 우리가 그때 많은 것을 소득하게 됩니다. 여러분 좋은 아이디어가,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번쩍하고 떠오르는 것도 대부분 우리가 미끄러질 때입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생각나지 않습니까? 평범할 때 모든 게 잘 되고, 노래하고 춤출 때는 그런 아이디어가 별로 생기지 않잖아요.

쉽게 다른 것으로 이야기 합시다.
여러분이 넘어져서 무릎이고 팔꿈치고 피가 났어요. 그랬더니 속상해서 넘어져있는데, 갑자기 "따르릉"하고 주머니에 있는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어요. 그래서 전화를 받았더니
"엄마, 혹은 아빠! 나 오늘 합격했어요."
요즘 수험 철이잖아요. 나 합격했어요. 그러면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합격이고 뭐고 다 귀찮다. 나 지금 넘어져서 아파 죽겠는데."
이렇게 말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합격했다는 소리 들으면 아픈 것은 하나도 생각 못하고
"정말 고맙다. 너무너무 기분 좋은 날이다. " 아마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더 큰 기운이 우리를 휩싸면 우리가 누리던 작은 아픔들, 눈물, 슬픔, 혹은 기쁨, 그와 같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큰 기운이 우리를 휩싸게 될 때 우리는 그 가운데 다 덮여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삶에는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더 큰 기운이 우리에게 닥칠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여 하나님의 기쁨 속에 겨워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능력과 맞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운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를 엄습하고 있던 모든 세상의 고통스러운 사실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는 것은 겨울이 오면 우리의 원함이 있어도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이미 와버리면 내가 그것을 원해도 이룰 능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보채는 의도를 우리는 압니다. 디모데가 올 것은 분명히 알았어요. 그런데 전후 사정을 보니 디모데도 분주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것저것 살펴보느라고 깜빡해서 늦게 오면 그 오려고 했던 수고도 허사가 되고 디모데가 올 수 있었던 능력이 있어도 허사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시간의 개념입니다. 사도바울은 일촉즉발의 시기 속에 시초를 다투어 마음이 급합니다. 어서라는 의미의 말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를 사용할 때만 그것이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부탁이라도 받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수고하고 애써야 합니다.
기회라는 것은 지나가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힘들여서 애를 써도 소용이 없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기차 지나가고 나서 손들면 멀리 보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장면일 수 있습니다. 멋진 그림처럼 보이죠. 그러나 본인에게는 마음 아픈 일일 뿐입니다. 우리의 주님을 위한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기회 있을 때 하셔야지요. 힘 있을 때 하셔야 합니다. 건강할 때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괜찮을 때 하셔야 합니다. 무엇인가 마음에 의욕이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 하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현직에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다른 일조차 잘 못할 때 어떻게 주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까지 멀쩡했는데, 오늘 갑자기 병원에 가보고 오늘부터 갑자기 환자가 되는 거예요. 나 어저께 까지 괜찮았는데 왜 내가 오늘부터 갑자기 환자가 되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인생의 모든 것들은 어찌 하룬들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주를 위한 일도, 이 세상의 일도 성실히 할 수 있을 때 성실히 하셔야 합니다. 열심히 일할 기회가 우리들에게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건강도 언제나 유지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지혜도 언제나 유지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지혜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생각조차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대부분 여러분들 집에서 아이들 자랄 때보면 아빠들이 바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집에 가서 아이들하고 잘 놀아주질 못하죠. 친해지려면 공부시키면 안 친해지고 놀아줘야 친해지거든요. 바쁠 때는 잘 못 놀아줘요. 그런데 좀 지나서 여유도 좀 생기고 해서 애들하고 놀아주려고 하면 애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는 너무 커서 이제 놀기에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마 그렇게 얘기 할지 몰라요. 모든 것은 때와 시간이 있어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멀리보고 그 가운데 내가 어느 곳에 내 마음과 시간과 내 삶을
투자할 것인가 하는 것이 결정돼야 하는 것이죠.
<이사야 59장 1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촛대를 옮겼습니다.
그때는 곰같이 슬피 울고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울부짖어도 그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촛대가 내 앞에 놓여져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전 우리 성도님들을 볼 때 우리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무엇인가 주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며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애틋한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 가지며, 얼마나 높은 탑 쌓으며, 얼마나 많은 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일을 우리 삶 속에 아낌없이 이루어드리고 그리고 다른 이에게 아낌없는 배려와 베풂 속에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부르면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런 심방을 했습니다. 아픈 분인데, 전에도 아픈 상태로 봤지만 그래도 늘 마음이 아픈 것 같아요. 쾡 한 눈, 그리고 얼굴도 변색이 되어 노래진 것 같습니다. 배는 복수가 가득 차서 그것을 빼내느라고 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정말 환자를 심방한 목사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는 일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분도 자기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업적을 가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기도를 드리면서 이렇게 애타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낫고 일어나는데, 목사인 저는 왜 기도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느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도 싶었습니다. 기도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맞고 있는 주사 네 대가 항암제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맞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정말 안 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제가 이렇게 건강하고 성하다는 것이 너무 죄송한 거 같았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프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그분이 웬 종이를 갑자기 꺼내시더라고요. 이제까지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여러 번 뵀는데, 목사님 오늘은 제가 한번 기도를 하겠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기도를 잘 할 수 없어서 이렇게 썼습니다. 조그만 글씨로 종이 앞뒷면을 빡빡하게 썼습니다. 전에 제게 세례를 받은 분인데 교회봉사는 한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주일 출석만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주일 출석도 많은 배려를 받고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기도할 수 없어서 이렇게 기도문을 썼는데 제가 지금 이것을 읽어서 기도하겠습니다. 한손에는 주사바늘 꽂고 한 손에는 그것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시는데 매우 오래 걸렸습니다. 읽다가는 눈물 때문에 중단하고, 읽다가는 눈물 때문에 중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그분도 같이 심방 갔던 분도 그분의 식구도 모든 주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저는 제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또 때로는 좀 아파야 덜 미안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분 기도하는 것을 보고 생명이 다 꺼져 가는데, 차릴 인사는 다 차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제까지 기도해 주셨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야말로 인사를 다 차리는 것 같아요. 그 모습을 보는데 여러분 시골에 가면 남폿불이 있죠. 이런 등잔이 있는데 거기에 등유 같은 것을 넣어요. 거기에 불을 붙이면 옛날에 등유가 타면서 불꽃이 올라와서 주변이 밝아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등유가 다 타면 마지막으로 뭐가 탑니까? 심지를 올리지 않습니까? 등유가 다 타면 마지막으로 심지가 탑니다. 그 심지가 탈 때 그을음과 더불어 바사삭 타는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그 분을 보니까 꼭 그 심지까지 타는 남폿불 같아요. 이제 그의 삶에 있어서 더 태울 기름은 없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그가 다 타버리고 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분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게 조금만 더 생명의 기회를 주신다면 내가 주를 위해 나의 모든 삶을 다 드리겠습니다. 이제 나에게 부여하시는 생명만큼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저를 거두어가기 원하신다면 저는 그것도 감사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한 성도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완성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수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생각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문제는 기회가 있을 때 무엇인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멀쩡하게 다니다 어느 날 문득 이 세상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부르시면 언제든지 그 앞에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다를 때 우리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생각하는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제한된 기회를 주시는 것은 그 축복을 누릴 사람을 선별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것을 주가 합당하게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선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제한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라는 사도바울의 모습은 사도바울의 애타는 간절함과
더불어서 디모데를 향한 신뢰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겨울이 되기 전에 어서오라는 말은 디모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디모데는 사랑하는 제자요 믿음의 아들이라고 사도바울의 마음에는 각인되어져 있습니다.
내가 너를 부르면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리고 다 가 버리고 나는 이제 죽음을 앞둔 노인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부르면 너는 어떤 여건에 있든지 너는 다 놔두고 나에게 찾아오고 나를 향하여 쫒아 올 것이라는 것을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분명한 신뢰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생각해 보면서 과연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 신뢰를 가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저 아무런 염려 없이, 올 것 분명하고, 부담가지지 않고 우리를 부를 수 있냐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 늘 드리죠. 밀어서 넘어갈 벽은 절대 밀면 안 됩니다. 밀어서 넘어갈 벽을 미는 것은 미련한 짓이죠. 우리가 벽을 밀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벽만 골라서 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고 의지해도 넘어가지 않을 벽만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헌신을 요구하는 것도 그 헌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요구합니다. 목사가 성도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고 ‘같이 헌신하고 믿음 가운데 사십시다.’하고 요청할 때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죠. 믿음이 초보인데 이제 주 앞에 헌신합시다. 하면 그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그게 얼마나 시험 거리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인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전화 드릴 때 있지 않습니까? 전화 드릴 때 여러분께 이렇게 얘기하시면 어떨까 생각해보세요.
다른 교회에서 집회가 있다 전하면서 "...... 성도님이세요? ......집사님이세요? 요번에 이런 집회가 있는데 바쁘시지만, 혹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지만 꼭 참석해 보세요." 하면서 상당히 설득적이며 배려 적으로 이렇게 여러분들이 빠져나갈 구멍까지 만들면서 얘기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회개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 대해서 배려하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받을까봐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바쁜 일이 많으시겠지만 나는 바빠서 못가겠는데 하고 얘기해도 봐준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또 괜히 시험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한다면 “이번에 집회가 있는데 꼭 나오셔야 합니다. 안나오면 큰일 납니다.나오셔야 돼요.” 이렇게 되면 기뻐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되는구나.

여러분 교회에서도 어떤 일을 하는데 세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꼭 그 사람에게는 일하기 전에 사전에 설명해야 해요. 또 그일 하기 전에 시험받을까봐 꼭 그 사람에게는 미리 가서 “이런 일이 있는데 이렇습니다. 또 당신의 역할은 이거고 그런데 이 역할은 아주 좋은 역할이고......” 이렇게 설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요. ‘아 내가 거물인가보다. 그래도 말이야 내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내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생각되어지고 사는가 보다 내가 그래도 괜찮네. 다른 사람이 절대 나를 무시하지 못하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착각이에요. 그건 여러분이 그만큼 어리다는 뜻입니다. 그 만큼 어리석다는 뜻이에요. 그냥 놔두면 그것 때문에 시험받고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고. 여러분, 배려 받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삶이라는 걸 아세요? 배려하지 않아도 처음에 저사람 무슨 소리를 들어서 뭐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도 그 정도는 능히 본인이 해결할 수 있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이해해줄 수 있을 거야. 적어도 마음 편하게 다른 사람이 이런 마음을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볼 때 늘 노심초사하고 마치 아이가 징검다리 건너가는 것처럼 노심초사 한다면 우리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가겠습니까?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배려하고, 언제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보고, 언제까지 우리를 설명하고 데려가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모두의 마음을 편안케 해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듬직한 사람이 돼야하지 않겠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2절>을 보면 ‘믿음 안에서 참아들 된 디모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계실까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가끔 특별한 은혜가 와 닿을 때가 있죠. 우리 아무런 수고 안했는데 일이 잘돼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봉사와 헌신을 요구하시는데 그 자리에 없어도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은 게 아니라 주님이 그 자리에 우리 대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긍휼로 우리를 돌아보시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오라고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우리 대신 그 자리에 계시다가 우리가 그 자리에 가면, 주님은 또다시 다른 어려운 사람의 자리에 가서 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은혜와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지만 모든 것은 시간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구도 적시타라는 것 있죠. 한번 땅 치면 점수가 나와서 그것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 이와 같은 승점을 이루는 적시타라는 것, 그런데 어떤 것 한번 탁 쳐서 일루에 나갔는데 그 다음 타자가 죽어서 그냥 잔루로 남기고 아무런 공헌을 못하는 겁니다. 같은 것도 어느 때 그것이 있어지는가에 따라서 전혀 의미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이라는 것은 시간대위에 존재함으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어느 때 그 일을 했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잖아요.
“힘 있을 때 하라.
시간이 없고 바쁠 때 하라.
정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요청할 때 하라.
세상에서도 무슨 일이든 잘 할 때 주의 일도 하라.
현직에 있을 때 하라.
능력 있을 때 하라.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하라.
남들이 나를 좋아할 때 하라.”
우리에게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실 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을 필요로 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필요로 합니까? 꼭 필요한 그 때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시간 지나면 똑같은 행동을 해도 효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적정한 시기에 적정한 일들을 하셔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갑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어서 오라>는 디모데를 향한 사도바울의 간구처럼 인생의 겨울이 되기 전에 너는 어서 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귀에 듣고 있다면 우리는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주님이 부르시는 은혜의 음성을 듣고 주님 앞에 속히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겨울은 반드시 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반드시 겨울을 맞이하게 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시간을 착각하지 말고, 바로 봐야할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 돼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들을 향하여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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