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요 6:16-21)

  • 잡초 잡초
  • 362
  • 0

첨부 1


오늘 본문은 약 2천년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 한척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을 향하던 중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역시 그때의 제자들도 이 폭풍 앞에서 두려워하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14:22절에 의하면, 그때 사실상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촉으로 거의 강제적으로 배에 태워져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폭풍은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제자들의 실수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었으며, 예수께서 친히 허용하신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해집니다.
예수 믿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의 인생에도 폭풍은 반드시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고난을 당할 때, 본문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1.폭풍속에 처함이 주께 버림받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파도와 풍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보편적인 심리적 경험을 갖습니다.
하나는 버림받음의 느낌이며, 또 하나는 홀로됨의 느낌입니다.
따라서 예수믿는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고통속에 처한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며 나는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아마 갈릴리 바다 한 복판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의 심정도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의 기사를 읽어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막6:45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작별한 후에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막6:48을 보면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젖는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던 중에 제자들이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일어난 폭풍으로 노를 젖고 고생하는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폭풍 중에 처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은 우리는 아무 도움없이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통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결정적인 때에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여러분,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막6:50절에서 예수께서 마침내 제자들 곁에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몇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우리교회 비전센타와 새성전 건축이 진행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과연 우리가 이것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제 마음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진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그때는 건축현장을 둘러볼 때마다 불안한 생각과 염려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가운데 목양실에서 마가복음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6:50절 말씀이 이렇게 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쓰여 있기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저에게는 주님께서 “너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안심하고 근심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후 저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바다로 나아가셨다면, 우리가 만난 폭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순히 인생의 폭풍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폭풍 속에 필요한 도움이 곧바로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폭풍을 만나 주님의 도움을 부르짖어 간구할 때, 때로 우리는 기적적으로 즉각적인 도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가 도움을 부르짖어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즉각적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왕상 19장의 엘리야의 갈멜산상의 기도가 그런 경우입니다.
엘리야는 가물어 기근이 극심한 그 땅에 주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 비를 주시기를 기도했고, 그의 종이 바다편에 가서 일곱 번씩이나 확인할 때까지도 비 소식은 없었습니다.

또한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던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들은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요11:6절을 보면 이때의 예수님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가신 것이 아니라 지체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지 나흘이 되어 그의 무덤에 도착하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치유의 기적보다 더 위대한 부활의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지체에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만났을 때, 필요한 도움이 바로 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실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시 본문의 사건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배를 탓을 때는 밤 9시경이었고, 그리고 이어서 오래지 않아 그들이 풍랑을 만났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파도가 심하여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고, 아직도 6시간은 더 지나야 바다 건너편에 도착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14:25절의 의하면 예수님이 찾아오신 시간은 새벽 3-4시사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19절에 의하면 파도 속에 십여 리를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바다는 폭이 약 10km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바다 한복판에서 사투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의 현장에서 인생의 사투를 계속하며 주님의 도움을 간구했지만 응답은 주어지지 않은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응답의 거절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때에 드디어 주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의 때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 고난의 현장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응답이 없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시고, 다만 주님의 때가 되지 않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립시다.
우리는 급하지만 그분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판단하신 적기에 그분은 반드시 오십니다.

3.폭풍 속에 찾아오시는 주님를 만나 목적지로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제자들이 지쳐서 거의 삶을 포기할 무렵에 드디어 주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제자들이 파도를 헤쳐온 동일한 바다 길을 헤치며 물위로 걸어 오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협하던 동일한 파도를 타고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그는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전혀 예측하거나 기대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마침내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이 구세주를 우물에서 만날 줄 어떻게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청년 사울이 어떻게 그 길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될 줄을 알았겠습니까?
빌립보 감옥에 죄인으로 수감된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거기에서 주님의 구원의 기적을 경험할 기대나 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대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주님의 때에 우리를 찾으실 것입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제자들은 기쁨으로 배 안으로 영접하였고, 배는 그들이 가고자했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파도와 풍랑이 방해는 되었지만 마침내 제자들은 그들이 가고자했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따라서 파도와 풍랑을 이기고 도착했기 때문에 그 기쁨은 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이 이때 경험한 기쁨이 상당한 슬픔과 두려움의 시간 이후에 경험한 기쁨이요, 환희였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이 슬픔이요, 두려움인 성도님이 계시다면, 이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고난의 현장에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응답이 오지 않아도, 상황이 빨리 개선되지 않아도, 나의 인생의 결론이 이렇게 비극으로만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폭풍의 한 복판에서 우리 주님은 나를 지켜보시고 함께 아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1986년도 노벨 문학 수상작가였던 유대인 엘리 위젤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엘리 위젤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의 “홀로커스트”라고 하는 대학살의 현장에서 생존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전에서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의 죽음이상으로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가지 사건을 그는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과 13살 정도된 한 소년이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 하나로 전체 수인들이 집합된 자리에서 교수대에 그의 목이 매달려 죽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반시간 이상 목 졸린 채로 허공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혀를 내밀고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던 이 소년을 보면서 엘리 위젤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피눈물나는 외마디 절규를 토해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때 그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난 저 소년과 함께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수년 후 엘리 위젤이 생존자가 되어 불란서 파리에 가서 유명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Francois Mauriac)을 만났을 때, 그 체험 이야기를 들려주자 모리악은 조용히 엘리 위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타난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싶소. 이천년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질머지신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경험하는 고통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가 이것만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함께 하시며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함께 하고 있는걸 잊지 말아야 해. 그리고 난 너를 반드시 저 바다 건너 영원한 목적지로 인도할거야”
따라서 제자들이 당한 폭풍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오늘 나의 삶에 고통 속에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시고 승리하시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