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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4) : 행복의 비결 (욥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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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I. 본문 해설

욥은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으로 여겨지며,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랑하셨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시험을 당하게 허락하셔서, 그가 평탄한 삶을 살았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하나님의 크고도 넓은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시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욥이 아직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온 세 사람 중 한 사람,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대답 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욥의 세 친구의 답변이 욥의 시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답변이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은 설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비록 그들의 발언은 욥의 시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충고이기는 했지만,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인간의 죄의 결과로만 보았습니다. 그 모든 악의 현상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같은 것들은 읽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그들의 발언 속에서 진리의 내용들을 발견하고, 또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뛰어난 계시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II. 복을 원하는 사람들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인간이 행복을 누리게 되는 길에 대하여 말합니다. 물론 욥은 자신이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를 욥에게 적용한 그의 언급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뛰어난 적실성(適實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1절). 나아가서 그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길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22-26절).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행동하는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도 자신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는 행동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사람은 매우 소수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참으로 객관적인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또 그러한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마음의 움직임과 행동이 참으로 그를 복되게 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사람은 더더욱 소수입니다. 우리는 복 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참으로 복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애쓰는 모든 과정들은 우리를 불행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심을 내기는 하나 향방 없는 자 같이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태만한 사람과 동일한 곳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것은 어떠한 상태일까요? 이에 대한 답변을 주기 위해서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며, 이 요소들의 행복한 상태를 숙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행복한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고통이 없는 육체의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러합니다. 그가 만약 병든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고통 없이 그 병이 깊어가는 것 보다는 아프더라도 그 병을 고침 받고 있는 상태가 더욱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 답변을 위해 우리는 책임 없는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초에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인간 존재의 구성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여기서 ‘생령(生靈)’이라는 번역은 히브리말로 ‘네페쉬 하야(hY")x; vp,n<&iuml;l.)’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육체와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생기, 곧 영혼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요소, 살아있는 육체와 영혼이 인간의 절대적인 구성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요소의 해체나 소멸은 살아있는 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가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영혼이 각각 그것에 적합한 온전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A. 육체의 상태

첫째로, 육체와 관련해서입니다. 인간 존재가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육체가 올바른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육체가 올바른 상태에 있다는 것은 육체가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에 끊임없는 가변적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가 건강한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유지해 주는 끊임없는 자원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육체는 육체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에 의해 쓰임을 받을 때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정신과 영혼의 지시를 따라 올바로 작용할 수 있는 육체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활기와 힘이 있어서 육체 자체로 가장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그런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자원들이 또한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원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과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준비된 음식, 추위와 더위로부터 자원을 뺏기지 않도록 육체를 보호해주는 의복에 이르기까지 육체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고, 그것들은 이 세상에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 세상에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거나,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육체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 활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육체는 행복을 위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역경, 곤란, 혹은 불행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투며 자원을 모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많이 수고하고 애쓸까요? 그것은 바로 육체가 그러한 완전한 상태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자원들을 모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결코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영혼과 정신에 의해 사용될 육체의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려고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참으로 인간 존재의 행복을 위한 육체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결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자원의 목적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 자체의 행복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어떠한 목표도 없이 육체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행복한 상태란 영혼과 정신에게 올바로 사용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상태가 아니라, 육체 자체가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악한 욕망(慾望)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스스로 육체의 노예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영혼과 정신의 지시를 따라 인간 존재의 높은 목적을 구현하며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영혼에는 어두움이 찾아왔고, 마음은 육욕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욕망은 그것을 밖으로 실현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속박(束縛)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악한 욕망을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욕망의 발현은 우리에게 한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 같으나 그 결과는 더욱 더 커다란 속박을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안겨 줍니다. 그리하여 인간 존재는 그 욕망을 인하여 다스려야 할 육체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 존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육체의 욕망에 매여서 마음과 영혼이 종 된 상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육체는 정신과 영혼의 올바른 힘을 따라 봉사할 수 있도록 적절한 자원으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행복을 위한 육체의 상태입니다.

B. 영혼의 상태

둘째로, 영혼에 관련해서입니다. 영혼은 인간의 육체를 움직이도록 지은 바 된 인간 존재의 핵심입니다. 참으로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육체에 외형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 때문입니다. 그 영혼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처음 창조함을 입었을 때, 하나님과 생명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던 그 때의 인간 영혼의 상태는 완전하였습니다. 비록 무한히 완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분이 창조하시고 의도하신 바에는 완전히 합치하는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 존재의 행복을 위해서는 육체보다 영혼이 올바른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육체가 약간의 결함을 가지고 있어서 불편하다 할지라도 영혼과 정신이 올바르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건강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행복하다고 부르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영혼과 정신의 지시를 따라 온전히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육체의 참된 행복의 상태라고 한다면, 영혼의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이는 하나님이 영혼을 만드신 그 목적과 관련됩니다.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인데, 하나님이 영혼을 만드신 것은 인간 존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자기 밖의 세계와 관련된 것인데, 영혼으로 하여금 다른 정신 작용과 함께 자기 밖의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여 자기를 지으신 목적에 유익하도록 살아가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셋째로는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입니다. 이는 영혼이 자신의 존재라는 주체와의 작용 속에서 정신과 마음을 형성하고 그 모든 기관과 기능들이 올바로 작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이런 모든 기능들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영혼 홀로 동떨어진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참으로 그러한 목적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그러하듯이 영혼 자신을 위한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영적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곧 하나님이시니, 궁극적인 생명은 하나님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원천적 생명이신 그분으로부터 그 생명을 받아 누리는 것 없이는 이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행복을 위한 영혼과 육체의 이러한 상태를 올바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복된 상태와 영혼의 복된 상태를 유지하고 증진할 수 있는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어두움에 떨어지게 되고, 영적인 자원들은 끊어지거나 그 공급이 심각하게 장애를 받게 됩니다. 인간 안에는 이러한 자원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영혼은 즉시 고갈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모두 그의 영혼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인간의 지성도, 감성도, 의지도 그러합니다. 인간의 육체보다 영혼을 훨씬 더 중요시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고갈된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서는 육체에 대한 올바른 힘의 행사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영혼이 복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이는 영혼과 육체 사이에 불일치를 만들어 내고, 그 사람은 참된 행복으로부터 훨씬 멀어진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불행한 인간 존재를 고치시기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올바른 상태를 회복하고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진리의 빛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III. 행복의 비결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참된 행복은 그가 가진 육체와 영혼이 건강하고 온전한 힘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속에서 그 생명을 지속적으로 분여 받고, 그로 인해 영혼 자신이 완전한 존재가 될 뿐 아니라 자신에게 합당한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는 그러한 영혼과 정신의 올바른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 지시에 온전히 순응함으로써, 영혼과 정신 안에 있는 지성과 의지가 육체의 불완전함이나 연약함으로 인해 그것의 행사를 제약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 존재는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통해 그 자원을 공급받으며 올바른 지성 안에서 사물들을 분별하고 의지를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하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불완전하게 된 이 세상의 결함으로 인하여 때때로 육체의 자원의 공급을 제약받고, 또 사멸할 육체의 자체적인 결함 때문에 그 완전함을 완전히 구가할 수 없을 때에도, 오히려 영혼은 하나님을 찾으며 그러한 육체의 자원의 결함을 인하여 그분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더욱더 온전해져 가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이 그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결핍 속에서도 그 결핍의 고통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인하여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멸할 육체는 영원히 있을 영혼을 위해 봉사하면서 인간 존재의 가치를 실현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 그렇게 살아가는 길과 방법을 터득하게 되며, 그 진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은혜의 힘을 공급받게 합니다.
이에 관하여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평안과, 둘째로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이 두 가지는 참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A. 행복의 상태: 평안

첫째로 인간의 평안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복된 상태를 누리고 있다고 할 때에 그 상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여기서 “평안”라고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는 “샬롬(~l{v')”입니다. 이것은 평화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말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는 평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 도모하는 인간 차원의 평화의 수립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평화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행복한 상태는 영혼과 육체가 가장 복된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 상태는 둘 사이의 조화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의 상태는 영혼과 육체가 이러한 완전함과 서로를 향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하며, 이를 바로 평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맨 처음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고 있었던 행복의 본질이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물론 다른 모든 피조물,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러한 평안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안은 인간이 누리고 있는 가장 행복한 상태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본질을 오해합니까? 참으로 행복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행복하다 여기는 그 지점에 도달하고 나면 행복은커녕 더 많은 목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은 끊임없이 인간을 또 다른 욕망으로 내달리게 만듭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마름은 육욕적이고 무가치한 절제 없는 욕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이며, 모든 인간들과 세상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갈망입니다. 때때로 이 갈망은 너무나 커서 그들을 우울하게도 만들고,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도 만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망은 육체와 영혼의 상태를 나쁘게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갈망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지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갈망은 인간의 영혼을 점점 더 온전하게 하여 보다 큰 행복에 이르게 하고, 육체는 비록 쇠잔해져 가지만 영혼은 보다 더 고양됨으로써 인간 존재의 행복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이러한 자명한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추구는 육체와 영혼을 점점 더 망가뜨려 인간의 참된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어느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찾아가지만 결국 행복은 신기루처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와 같은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물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행복을 누려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행복을 얻지 못할 것이며, 계속적으로 요동치는 새로운 욕망에 붙들리게 될 것입니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사랑은 끊임없이 변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로 인한 인간의 감정의 기복역시 심하여 집니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평안도 깃들 수 없습니다. 어떤 욕망이 성취된다 하더라도 만족은 잠시이고, 그는 이내 더 큰 것을 욕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즉시 실현되지 않는 또 다른 욕망 때문에 안달을 하게 되고, 그 영혼은 영원히 평안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인간은 좌절된 욕망 때문에도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겪는 인간의 영혼의 고통과 육체의 괴로움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평안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물이나 시간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그 온전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곧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평안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B. 하나님과의 화목

둘째로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앞에서 언급한 평안의 원인입니다. 인간 존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평안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신 안에, 또 사람들 간에 참된 평안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이 둘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그렇습니다.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과 불화하면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그는 거짓된 평화 안에 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영혼의 어둡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의 마음은 결코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거짓 평화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인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참된 평화인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명정(明淨)한 지성을 소유하지 않고는 참 평안을 찾을 수 없고, 참 평안을 힘써 찾으려고 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명정한 지성을 소유하게 된 것은 지혜를 소유함으로써 가능한 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광명(光明)을 갖는 일이라 한다면, 그러한 광명을 가져다주는 원천적 광명은 따로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의 위대함은 인간 영혼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영혼이 그 진리를 바라봄으로써 인간은 참 지혜를 소유하게 됩니다.

인간이 참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거짓된 평화를 바로 알고 그것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마음은 육체를 위한 자원의 넉넉함에 안주하거나 육체의 감각을 쫓는 헛된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안에서 인간은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 쉼은 자유 속에서만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이처럼 하나님과의 화목이 평안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면, 이 화목은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리고 하나님과의 이 화목을 다시 수립할 수 있는 비결을 무엇일까요?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화목의 수립

첫째로, 하나님과의 화목의 수립입니다.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으며,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지성은 명정하였고 그의 의지는 올곧았습니다. 이는 완전한 조화와 행복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인간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확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자리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모든 사물들을 가꾸고 돌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하신 세계를 더욱 영광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상태 안에서 육체와 영혼이 완전함을 구가하는 가운데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들어오기 전,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님과 동떨어진 존재로 살아가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화목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었으며, 모든 피조물들 위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심으로써 회복시키고자 하는 상태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이 상태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그러한 상태를 기초로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며 발전하도록 의도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이러한 상태로 돌아가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을 위하여 이바지 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목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2. 화목의 파괴

둘째로 하나님과의 화목의 파괴입니다. 이는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 화목의 최초 파괴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의 타락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화목한 상태 속에서 창조된 인간은 그 화목한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태어날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단지 한 사람,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최초의 범죄이며, 이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늘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기보다는 무지 속에서 욕망을 따라 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 모두 하나님과의 화목을 상실한 채로 태어나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희망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러한 화목을 다시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둘째, 중생 이후의 화목의 파괴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경험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앞에 자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가 다시 수립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화목은 원리적인 화목입니다. 그 화목은 불변적이며, 흔들릴 수 없는 화목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의 실제 삶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고 참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려면 그분과의 실제적인 화목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인간 존재의 행복은 전 존재적인 행복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이 좋은 상태에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마음과 정신까지 모두 행복한 상태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영혼을 위한 자원을 풍부히 공급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완전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 속으로 들어간 당신의 자녀들을 실제적 화목 속에서 살도록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단지 원리적인 화목만을 위함이 아니라 실제적인 화목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신 그 화목을 실제의 삶 속에서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끊임없는 죄의 유혹과 거짓된 욕망 때문에 하나님과의 이미 수립된 화목을 깨뜨립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신의 본분을 버리고 자기의 욕망이 좋아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상실한 예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신자는 진리와 성령의 지속적인 영향력 안에 있어야만 이 화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끝없는 감화 속에 있어야만 이 화목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단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매순간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자는 이러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을 다시 깨뜨리는 행동입니다. 화목이 깨어진 채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영적인 자원의 고갈로 불행하게 될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는 것은 바로 죄 안에 있는 속임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이렇게 범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를 상실하게 되면 그는 스스로 고립(孤立)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는데도 스스로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고립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살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립은 사람으로부터의 고립도 촉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에 하나는 자신을 지혜롭게 하는 사람과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에 굴복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리는 인간들은, 진리 가운데 거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고립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향한 사랑 대신 그 진리를 미워하는 마음이 이미 자신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이질감을 느끼며 멀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부당한 존재의 고립을 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도 스스로를 고립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스스로 고립되는 정체성의 불안까지 가져왔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잃어버리고 죄와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구원해 주신 것을 태만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룩한 근심과 헌신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늘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붙잡히기를 원하고 그 사랑 안에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파괴는 이처럼 신자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그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더욱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누리며 살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온전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성도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죄에 대해서 진지해질 수 없으며, 죄에 대해 진지해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3. 화목의 재건

셋째로, 하나님과의 화목의 재건입니다. 이는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처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 받은 신자의 경우에는 끊임없는 참회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이 화목은 다시 세워집니다. 구원을 받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살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스스로도 행복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의 길을 걷는 신자는 세상의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는 유지되고, 그 의존의 삶 속에서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께 붙어있게 됩니다. 그러한 은혜의 공급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살게 되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 회심의 순간에는 원리적으로 그의 심령 안에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본성이 심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에 따라 끊임없이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실제적 화목은 이러한 하늘자원의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며, 신자의 영혼은 이 화목 속에서 더욱 온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인 우리들의 의무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입니다. 주의 깊음과 하나님을 향한 존경심, 그리고 그 위대한 능력 앞에 엎드리고 무릎을 꿇는 자기 겸비함 속에서 살아갈 때 이러한 평화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매일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부족하다고 고백합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달으면서도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더 많은 빛을 공급해 달라고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영혼과 육체의 상태는 건강한 상태에 있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행복한 상태에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은 생에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오늘 주님께 예배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이 평화는 주님이 은혜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며, 또 그분의 은혜로써 이 평화를 유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이를 행치 않으시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성령님의 생각과 의지에 여러분이 기쁨으로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또 다른 사람들, 곧 이미 자신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일어났고,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그 평화를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약속된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두 가지가 약속되어 있으니, 순종하고자 하는 자를 위하여 끊임없이 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과 진실하게 회개하는 자를 향한 그분의 무한한 죄의 용서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자비와 용서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어떤 비천한 인간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의 본질이 바로 죄의 용서였습니다. 이것을 기초로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렸던 그 모든 죄로부터 돌이켜 다시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쇄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단지 인간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죄인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욕망을 따라 살던 인간으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자신의 의무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 마땅한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를 갖게 하십니다. 악한 의지를 버리고 선한 의지를 갖도록 그들을 감화시키시며, 그 모든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부단한 사랑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감화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무너진 사랑의 질서를 다시 세우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다른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자의 믿음과 의지적 순종을 요구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용서와 온전한 회복을 믿음과 순종이라는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고 구원하신 인간들을 향하여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수많은 초청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보십시오. 그렇게도 하나님을 거스르던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이러한 외침이 생겨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극도로 패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회복시키신 하나님은 오늘도 잠시 타락과 물러남으로 주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상실한 신자들을 다시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과 방백들은 한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런즉 너희 열조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귀순하여 영원히 거룩케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대하 30:8).

IV.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능하신 창조주 우리 하나님과의 화목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과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희생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시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한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것이 자기 인생의 가장 큰 불행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쫓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린 그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화평한 상태에 있을 때조차도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고 그 화목을 다시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모두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삶으로써 우리 자신이 행복해 질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참된 신자들이 됩시다.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 “화목과 거룩함(골 1:22)”를 듣고 실천 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인간의 참된 행복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영혼과 육체에 대해 각각 생각해 봅시다.
3. 참된 평안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그러한 평안을 누렸던 경험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4. 하나님과의 화목은 어떻게 깨어집니까? 신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지는 경험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5. 신자의 경우, 하나님과의 화목은 어떻게 회복됩니까?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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