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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교회(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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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교회(엡 5:1~2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이 되었기에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마치 때가 묻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한 후에는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듯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거듭난 새사람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옛사람의 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사람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을 통해 "하지 말라" 와 "하라."는 대조법을 사용하여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롭게 입어야 할 것을 몇 가지를 교훈했습니다.

1) 에베소서 4: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하였고,

2) 에베소서 4장 29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즉, 죄를 범하게 하는 분노를 벗어버리므로 에베소서 4:27절에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고 했으며,

3) 에베소서 4:28절에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으며,

4) 에베소서 4: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1~32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주님의 몸을 헐어버리게 하거나 나뉘게 하는 모든 악한 것들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몸인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형제간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새 생활입니다. 이것을 위해 지난 한 주간 동안 얼마나 힘쓰셨습니까?

2007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교회(엡 5:1~2절)"입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예베소교회를 통한 교훈을 통해 교훈을 찾아봅시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함 받고, 새사람으로 사는 성도를 가리켜 '빛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전에 즐기던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새사람, 빛의 자녀란? '지난 날 자신이 걸어 온 어둠의 길을 돌아보며 영원한 멸망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가야만 했을 자신들을 영광의 나라로 이끄시고 소망 가운데 살도록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새사람이 된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체험하여 알고 그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따라합시다. <"서로 인자하게 여기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이런 부탁을 했던 바울은 '그 지극한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아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그 어떤 서신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 2절도 그 사랑이 그 주제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오늘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에게 에베소서와 그로부터 약 30 여년이 지난 후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를 함께 읽으면서 에베소 교회의 형편을 살펴보고 변화 받은 새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떤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빛의 자녀다운 삶인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요한 계시록 2장 1절에서 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1-7)

주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향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게 한 사도 요한을 통해 편지를 보내십니다. 그 훌륭하고 위대한 교회들 중에서 에베소 교회는 첫 번째 편지를 받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였으며, 디모데와 아볼로가 목회를 하였고, 사도 요한이 늙어서 죽기까지 담임목사(장로)로서 시무했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순교한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시무했던 교회였으며 많은 칭찬을 받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그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교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가 '게으르지 아니한 교회'라고 칭찬을 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 교회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뒤로 미루지 아니하고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그것을 실천하는 행함이 있는 교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귀한 신앙을 본받아 수고하는 신앙 인내하는 신앙으로 주님을 위해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섬겨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영적인 분별력이 높고, 믿음이 성숙한 교회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에게 속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잘못을 드러낸 영적 분별력이 뛰어나고, 말씀과 신앙의 수준이 높은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름을 위하여 어떤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칭찬하시기를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시며, 참음과 견딤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 교회는 흠잡을 것이 없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주 모범적인 훌륭한 교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2. 에베소교회에도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에베소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이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교리적으로 온전하게 서있어야 합니다. 교리는 교회의 뼈대와 같고, 기둥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뼈대가 잘 서 있을 때 그 어떤 이단사설에도 현혹되지 않고 순결하고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리를 잘 지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하고, 그 소망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것들을 다 갖춘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가 골격 같다면, 사랑은 살과도 같습니다.

** 골격이 중요한 것이지만 만일 ‘살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뼈다귀만 앙상한 흉한 몰골이 되어 보기 흉하게 됩니다. 메마른 교리와 이론을 내세워 형제자매를 정죄하고 판단만 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사랑만은 위험하지만 말라 뼈다귀만 앙상한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적당하게 살이 오르면 보기에 아름답고 건강합니다. 사랑을 받게 됩니다.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 고 한 것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좋은 토양에 박혀서 영양분을 섭취하여야 잎이 푸르러 집니다. 수목이 울창한 것은 영양분섭취를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무의 영양분과 같아서 사람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귀한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생활 속에 체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저울로 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가슴으로, 삶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아니고서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이 참 사랑을 알게 하시고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랑을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지 말고 행함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사랑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으니 얼마나 사랑이 충만했겠습니까? 그런데 지식으로 가르침으로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으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즉,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께서 편지를 써서 경고하실 만큼 사랑이 식어져 버린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거짓 사도들을 시험하여 교회 안에 거짓된 진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수고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형제자매들을 의심하고 정죄하며 비판함으로써 사랑이 메말라 버린 교회로 변질되었고, 교회의 훌륭한 전통을 내세우고 자랑하게 되면서부터 그들이 처음 가졌던 사랑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점점 어려운 지경에 놓인 것"입니다.

첫사랑,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려는 가슴 설레는 순간의 기쁨을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내 구주로 처음 모셔들일 때 가슴을 설레게 하던 기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죄에서 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두 손과 양발에 쇠못이 박히고, 창에 허리를 찌리시며, 온 몸이 찢기어 피를 흘리시어 죄 값을 지불해 주심으로 '나의 모든 죄 짐을 대신 짊어지신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코끝이 찡해오던 감동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생명을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 <내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내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가를 발견하고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그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나를 대신해 죽어 주셨으니 그 큰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승천하시어 영적 신랑으로 죄인 된 저를 구별시키어 신부로 삼아 주시었으니 그 사랑을 사모합니다." 하고 고백하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첫사랑,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의 촛대는 역사 속에 영원히 옮기어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전성기를 자랑하던 에베소교회가 지금은 흔적마저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겉모습은 화려하고 훌륭하지만 속은 사랑이 식어져 썩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사랑이 메말라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랑으로 시작하지 아니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열정적인 은사를 자랑하지만 사랑의 열매들이 부족합니다. 은사가 교인들을 열심 있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은사를 잘못 이해하여 교만하고 빗나가게 합니다. 처음 사랑을 간직하고 나누는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생활 봉사생활도 하지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채 하나님 주변을 타인처럼 서성거리는 신앙인들은 아니십니까? 과거에는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와 같은 신앙인들은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하나님 사랑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우리 교회를 사랑으로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를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치명적입니다. 양들은 좀처럼 해서는 누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양들과 함께 생활하며 연구했던 '켈러스'에 의하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비로써 눕는다고 합니다.

①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절대 안 눕는다.
② 동료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 절대 안 눕는다.
③ 곤충이라든지 다른 것들이 성가시게 굴면 절대 안 눕는다.
④ 배가 고프면 절대 안 눕는다고 합니다.

보세요. 미물의 짐승까지라도 동료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 편히 눕지를 못한답니다. 아니 누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이겠습니까? 싸우고도, 미워하고 있으면서도 기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모든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신앙생활의 동기가 되는 것이요. 사랑은 모든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사랑에서부터 출발되어지지 아니하는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의미가 없습니다. 옆 사람과 이야기 합시다.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는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아멘>

에베소 교회가 바로 '사랑이 없다.'는 말씀에 해당된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행함이 있었습니다. 수고와 인내 그리고 성실함과 성숙한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에배소 교회가 칭찬 받았던 앞의 몇 가지 일들은 사랑 없이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습관적으로 의무감으로 책임감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3. 우리가 오늘 사무총회 후에 임직을 받은 후 실천해야 할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동기에서 신앙 생활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자기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2) 습관적으로 기계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그런가 하면 책임감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직, 교사, 성가대, 각부임원으로서의 책임 때문에 열심히 봉사합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너의 충성 안에 나를 향한 사랑이 있느냐?" 고 물어보십니다. 사랑이 없는 행위는 형식과 의식이라는 껍데기만 남깁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없고, 남는 것은 '피곤'뿐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자증이 생깁니까? 교회 오려고 하면 피곤하고, 봉사하자고 하면 귀찮아 집니까? 사랑이 없는 인내는 짜증만을 남기고 화목하게 하는 힘도 부족합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는 지루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겉보기에는 그럴듯해도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형식과 피곤과 원망과 불평뿐이고, 성도 간에 비판과 다툼이 있으며, 고집과 교만만 남아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제가 그렇습니다. 주여 사랑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옆 사람 손을 잡고 고백합시다. "우리 교회가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도록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멘>

내 속에 과연 사랑이 있는가? 에베소교회를 향해 지적하신 이 모습들이 나와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살펴봅시다. 우리 가운데는 신앙생활 시작한지 얼마 안된 분도 있고 오래된 분도 있습니다. 그 오래된 신앙 연륜이 여러분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습니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굳건한 신앙 골격 위에 세워놓았습니까 아니면 사랑은 빠져 버린 채 형식과 습관만 남게 했습니까?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신앙입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구원에 대한 감사 감격을 이기지 못해 주님의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충성입니까 아니면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또는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충성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연륜에 관계없이 그 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바라기는 에베소 교회가 주께로부터 칭찬 받았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주께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베소 교회에는 부족했던 사랑이 우리 교회에 더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본문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본받아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오늘 에베소서 본문이 말씀하는 바로는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빛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똑같이 나의 이웃들도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는 나의 이웃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1)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본문 2절에서 바울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 때 동물을 잡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려면 우리 역시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와 형제들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비록 처음에는 내 믿음, 내 구원, 내 가족, 내 문제를 위해 나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기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이웃과 교회를 향한 섬김으로 그 사랑을 자라가게 하시기 바랍니다.

2)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먼저 손 내미시고 화해를 청하셨으며 예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사랑으로 죄와 허물도 용서받았고 영생의 선물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알고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같이 될 수는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이 없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쯤 용서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곱 번쯤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 물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이 없고 완전한 용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것은 490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도 무한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눈이 갑자기 제 기능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눈에 꽁깍지가 쉬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상대의 실수를 과감히 덮어줍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사랑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분명히 잘못되었는데 본인들에게는 안보이게 됩니다.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썼는데도 지적으로 보이고, 키가 작으면 아담해서 좋고, 뚱뚱하면 푸짐해서 좋다고 합니다. 얼굴이 동그랗게 생기면 보름달을 매일 보게 되어 좋다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용납하고 덮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만이 죄와 허물을 덮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 우리는 죄인이기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죄들을 파묻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와 부모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영혼을 보면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그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면 나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미워하는 내 마음이 편하질 않습니다. 기도와 찬송과 감사의 기쁨을 빼앗겨 영적 삶에 손해가 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에도 손해가 됩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고 기쁨이 찾아옵니다.

??‘맥스 루케이도’라는 분의 <곤고한 날의 은혜, 형통한 날의 은혜> 라는 시가 있습니다.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미움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어떤 비통함으로도 불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선택하겠습니다.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그것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나도 용서받으며 살고 있으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오랜 기다림을 불평하기보다는
기도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냉담한 사람에게 자비를 보여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대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격다짐으론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나는 온유함을 선택하겠습니다. 스스로 절제하겠습니다.

믿음으로만 열정을 태우겠습니다.
하나님의 영향만 받겠습니다.

"하나님의 영향만 받겠다."는 시인의 고백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그 사랑을 나누며, 용서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사랑 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참 중요한 것이지만 건강하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건강을 잃으면 결국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체의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교회의 건강이 중요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건강을 잃고 병든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적인 기능을 상실한 교회는 병든 교회라 한다면 건강한 교회는 교회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잘 수행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교회(엡 5:1)”로 정했습니다. 우리교회의 금년도 표어 이전에 우리 교회가 세워질 대 추구하고자 했던 교회 창립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첫 글자 "진리"와 "사랑"을 본 떠 '진애교회'의 이름으로 존재했으나 경남 '진해교회'로 오인하므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자는 구국기도 사명과 민족 회개 운동을 주도하자.'는 취지로 "미스바교회"로 개명을 하였습니다.

잘 자라가는 것은 건강한 생명체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잘 성장하는 교회가 바로 건강한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자라가려고 힘쓸 때 교회는 건강한 교회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면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믿음이 건실해 지고,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자나 마음이 슬픈 자들이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위로를 받게 되고 낙심한 자들이 교회에 나오면 주의 능력을 따라 새 힘을 얻으며, 역경을 돌파하고 시험을 이길 새 힘을 공급받게 되며, 죄를 짓고 잘못된 자들이 교회에 나오면 십자가의 희생과 용서의 사랑을 통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 새 삶을 살게 되며,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하여 새 생명 얻은 빛의 자녀들로 가득한 행복한 성도와 교회가 됩니다. 우리 미스바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 진리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양육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을 실천하여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섬김의 실천운동이 시작되기를 소원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진리가운데 바로서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함 받은 자들이요. 어두움의 생활을 떠나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받은 사랑과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새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 하는가?’를 날마다 묵상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살기로 결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나릉 위해 피 흘리시고, 희생해 주신 사랑을 처음 깨닫고 한 없이 고맙기만 했던 그 첫 사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인으로 멸망 받아야 마땅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계십니까? 오늘 임직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은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는 빛의 자녀들로 사명을 감당하여 나로 말미암아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여 충성된 일꾼으로 복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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